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문학 2013년 봄호 권두대담
문학의집에서 2013년 2월
샘물소리, 경쾌한 순결의 노래를 들려주는 박이도 시인을 만나다
입춘이 지났지만 2월의 서울은 겨울 바람이 남아있다. 문학의 집.서에는 박이도선생님이 벌써 도착해있었다. 단아하고 흐트러짐없는 자세의 선생님에게서 시인의 의지가 묻어난다. 문학의집 본관에는 마침 원로 문인들의 ‘문학속 서울’을 주제로 하는 글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선생님 작품도 있어 사진을 촬영하고 있노라니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이 들어섰다. 정겨운 바람이 성큼 따라 들어선다. 김후란 이사장 이사장. 전옥주 사무처장. 이희자 시인 등을 자연스럽게 만난다. 이곳에 오면 외가에 들른 포근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장소: 문학의집.서울 (중구예장동)
일시: 2013년 2월 12일 오후 2시
정리: 권남희 월간한국수필 편집주간
구정을 지낸 직후라 박이도선생님께 새해인사부터 드렸고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을 여쭈었다. 늘 단아하고 신앙인의 절제된 모습이 배인 선생님은 말씀도 조용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선생을 대하니 훔친 색종이 새를 다시 교회 유치원에 갖다두는 어린 모습이 겹쳐진다. <유년기의 눈과 귀> 산문에서 선생은 교회유치원시절 한 여자아이 색종이 새를 몰래 가져갔다가 두려움과 죄의식에 다시 갖다두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민족의 수난사를 겪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했던 유년기의 체험이 한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컸다고 서술하고 있다.
선생은, 우연히TV 채널을 돌리다가 <아버지의 노트북>이라는 다큐멘타리를 시청했는데 아직 연민의 감흥이 식지 않고 있다는 말씀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품성을 느낄 수 있었다.
말기폐암환자인 주인공이 일본에 살고 있는 치매에 걸린 노모를 찾아가서 마지막으로 만나고, 또 누님을 만나고 귀국해 생을 마치는 줄거리였는데 임종을 앞둔 모자간의 대화가 그때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 하신다. 요즈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떻게 하면 웰 다잉 즉 존엄사를 할 수있을까하는 문제라는 선생은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노트북> 이 다큐멘타리에서 어느 단막극 못지않은 감흥을 받은 것이다. 공연히 딴 얘기를 꺼낸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씀까지 덧붙인다.
독실한 신앙인 집안에서 자란 선생이지만 시인의 일상은 어떨까 궁금했다.
지난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는데 아름다운 설경을 많이 볼 수 있어 좋았다한다. 마치 신선이 된 것처럼, 어린 아이같이 즐거웠다는 선생의 표정이 아이처럼 해맑다. 선생의 일과는 새벽3~4시경에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를 열고 이동활 음악 까폐에서 매일 배달해 주는 음악을 들으며 컴퓨터를 검색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또 하나 음악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것도 뒷맛이 오랫동안 생각할 수 있는 빌미를 얻어 좋았고 기도와 음악과 함께 겨울을 보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작년에 수석전시회에 시화전도 함께 열었고 그 앞서선 문인극 ‘배비장’에도 출연해 노익장을 보여 주셨는데, 그것에 관한 얘기가 궁금했다.
재작년, 문학의 집에서 개최한 문인극 <배비장전>에서 주인공인 ‘배비장’역을 맡아 무대에 서 봤다. 전직 대통령 한 분이 “내가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했던 말처럼 시인이 아무리 아마추어들의 문인극이라고 하지만 주연을 맡아 볼 줄은 상상해 보지도 못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두 가지 소득이 있었다. 하나는 책임감에 대한 의무였다. 연기를 하기로 결심한 날부터 연극이 끝나는 날 까지 약 70여일 동안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는데 이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었고 또 하나는 한 팀이되어 매일 같이 모여 연습했던 감독과 단원들에 대한 인간적 정을 갖고 무한한 우정을 얻은 사실이 아름답게 남아있다.
