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그리움은 무슨 맛일까?

권남희 후정 2012. 2. 28. 13:28

2011년 7월 전주진북초등학교 제 1회 예비동창회를 참석한 후기   (권남희 수필집 <육감 &하이테크> 작가의 말로 실었음

그리움은 군고구마다

 

               권남희 수필가 (월간 한국수필 편집장) stepany1218@hanmail.net

 

고향을 떠나 살면서 한동안 향수병을 앓았다. 사춘기적의 서울을 향한 동경심이 끝나자 나는 비로소 고향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 눈물짓고 두고 온 나의 모든 것들을 밤마다 떠올리며 편지를 썼다. 특정지역 사람을 벌레취급하는 서울을 사랑할 수 없어 고향 버스 색깔, 친구들과 쏘다녔던 중앙로와 드나들던 수예점, 튀김집, 오가던 성당 길, 경기전, 남문시장, 마스게임 연습하던 공설운동장. 우체국 등 ....... 새록새록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흔적들에 집착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벌레’가 될 수 없었던 나는 며칠씩 말을 하지 않은 채 고향 냄새가 나는 골목 이곳저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움 때문에 살아 갈 이유를 찾는 것일까. 그리움은 하도 순수하여 찬바람에 솟는 소름처럼 우르르 솟다가, 따분한 봄 햇살에 진저리를 치며 멀미를 하다가 어머니가 보내준 장아찌나 김치 한 가닥만 집어먹으면 가라앉았다.

살다가 맥없이 눈물이 솟을 때 그리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45년 만에 전주진북초등학교 동창회를 가면서 설렜다. 하나같이 가슴에 콧수건을 달고 입학했던 순둥이 코흘리개들은 얼마나 변했을까. 헤어진 지 반세기가 다 되어도 그저 정답고 혈육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들의 부모형제가 감출 것 없이 비슷한 처지로 살아가며 다정했다는 사실이다. 어은골, 도토리골, 다가동. 숲정이. 후생주택, 태평동 아이들은 하루라도 안보면 안 되는 것처럼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징검다리를 건너 서로를 찾아다녔다. 점심을 굶는 집, 저녁까지 굶는 집이 많았던 시절 학교에서 배급으로 옥수수빵을 주고  우유가루를  주던 시절이었다.  시험점수 100점을 맞으면 옥수수빵을 몇개 주었는데 엄청난 횡재로 알고 동생들을 주기위해 먹고싶은 것을 참고 집으로 가져가곤 햇다.  가진 것이 없어 더없이 순박하고  세상을 모르기에 욕심도 부릴 줄 몰랐던 원주민들.......   

이제 인터넷으로 서로를 찾아내고 스마트폰, 디지털기기로 무장한 채, 집전화도 귀했던 아날로그의 모습이 아닌, 별들의 전쟁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변해 알아보지 못하고 당황했던 우리들........ 이내 서로의 천진함을 알아채고 가슴을 열자 그 속은 온통 잘 구워진 군고구마였다. 역시 그리움이 잘 익으니 맛있었다.

그때 우리들의 하늘에는 진짜별이 총총 떠있었지? 그 많은 별의 이름을 외웠던 것처럼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던 시간들이 별처럼 떠있다.

베이비부머 그대 낭만주의자들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옥라. 여봉. 동희. 창식. 계순. 숙자. 복희. 순자. 학윤. 우철. 현관. 재수. 용식. 진수. 성규. 정중. 병룡. 용순.병주, 종민. 정석. 석모. 주섭.철........분신처럼 붙어 다녔던 나의 숙희. 글을 잘 썼던 정환. 노래를 잘 불렀던 명희. 헤세의 데미안처럼 어둠의 세계를 인식하게 했던 한 녀석 그 이름은 잊기로 한다.

시인 김용택은 섬진강을 노래했다. 전주천은 우리를 키워주었기에 ‘ 전주천이 있어 우리들은 행복했다’고 노래해야겠다. 어머니들의 빨래터가 있고 아이들의 성지였던 그곳은 여름이면 멱을 감으며 하루를 살게 하고 겨울이면 얼음을 지치고 얼음뗏목을 만들어 배를 타고 다니도록 터가 되어주었다.

순박하고 정다운 사람들은 모두 자기별로 떠났지만 아이들이 자라 다시 모여드니 물결이 찰랑거린다.

전주천 고구마들. 하늘의 별이 될 때까지 따끈따끈한 군구마가 되어주는 거다.

 

부안댐 입구에서 2011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