인터뷰 내용

허영자 시인을 만난 봄 날 -저작권 협회 회장

권남희 후정 2007. 4. 20. 11:35
 

 

허영자 시인을 찾아서   (사진촬영과 글정리 권남희 수필가 )

2007년 한국수필 5월호 권두대담

  물과 불의 속성으로 극적 조화를 이룬 허영자 시인. 

  허영자 시인은 가냘프게 보인다. 그러나 일단 말씀을 시작하면 강단이 느껴지는

  데서 녹녹치 않은 세월을 엿 본다


대담날짜 : 2007년 3월 27일

시간 : 오전 11시부터 12시

이철호 이사장과 허영자 시인.한국저작권 협회회장을 모시고

대담 진행 : 윤주홍 부이사장


이철호 : 선생님을 뵈면 항상 소녀같고 목소리 또한 청아한데 머리만 하얘졌지, 20-3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의사인 관계로 저는 가문마다 기질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결이 있습니까 .

허영자 : 선생님이 저명한 의사였는데 제가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원래 몸이 약하다 보니 어른들이 집에서 외딸인 저 하나를 위해서 신경을 많이 써주었습니다 .

이철호 : 원래 ‘쭈그렁 밤이 3년 간다’는 말이 있는데 알고 보면  장수자는 모두 약골 출신입니다. 장대같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너져요. 운동 선수가 일찍 죽는다는 말과 상통하지요.          

윤주홍 : 성품이  긍정적이고  외유내강형의 어떤 심지가 느껴집니다. 원래는 말수도 적은 편이었겠지만 직업상 말을 많이 해야 하게 된 것도  그렇고 후천적으로 변화된 성격도 있지 않나요.  

허영자 : 맞습니다. 앞에 나서서지 않는 편이어서 선생님이 시켜야 할 수 없는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말수가 적어지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 내성적이고 몸이 약하니까  할머니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삼계탕을 해주면서 건강을  챙겨주었는데 그 뒤를 이어 어머니가 저를 위해 정성을 들이니까 동네에서는 어머니가 딸 하나만 위해서 산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어느 날  화가 한분을 만났는데 70이 넘으신 그 분의 기억 속에 있는  저는 ‘ 장기를 잘 둔 여고생, 어머니가 삼계탕을 먹이던 학생’ 으로 남아있어서 웃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누가 챙겨주지 않으니까  스스로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빈혈도 있어서 교직에 있을 때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맨손체조 ( 스트레칭이지요)를   아침 저녁으로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

이철호 : 사람마다  자기만의 방식이 있겠지요. 저는 30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 네시 반이면 일어나서 우면산을 오르거나  골프를 하고 비가 오는 날은 사우나를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아침 7시 30분입니다. 아파트에서 제가 지나가면 경비실에서 ‘  교대시간이야’라고 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허영자 : 이제 몸  여기 저기가 아프니까 제 나이 70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젊은 날 박종화 선생님 고희 잔치에 갔던 기억을 했습니다. 그 때는 젊으니까 ‘고희’ 라고 하면 너무 먼 세계의 일이고 어떻게 70살이 될  수 있을까  언제까지고 저는 젊은 모습으로 살 것 같은 착각에  나이를 먹는 과정이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철호 : 고운 음색과 외모에 그 많은 남성들의 유혹을 어떻게 뿌리쳤을까도 궁금하지만 , 더 알고 싶은 것은  선생님의 문학세계와 현재 문학계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허영자 : 문학은   서정의 세계가 뿌리를 이루었다고 봅니다. 김소월부터 그 이전 최남선,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옛 고전을 읽으면서 당시 젊은이들은  문학공부를 했습니다.  전통적인 것과 서양문학 이론 에 바탕을 둔 것도 읽었지만 정지용. 미당, 목월 등 직접 배우지 않아도 작품을 통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미당의  ‘산도화 ’ ‘화사’ 시를 읽으면 감동적인 것이 가슴을 울렸지요. 그런데 문학이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되고 70-80년대 이후 산업사회기 되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던 제도가 없던 사회에서 상업과  산업, 공업이 발달하고 기업주과 노동자가 형성된 사회에서는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인의 가장 강한 촉각이 현실을 직시하고 시로 표현하는데 노동시나  정치시를 참여시라고   했습니다. 반면 서정시를  현실을 무시한 음풍농월이라고 치부하면서 정치시만 참여시라고 하는 게 못마땅했습니다. 모든 현실은 문학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역사 속에 잊어서는 안 될 ,각 사회의 변화에 따른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0년대, 60년대도 그랬지만 4.19와 5.16을 직접 겪어온 중심이  젊은이였는데 70년대부터 서투른 외국시의 영향을 받은 시를   모던 작품이라 평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필연성이 빠진 난해한 작품은 경계를 해야하지요.        

   문학은    언어 매체로  표현수단을 삼기 때문에 어떤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모국어의 특징, 어감, 의미 이런 것이 서투른 외국어의 시법으로  모던이라고 하면 언어예술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위대한 것은 사상, 철학, 표현의 수사와 은유, 상징이지 않습니까.   직설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틀립니다. 그런 영향이 요즘 있다고 봅니다.