박두진 시인의 스승이 청록파 박두진 시인이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선생은 박두진 시인에게 수석수집도 배우느라 7-8년 같이 움직였으니 시뿐 만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배움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선생은 지난해 초 수석전을 기획했는데, 그렇다면 시서화전을 겸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서화전을 겸하게 되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신다. <박이도 수석 시서화전>이 된 것이지만 수석은 박두진 선생님을 따라 다니면서 인생까지 배웠다고 생각한다.
박이도 시인은 몇 해 전 문단 데뷔 50년을 맞아 문학의 집에서 기념강연을 하셨다. 그 오랜 기간 문단 인사들과의 교류와 후학들을 양성한 교직생활 시절의 뒷 애기를 부탁드렸다.
선생이 문단에 나온 것은 1959년 자유신문 신춘문예에 시<음성>(서정주 심사)으로 당선하고 그 해 학보 병으로 군에 갔다가 제대후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황제와 나>(박두진 박남수 심사)라는 작품으로 당선하면서였다. 게다가 5·16 다음해 제1회 신인예술상(공보부주최) 시부문(박목월심사)에 수상하는 행운도 따랐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시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연륜으로 쌓여 문학의집에서도 불러주었다고 생각한다.
경희대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선생은 스승부터 선후배 작가인맥이(황순원 조병화. 김정수 ....) 대단하지않을까 생각했지만 선생은 그런 문인들과의 교류를 부담스러워하셨다.
사실 선생은 대학생시절과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시절에 비교적 많은 문인 선생님들을 찾아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김광균, 김동리,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 서정주, 조병화, 황순원선생님 등이었다. 학교에서, 혹은 문우들과 함께 자택으로 방문하기였다. 김광균 선생님과의 인연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시가 발표된 며칠 후 장문의 편지와 시집<와사등>을 보내주셨는데 편지내용은 당선작 <황제와 나>의 독후감과 격려의 글월이었다. 이 편지에서 김선생님은 이 작품이 한국 현대시사에 기록될만한 작품이라고 극찬의 말씀이었다. 그 후 이 편지를 당시 신촌에 하숙하던 마산출신 친구들이 보자고 성화를 대 갖다 주고는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되었고 편지는 분실됐고 김광균선생님께서 ‘박이도’ 이름을 친필로 쓰고 서명해 주신 시집 <와사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김동리 선생님께서 연초에 찾아간 내 친구들에게 묻기를 “박군은 어떻게 지내는가” “박군은 무슨 스캔들도 없나? 너무 조용하니 소문도 없나보다.”라고 소식을 물었다고 전해 들었다. 학생시절엔 종종 연초에 세배차 친구들과 함께 찾아 뵙군 했으나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엔 별로 뵙지 못했었는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죄송스러워 다음 해엔 찾아뵈었던 기억이 난다. 김현승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었다. 근무하던 신문사 주변의 한적한 다방에 들어가 보내 거기 김현승선생님께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계셨는데 초면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다가가 이러저러한 박아무개라고 인사를 드렸다. 그랬더니
“아 자네구만, 자네 시를 많이 읽어보았네. 목사아들이라며? ”문단에 신출내기인 저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계신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 후 이러저러한 명분으로 몇 차례 더 만났다.
유신 후 선생은 의기소침해서 기자생활을 접고 숭실고교로 자리를 옮겼다. 숭실은 김선생님의 모교(평양)였다. 박이도시인이 학교로 가자 김현승선생님은 자신이 재직하던 숭전대(대전소재. 나중에 숭실대로 분리)로 와서 석사과정을 밟으라고 권면해 주셨다. 몇 번 망설이다가 등록하고 석사과정을 마쳤지만 석사 첫 학기에 선생님께서 운명하시고 말았다.
