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용 소설가 문화훈장 받던날 1998-1999? 분명하지 않음
왼쪽부터 오찬식 소설가. 박건호 시인. 차범석 희곡작가. 유재용 소설가. 한여선 시인. 권남희 수필가. 전경애소설가
김성순 의원. 유재용 소설가.
2008년 겨울 호 문파문학
유재용 소설가
가을의 끝물인 11월 22일 목요일 유재용 소설가를 만났다. MBC아카데미 잠실점에서 선생님의 소설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3시가 되자 소설반 회원들과 선생님이 나오시고 있었다. 종강 회식을 해야 하는 날 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선생님을 납치하여 피천득 기념관으로 가니 벌써 지연희 수필가(문파문학 발행인)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유재용 소설가와의 관계
권남희 수필가
‘소질’은 선택이다! 98%는 죽어라 하면 문학도 안 되는 것이 없다고 강조하는 유재용 소설가와 나와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처럼 송파에서만 20년이 넘는 인연으로 다져오고 있다. 특별히 잘해드리는 점도 없는데 작가의 입장에서 나는 톡톡히 선생님의 덕을 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사하게 느끼는 마음은 커지고 선생님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길 뿐이다.
지연희 발행인도 송파와의 인연은 남다르다. 송파문화원에서 90년대 초반 문학 강의를 맡아 한동안 송파문화원을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지연희 수필가를 아시아 공원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세워두고 사진도 찍어주었다. 공원의 은행나무는 아직 그대로인 채 유재용 선생님과 우리들은 십 수년의 시간을 지나와 다시 자리를 했다.
유재용 소설가가 처음 가락동에 집필실을 냈을 때였다. 나는 축하를 드리기 위해 선생님 사무실에 들렀다가 부러운 마음이 들어 선생님처럼 언젠가 집필실로 써야겠다며 덜컥 같은 건물 8층에 장만을 하고 말았다. 그 후 선생님이 송파문인협회 회장을 맡으셨을 때 나는 수필분과 회원으로 활동했다. 권위의식이 없는 선생님은 언제나 유머로 회원들을 대해 주시며 편안하게 이끌어 주곤 했다. 선생님은 다시 송파문화원장이 되시고 우리는 문화원 건물 2층에 송파문인협회 사무실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돌이켜 보니 유재용 소설가를 배경으로 힘을 얻은 그 때 가장 긍정적으로 발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송파구 작가 창작지원금을 받아 두 번째 수필집도 낼 수 있었는데 모두 유재용 회장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유재용 소설가를 말할 때 이상 문학상을 받은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80년대 처음 ‘관계’ 작품을 대했을 때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가는 작가인데 실제는 어떤 모습일까 참 궁금했었다. 현실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은 1989년이었는데 프랑스 인상파 화가 폴 세잔느를 닮은 선생님의 어느 면에 그런 천재적 발상이 있을까 생각했다.
동생과 함께 문방구를 하던 선생님은 어느 날 문득 ‘내가 내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타인의 세계’를 썼고 얼마 후 다시 ‘하수인’ 을 발표한다. ‘하수인’은 내향성의 주인공이 마음으로 훔치고 싶다하면 하수인이 훔치고 그런 이야기인데 미흡하여 고쳐서 ‘관계’라는 소설로 탄생하게 되었다. 소설 작업에 대한 동기는 최근에 선생님을 모셔 특강을 듣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소설에 대한 신비감은 사라졌지만 글을 쓸 때의 구조적 접근법은 조금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실 선생님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다. 소설이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밝히는 선생님은 척추 병으로 불치라는 진단을 받고 앓아 누운 채 지내야 했다. 할 일이라고는 책읽기와 끄적이는 그런 문학 밖에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렇게 독학으로 공부하여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동화작가는 지면 얻기도 그렇고 아동취급을 받는다는 피해의식들이 있어 소설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언젠가 문인협회 총회에 나가 분과별로 앉아있는데 누군가 아동문학을 ‘아동’이라고 쓴 팻말을 보고 ‘누가 아동이라고 써 붙였냐?’ 고 항의하는 것을 보고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도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유머를 섞어 말씀하시는 선생님이지만 내면은 예민하고 자상하고 가끔은 상처도 잘받는다. 소설 당선 과정도 남의 일 이야기하듯 꺼내신다.
동화 당선 후 3년을 끙끙 거려 소설 신인 예술상에 응모를 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빨래 비누를 사왔는데 비누를 포장해 온 신문지를 펼치다가 당선작 발표자에 유재용 ‘손이야기’를 보게 되었다는 좀 싱거운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당시는 그야말로 전화도 귀한 시절이니 당선통지 이런 게 잘 없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 앞에서 갑자기 '강원도의 힘‘이라는 독립영화가 생각났다. 고향과 문학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이향離鄕이 작품의 가장 큰 소재라고 하는 선생님의 고향은 강원도다. 강원도에는 유독 소설가가 많다는 불확실한 짐작만 갖고 질문을 한다.
“강원도에는 소설가가 많지요?”
