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권남희 수필 <육감 &하이테크> 수록 작품 '누가 그를 천하다 할까

권남희 후정 2012. 3. 4. 10:14

 

 

 

누가 그를 천하다 할까

 

권남희(월간한국수필 편집장)

 

 

을지로를 지난 지하철이 시청역에 서고 문이 열린다. “씨ㅂ....... , 왜 문을 막고 지랄야? ” 한 남자가 기세좋게 밀고 들어오고 내리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한눈에도 그는 오랜 노숙생활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건만 험악함은,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친 개의 털 곤두세운 모습이다. 50대쯤의 그에게서 자기방어를 위한 과장된 제스처를 느낀다. 털썩 그가 내 옆에 앉고 20-30대 직장인들로 차 있던 지하철은 시청을 지나면서 텅 비는 순간을 맞는다.

갑자기 정적같은 시간이 내 머리칼을 곤두세워 나는 나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흘낏 그를 염탐한다. 빗질 안 된 그의 머리는 올마다 엉켜 새가 알을 낳아도 될 만큼 집을 지었다. 내 구두 옆으로 고개를 내민 그의 검은 구두는 모양이 일그러지고 곧 터질듯 낡아 푸른 물이 배어있다. 씻지 못한 몸을 가린 기다란 국방색 사파리는 얼룩이 쌓여 방수 옷으로 변했다. 그에게서 소화 안 된 소주 냄새가 퍼지며 달려든다. 손가락마다 기름 때가 켜로 앉았다. 나는 그를 불행을 짊어진 사람으로 치부하여 벌써 무시하고 있다. 드러내놓고 내색 하지 못하는 나의 불편한 마음을 그도 이미 읽고 있다.

책을 읽고 있던 나는 그를 의식하면서부터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책장이 안 넘어가니 호흡까지 딸린다. 얼른 피해서 다른 자리로 갈 수도 없는 채 그대로 얼어있다. 비상벨위치를 확인한다. ‘돈을 달라’든가 시비를 거는 나쁜 일을 나는 상상하며 불안하게 앉아 다음에 내릴까를 고민한다. 어느 날 서울역에서 보았던 노숙자들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舊 역사 주변 여기 저기 바닥에 앉아있는 그들에게서는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엉키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엉켜있는 그들, 고야의 그림 ‘정신병동의 내부’에 나오는 벌거벗은 남자들이 엉켜있는, 그런 장면을 보는 착각이 들었다. 햇살아래 자신을 마음껏 드러낸 채 취한 그들은 부끄러움은 잊었다는 듯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벗지 않았는데도 벌거벗은 느낌의 그들....... 비록 그들이 평온을 원하는 온순한 성품이라 해도 그날 광장에 주저앉아 있던 노숙자들은 나에게는 삶의 의지를 팽개쳐버린 듯 충격적 풍경일 뿐이었다. 비둘기들은 그들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날며 떨어진 먹이를 쪼아댔다.

 

언제부터 비둘기들과 그들이 같은 풍경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도시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비둘기들은 아침이 되면 거리를 뒤뚱뒤뚱 뛰어다니고 이곳 저곳 박혀있던 노숙인들도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한다. 밤새 도시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쪼아대고 술 취한 사람이 쏟아낸 토사물이나 얼음덩이를 부리로 찍어 먹을 거리를 찾는 비둘기들 사이로 느릿느릿 노숙인들이 움직인다. 그들은 그렇게 거리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살아간다.

그가 내 마음의 불편한 소용돌이를 읽었는지 말을 던진다.

“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마라톤회의를 했어요.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닙니까. ”

“.......”

“ 어울려주어야 하는 게 직장입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어요. 남자의 세계는 냉정하거든요.”

“.......”

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라도 응대하여 그가 던진 낚싯줄에 걸려들면 감당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삶을 초탈하고 모르는 게 없는 달변으로 나를 설득하려 한다면 그것 또한 힘든 일이지 않을까.

나는 가방 안에 있는 껌을 만지작거린다. 그가 쉬는 숨은 가만히 있어도 흔들리는 술잔이 되어 술 냄새를 뿌린다. 책에 얼굴을 박다시피하고 있는 나의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는 서너 정거장을 지나면서 슬그머니 내린다.

‘그래, 나 이런 사람이야. 잘난 사람아! 돈 좀 주라’ 그렇게 막 나와도 그에게 똑바로 살라고 할 사람은 없다. 비어있는 자리를 보니 머쓱해진다.

언젠가 길을 가다 코피가 쏟아졌는데 닦을 것이 없어 당황하는 나에게 자신의 코를 닦은 음식점 냅킨을 잘 접어주던 어느 노숙인의 친절을 잊었단 말인가. 나는 풀을 먹는 사슴이고 그는 사슴을 잡아먹는 맹수라도 되는 것처럼 날 세웠던 나의 경계심이 맥없이 무너진다. 그가 남기고 간 술 냄새는 그의 마음이 되어 ‘아침까지 회의가 있었다’고 한 말과 함께 맴돈다. 모두 잘나가는 직장인들만 오가는 것처럼 활기 넘치는 도시에서 어느 아침인들 자존감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까치집을 지을망정 삭발하지 않고 남겨둔 그의 머리카락처럼 엉킨 꿈도 가닥가닥 풀어내면서 자기를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한 때 꾸었던 꿈이 그래도 사라지지 않았기를 기도한다. 무한한 신뢰를 주던 아버지가 잉태한 꿈을 이어받아 노력했던 전설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전설만 삼키는 아들이 되어 어느 지하계단에서, 광장에서 두려움이나 무력감과 씨름하며 술을 마실지 모르지만 그 시간이 오래가지 않기를 빈다.

 

짧은 시간 자존심을 지키느라 오히려 불편했을 그의 자리를 본다.   2011년  수필세계=홍억선 주간 = 수록작품 ( 제 5수필집 <육감&하이테크> 수록

 

 

권남희 약력 :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등단. 현재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덕성여대평생교육원 .MBC아카데미 롯데목요수필. 강의

작품집 『미시족』『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 』등 5권

제 22회 한국수필문학상 . stepany12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