2010년 선생은 문학인생 50년 기념으로 4권의 문학전집을 펴냈다. 전체적으로 ‘신앙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사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 본인 스스로 종교를 선택했다기보다 어른 손에 이끌려 다니던 교회생활의 연장이었기에 신앙에 대해 성인이 된 후 돌아보며 문학과 신앙의 두 차원을 교감시킨 것들이 많았다,
“ 뜨뜻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반성과 참회의 의미가 있다.”고 선생은 <발견> 시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언어에 대한 회의를 가지면서 재치있고 풍자담긴 한국의 민담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회유산에 문학이 포함되었다. 기뻐해야할지... 디지털 사회 문학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선생께 예견을 부탁드려본다.
앞으로 점점 종이책 출판의 여건은 악화되는데 종이책이 사라질 경우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한다. 우리말의 압축과 조어 등으로 심한 왜곡현상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지 않은가.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앞으로 1백년쯤 지나면 우리 후손들이 현재의 TV 드라마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태가 올수도 있다.”고 진단하였다. 사색이 약화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사용으로 사이버 공간에서의 글은 검색수준이 대부분이다. 또 한가지 문제는 텍스트만 길게 있을 때 정독을 하지 않는 속성을 보이고 사진이나 그림 등 볼거리가 먼저인 점, 글은 짧아야 하고 자료찾기나 정보검색이 독서활동을 대신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미디어콘텐츠를 구독하는 문화가 조성 되어가고 있는데 종이책 한 권 없는 도서관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은퇴이후 문학에 뜻을 두는 신진작가가 많아지는 지금 문단 후배들에게 주는 선생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하나의 잣대를 갖지말고 다양하게 열심히 하기를 바란다. 문학활동은 지금이 오히려 더 여유롭고 세련되었다고 본다. 우리 시대 문학활동이 얼마나 척박하고 열악했나는 당시 동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열정을 쏟았다. 63년 3월 동인지 <신춘시> 가 나왔고 이무렵 동인지 <現代詩> 여류시인 동인지 <靑眉>등이 창간되었다. <新春詩>는 신문으로 데뷔한 분들 모임이었다. 제1집에 참여한 시인은 강인섭 권일송 김원호 목훈(장윤우) 박봉우 박열아 박응석 박이도 신명석 신세훈 윤삼하 이수익 홍윤기 등이었다. 그후 많은 분들이 들고 났으며 그 수명이 십 몇호까지인지 정확치 않지만 동인지로서는 비교적 장수했다.그후 ’66년엔 동인지 <四季>(김 현 김주연 김화영 정현종 박이도 황동규)에 참여했다. 이 동인지는 연 1회로 3회(68년)로 그치고 <68문학>으로 발전적인 해체를 한 셈이다. 이 <68문학>도 1회로 그치고 말았는데 당시는 언론자유도 없던 때 그저 글을 쓴 다는 기쁨으로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
소시장에서--박이도
가난을 풀어가는 길은 /너를 소시장에 내놓는 일이다
한숨으로 몇 밤을 지새고 /작은 아들쯤 되는너를 앞세우고
마을을 나선다 /너는 큰 자식의 학비로 팔려간다
왁자지껄 막걸리 사발이 뒹군다./소시장 말뚝만 서 있던 빈 터
찬 달빛이 무섭도록 시리다/헛기침같은 울음으로
새 주인에게 끌려가던 너의 모습/밤사이 이슬만 내렸다
우리집 헛간은 적막에 싸이고 /아들에게 쓰는 편지글에
손이 떨린다./소시장에서 울어버린 뜨거움
아들아, 너는 귀담아 들어라 /오늘 우리집안의 이 아픔을.
集中--박이도
먼 곳의 어떤 소리에
길게 귀를 뽑는 나의 모습이
어둠속에서 저 쪽 인기척에
숨을 죽이고 떨리는 내 안의 모습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내 시간을 찾아 허둥대는 집중
이 순간,
허망한 메아리의 사라짐같아
먼 곳에 귀 대어 보네.
박이도 시인과 오른쪽 권남희 월간한국수필 쳔집주간
박이도 약력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역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자유신문사 신춘문예.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데뷔
1962년 제 1회 신인예술상 수상. 시집< 회상의 숲> <북향> <폭설><불꽃놀이>등 다수. 수필집 <선비는 갓을 벗지않는다> 등 다수
편운문학상. 기독교문화대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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