많아도 특별히 구심점이 되어 모이지는 않는다며 선생님은 특유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잘근잘근 말투로 풀어간다. 지리적 특성으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성격적인 부분은 강원도사람들에게 확실히 있다고 한다. 산이 높고 깊으면 체념하고 순응하는 성격일 수 밖에 없으니 정서적으로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을 수 있는 소설 장르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신다. 멀게는 허균, 허난설헌, 신사임당부터 김유정, 이태준 ,황금찬시인, 윤후명 소설가 김유정문학촌 촌장으로 있는 전상국소설가, 신봉승극작가, 이외수, 구혜영, 서영은 소설가 등 누에고치 실뽑듯 끝없는 작가의 열거에서 정말 강원도의 힘이 느껴진다.
선생님은 젊은 날 작단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했는데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전상국, 김원일, 김용성 등 쟁쟁한 분들이다.
“문인은 성자와 동급인가요?‘
선생님이 어느 지면에 밝힌 ‘나의 창작노트’에 소개한 匠人-文士- 聖者 라는 글을 보고 묻는다. 선생님이 한 때 문인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진 시절 문인을 성자와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세속적 성취욕에 사로잡힌 문인이 성자가 되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만큼이나 힘든 일이라고 짚어준다. 물론 각자가 추구하는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차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술성과 도덕은 엄연히 다를 뿐이라고 한다.
“성자는 어떤 신 앞에서 검증을 거쳐 경건성을 지키는 사람이고 문인은 미적 형상화로 미를 구현하는 사람이지 않겠어요? 지나치게 구속받는 사람은 글이 안 되지요. 문학은 얽매이면 안 되니까 문사에게는 윤리적 도덕적 개인 생활이 반드시 작업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지연희 발행인이 다시 문학작품에서 요구하는 ‘주제의 중요성’에 대해 여쭈었다.
이제 주제보다 방법적으로 달라진다고 봐야한다고 한다, 새롭게 보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기교를 부린 소설이나 문학작품이 쏟아져 나오니까 경쟁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차별화 시킬 수 있을까도 솔직히 생각한다. 다 써 먹은 이야기를 방법적으로 흩어놓고 뒤집고 해서 새롭게 보여주기를 시도한다고 본다. 과거에는 역사나 사회 문제만 다루어도 작품으로 충분했다. 일제 시대가 그러했고 해방기 그리고 6.25전쟁과 분단 실향,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 후일담 이후 페미니즘의 등장과 여성의 의식변화 등이 작품의 주를 이루었는데 다시 격변기가 사라지면서 주제가 빈약하니까 가족사를 다루는 소설들이 나오고 있다.
노트북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젊은 작가들도 존재하는 게 현대사회다. 나는 선생님에게 컴퓨터와 창작노트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었다. 물론 선생님은 해묵은 창작노트가 몇 권씩 있다. 선생님은 ,오래된 노트부터 최근 기록까지 기발한 착상이나 순간을 잡아둔 기록을 볼 때마다 감탄하며 창작의욕에 불을 당기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몇 년만에 기록된 것을 볼 때 그 의미를 까맣게 잊고 그것은 새로운 의도로 변질될 때도 있다고 한다.하지만 감자가 썩어야 녹말이 되듯 의식 표면에서는 잊었지만 깊이 쌓아둔 것과 연결된다고 본다. 삭히는 일은 아무래도 아날로그여야 할 것 같고 매 순간 마다 노트북에 의지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도리어 묻는다.
선생님은 수필도 많이 썼다. 모든 작품이 모두 수작이겠지만 그중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지 않을 까 궁금했다.
애착이가는 작품은 아무래도 이상 문학상 수상작품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면서 처음에 소품이라고 할 수 있는‘관계’는 후보에도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심사하는 과정에서 별다르게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으니까 김동리 선생이 ‘열심히 하는 작가 추천해라’하여 지연도 , 학연도 없는 선생님이 받았던 것이다. 문학을 위해 성실한 자세로 오로지 한 길을 가는 선생님에게 행운의 여신이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단지 운이었다고 하지만 정말 운으로만 그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게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문학도 과정이라고 선생님은 다시 강조한다. 노력형으로 성실함이 무기인 선생님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경력과 인맥을 쌓아올렸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것도 모두 소설의 단서를 삼고 씨앗으로 만들어두기에 경륜이 산을 이루고 있는 선생님의 작품 중에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나오기를 기도해본다.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처럼 늘 그렇게 변함없이 서 있는 유재용 선생님을 대할 때마다 언젠가 내가 받은 모든 작가적 혜택을 선생님에게 돌려드려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은연중 선생님의 덕이 내게로 베풀어졌음을 깨닫는 시간들이다.
유재용 소설가
1936년 6월 6일 강원도 강화에서 태어나다 . 서울 환일고등학교 중퇴. 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키다리 풍선’ 당선. 1968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상지대’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단.
주요작품으로 <타인의 생애> < 누님의 초상> 등 . 장편소설 『성역』『사로잡힌 영혼』 『꼬리달린 사람』『쑥꽃』『한여름 밤의 꿈』 외 다수. 1978년 <두고온 사람>으로 현대문학상. 1980년<관계>로 이상 문학상, 1982년 대한민국 문학상 . 1985년 조연현 문학상. 1987년 <어제 울린 총소리>로 동인문학상. 1994년 박영준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송파문인협회 회장과 송파문화원장, 사단법인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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