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2일 여성신문 에 실린 문학기행 (사진 전수림수필가. 윤중일사진작가. 김단혜수필가촬영)
『토지』를 한국인에게 선물하여 큰 사랑을 주고 떠나신 박경리 소설가를 만날 수 있는 그곳
권남희수필가 (사.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stepany1218@hanmail.net
원주시 단구동 박경리 문학관에는 언제나 선생의 문학적 자취와 흔적을 볼 수 있는 자료실과 영사실 등이 있다.
글쓰기 외에 박경리 소설가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텃밭을 일구던 호미와 밀짚모자, 그리고 재봉틀이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도 나다니기를 싫어하여 ‘구멍지기’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여행 한 번 제대로 하지않고 오로지 5부작 토지완성에 매달리기만 했던 선생의 검소하고 절박했던 문학적 생 앞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작가로서 더욱 정감이 가고 조금이라도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문학관 앞에 위치한 , 1980년 이후 집필공간이 남아있는 집이다. 이쯤이 텃밭이었을까. 제법 넓은마당으로 올라가면 먼저 그 어떤 사람도 다 품어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박경리 선생 조각을 만나게 된다. 누구나 선생 앞에 서면 아이가 되어 그 품안에 뛰어들고 싶을만큼 넓은 치마폭의 선생은 웃으며 맞이하고 있다. 넓은 치마폭은 선생의 생전에 품었던 큰사랑이다. 집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책상 위에 원고지와 펜이 정리된 선생의 방을 유리창너머로 들여다 본다.
1969년 토지집필을 시작하여 오로지 적막으로 가득찬 집에서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사마천을 생각했다지만 사실 두려웠던 대상이 있을 법도 한데 선생은 대장부라는 생각을 한다.
“대문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까치독사, 하이애나도 있었지.” -박경리 시 「옛날의 그 집」 -에서
살아계실 때 박경리 문학상 제정을 거론했지만 그보다 토지문화관을(원주시 흥업면) 지어 글쓰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밥 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박범신 소설가는 토지문화관에 들어가 박경리소설가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하숙집 아줌마’라고 불렀다는데 개인적으로 솔직히 부럽기도하다. 선생의 사랑을 받았으니 말이다. 후배작가들을 위해 집필공간을 마련해주고 밥과 반찬을 해주었던 곳은 행복공작소임이 분명하다.
문단데뷔 때 “내가 행복했더라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이제 선생은 행복해도 너무 행복해 보인다.
실제 여행 보다 상상의 여행을 좋아했던 선생의 능력은 소설에 잘 묘사된 경남 하동 평사리를 가보면 알게 된다. 소설가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19세기 한국에서의 지주 삶과 자리잡은 터가 아무리 전형적이라해도 소설을 쓰기 전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 평사리 최참판 댁을 완벽하게 그렸던 것이다. 물론 이미지재현을 위해 지도를 놓고 평사리 들판을 찾아냈다는데 선생도 작품이 나온 후 평사리를 가보고 작품과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고 고백했다. 3면이 지리산 줄기에 싸이고 섬진강을 끼고 있는 들판이 토지가 태동하는 배경이다. 3백명이 등장하는 소설 『토지』에서 중심인물은 서희와 종으로 살다가 서희와 결혼하고 두 아들을 두게 되는 길상이다. 구한말부터 3,1운동까지 격동기를 살아가는 둘의 사랑은 처음부터 애틋하기보다 상당히 복합적이고 아프기까지 하다. 공간이동도 하동 평사리에서 경성, 만주, 간도, 연해주 , 일본 등 다양하고 인물간의 관계도 읽히고 설켜 읽는 내내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된다.
5대째 지주로 내려온 아흔 아홉 칸 최참판 댁 입구에 서면 위용도 대단하지만 탁 트인 들녘이 내려다보여 한 인물이 탄생한다면 큰 뜻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곳에서 최참판의 외동딸 서희가 몰락한 집안을 일구기 위해 집념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집안을 지키고자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당찼던 드라마에서의 어린 서희의 모습이 가슴을 아리게했는데 결연한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영화와 세 차례의 TV 드라마로 제작될 만큼 『토지』는 한국적인 아우라를 갖고 있다.
대하소설『토지』를 쓰는 내내 갈등도 많았으리라. 차라리 고독을 극복하기가 더 쉬웠을 것같다. 작가로 우뚝 설수록 문단의 질시도 힘들었을테다. 어느 해 밤은 통곡을 하다가 다시 몸을 추스려 글을 썼다고 한다. 선생은 어쩌면 주인공 서희에 자신을 투영시키며 26년의 시간들을 버티지 않았을까. 고향도 아니고 살아보지도 않았던 평사리가 이토록 작가적 영감을 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토지』와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의 『대지』는 모두 다르지만 어쨌든 떠올리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전수림촬영
선생은 땅, 대지, 흙의 단어도 있지만 ‘토지’를 선택한 이유를 ‘ 사유재산 시작과 함께 인간은 자연의 순수한 존재와 결별하고 역사의 단계에 들어갔다.’ 고 밝혔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만 있으면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곳, 박경리 소설가는 평사리에서 등장인물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고 본다.
문학이 인생만큼 거룩하지도 않고 절실하지도 않다는 선생의 심중을 어렴풋이 깨달아가는 중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아부일 것 같다.
시인을 꿈꾸었던 박경리를 소설가로 만들어준 김동리 소설가의 안목을 생각한다.
5월이면 박경리 선생 5주기가 된다. 1주기 기념 특별전을 보러 신사동 현대갤러리 가 보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또 흘렀다. 언제가보아도 정답고 작가의 에너지를 받아올 수 있는 곳....... 또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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