이철호 : 한국인은 유난히 장르의식이 강하다고 보는데 문학의 장르파괴에 대한 생각을 알고싶습니다

허영자 : 우선 시에서 보면 정형시에서  산문시로 형식이 바뀌었지만 분명 시 전체에는 엄연히  긴장과 생략, 함축이 내재합니다.  그리고 시나 소설로 나누는 까닭은 각자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새로운 것으로 인해 공명감을 불러일으킨다면 타당하지요. 처음 휘트먼이 산문시를 발표했을 때 시인들이 욕을 했습니다. 투르게네프도 산문시를 썼고 보들레르도 함축시를 썼습니다 . 어렸을 때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 음악이 나오면 음표를 그려 넣으면 어떨까 . 그런 상상지이요. 우리 시조가 정형시조에서 파괴되어 시설시조로 되는 것은 불가피한 자연 현상이지만 공감을 얻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불가피한 장르파괴는 있을 수 있지만 공감을 얻지 못하면 사라지기 때문에 예술의 장르는 제도와 같다고 봐야하겠지요. 공감을 얻지 못하면 사라지는 것은 가족제도에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다시 일인가족사회로 전화하고 있는데요.

피천득의 수필을 읽고 있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시에 가까운 함축과 생략, 비약이 있어서 즐겁기도 하지만 괴롭습니다. 지적 쾌감이  고통을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철호 :  우리나라도 저작권 보호법이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이버 공간과 디지털 작품에 대한 저작권 보호를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 있습니까

허영자 : 1957년 처음 우리나라에  저작권 보호법이 만들어지고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작가들도 막상 모르는 점이 많습니다. 저역시 그런 경험이 있는데 오래 전에  콜롬비아 대학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레디아드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 교수가  책을 냈는데 한국에서는 저작료도 내지 않고 그냥  냈다고 하면서 엄연한 도용이다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당시에는 ‘왜 내면 안될까’ 생각하면서 깜짝 놀랐었지요. 당시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거의 모두 충무로에 있는 B사에서  파는  복사본을 샀으니까요. 저작물을 복사해서 그냥 쓰는 행위가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초상권도 마찬가지지요. 저작권법도 84년도에 저작인협회를처음  만들고 89년도 신탁 관리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작인들을 대신해서 고소도 하지요. 

그런데도  지금도 청계천에 가면 인지도 붙이지 않고 무단으로 팔고 있는 책이 많습니다.       이철호 : 시아버 공간과 디지털 쪽은 아직도 법적으로 재제를 가하기가 어렵지 않나요

허영자 : 개정이 여러번 되었습니다.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불합리한 부분을 국회에 올려 저작권자의 권리가 강화고 있습니다. 저작권  협회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면 모든 원하는 자료가 잇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전공서적을 사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복제전송 협회, 문예학술자적협회 회원이 2000여명 있는데 문인들의  인지가 약해서 문인협회하고 같이 저작권보호에 대해 세미나를 열기도 했습니다 .

아직까지는 교과서가 확실하게 보상을 받고있는 실정입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저작권보호에 대해 대안을 마련중입니다. 시청료를 내듯이 법적 장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을 들어 다음이나 야후, 등 큰 기업체에서 자기네 회사에서 필요한 복사기계를  사듯이 계약을 맺으면 중간 사용자들이 저작료를 안내고 사용해도 되는 것입니다.

이철호 : 저작권법이 강화되고 사이버공간이나 디지털 저작료까지 작가들에게 수익이 돌아가면 예술가들의 복지에 주는 영향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허영자 : 가장 명백한 점은 작가들이 가장 확실하게 재사누건 행사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문화의 시대라고 하지만 예술가들이 사용료를 더 안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출판사에서 붙이던  인지가 사라졌고 인터넷에서 자신의 작품이 떠돌아도 내 작품이 알려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방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재산에 대한 권리를 지키도록 행사를 해야 합니다.

이철호 : 그렇다면 원로 예술인들에게 있는 특별혜택이라도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허영자 : 아직 이렇다하게 내세울 만한 혜택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저작료를 받아가는부분에서 유족들이 혜택을 더 받는다고 생각해야겠지요.  사후 50년 까지이던 보호법이 FTA 협상에서  미국이  70년이기에 우리가 양보를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지적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보다 아직 우리가 남의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 불합리한 점을 느끼겠지만 우리도  지적 생산물을 수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철호 : 문학을 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허영자 : 문학이 교양일 수도 있거든요. 옛날 어른들을 보면  집집마다  문집이 있고  누구라도 문학을 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장원급제도 결국 문학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당시에는 교양이 될 수 있었지만 전문가의식으로 했다고 봅니다. 내 일생을 통해서 한 번 밖에 살 수 있는 일회성의 삶에서 문인이 되고 문학을 하며 최선을 다해서 심신을 소진하는 , 심각한 자세로 선택을 했다. 문학인구가 늘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위대한 문인이 탄생하지 세익스피어 시대도 문학 예술의 시대였어요. 

외국보다 우리나라에서 시집이 제일 많이 팔린다고 하는데 막상 치열한 전문가 의식이 없다고 봅니다. 교양은 애호가가 되지만 문인으로 행세하면서 교양정도로 삼으면 다시 고려를 해야 합니다.  ‘자기투신’을 갖는 전문가의식, 외로운 마라토너의 정신으로 문학활동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윤주홍 : 허영자회장님의 말씀은 문학 애호가와 교양인으로 만족하려는 많은 신진작가들에게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게 합니다. 모든 말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철호 : 감사드립니다. 작가들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수고하시는 허영자 회장님께  더욱 더 일 할 수 있는 건강 주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