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2013년 가을호 수록 원고
간직을 위해 잊혀지는 종이책의 역습
아트북의 전설 슈타이틀 (How to Make a Book with Steidl ) 展
대림미술관 ( 2013.4.11- 10.6)
대림미술관 전면
권남희 stepany1218@hanmail.net
종이책이 언제 사라질까 이 불안한 마음을 독일 출판계의 거장 게르하르트 슈타이틀이 한방에 날려주기를 기대했다. 대림미술관 1층부터 4층까지 슈타이틀과 세계적 거장들이 책만들기 작업에 참여한 공정과정이 사진과 실제 책들로 전시되어있다.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등이 전자책으로 대체하고 종이책 기증은 공간부족을 이유로 거절하며 내다버리고 있는 상황에 슈타이틀은 멍청한 세상을 화들짝 깨우는 반가운 손님이다. 그는 12살에 이미 사진작가 카르티에-브래송처럼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오직 출판과 디자이너의 길에 집중했던 그의 아트북과 타이포그래피는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했다. 종이 책에 대한 가치관이 어디까지 나랑 같을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 나는 기록하고 전하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들었지만 마음만은 아날로그인 채 무한복제를 시작한다. 아날로그 카메라와 필름 인화하는 곳이 거의 사라지고 디지털 카메라가 장악한 것처럼 종이책도 그런 과정일까. 마치 나의 죽음을 위해 수목장용 나무와 장소를 준비하거나 무덤을 미리 보아두는 것처럼 종이책작가의 종말 그 낌새가 늘 불편했다. 하지만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식감 때문에 음식문화가 발달하듯 사라지지 않는 종이책의 진화를 슈타이틀 전시에서 예감한다. 나는 잃어버린 입맛과 잃어버렸던 그 시절만의 후각을 찾아낸 듯 싱싱한 물고기가 되어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그는 아날로그 시대 마지막 책공예 운동가일까. 유연한 중국책을 참고해야한다는 책의 무게, 제목, 텍스트본문 활자, 글씨체, 표지, 종이, 결방향, 각주표시, 등 18항목에 걸쳐 공정을 제시하고 있다. 4층까지의 모든 전시내용이 에르메스와 롤스 로이스를 기록한 사진작가 코토 블로포에가 함께한 슈타이틀 출판사의 세밀하고 소소한 일상기록이다. 종이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주는 슈타이틀의 장인정신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선구자 로버트 프랭크, 현존하는 팝아트 거장 짐 다인의 에칭삽화,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그라스와 협력하여 만든 책, 샤넬의 수장 칼 라거펄트와 작업하며 만든 샤넬글씨체와 사진작업들이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다. 삽화를 위해 목판. 석판에 에칭을 하여 찍어내는 수작업과 글자체나 크기를 예술적으로 배치하는 섬세한 작업이 놀랍다. 세기를 빛낸 아티스트들이 종이책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다니 감동이 밀려들며 왜 우리는 대세에 밀린다는 피해의식으로 무언가 시도하지도 않고 안 될 거라는 생각만 해왔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북아티스트는 텍스트의 성격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서체를 골라야 하고 서로 어울리는 포맷과 종이를 선택하고 시간이 지나도 계속 만족스러울 수 있는 표지를 입혀야한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관점에 승복한다. 특히 3층 전시장은 샤넬체를 개발한 창의성이 돋보이고. ‘아름다운 표현을 위해서 소금이 쳐져야한다’는 그의 적극적 예술론도 설득력이 있다.
그동안 팔리지않는 책을 쓴다는 자의식과 자비출판이라는 콤플렉스에 허술하기 짝이없는 생각과 무방비한 자세로 책을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든다.
3층 전시장 입구 양쪽에 지킴이처럼 세워진 종이꽃 기둥은 말한다.
‘종이책은 종이로 만든 문화의 꽃이다.’ 침묵속 그들의 재해석을 들어본다.
나는 늘 디지털 기기 앞에서 잊혀지고 버려짐을 강요당하고 일회용들에게 실종직전으로 내몰리는 나의 것들을 보아왔다.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있는 종이사진들 앞에서도 무기력하다. 나와 함께 하고 나를 대신하고 나를 말하는 아날로그적인 것들은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불러오는 시대........ 왜 백남준 비디오 아티스트는 종이문화는 사라진다고 예언을 해서 이렇게 떳떳하지 못하게 만들고 불안 속에 가두는 것일까.
슈타이틀의 전시장에서 책으로 만든 책장을 보면서 ‘ 이제 종이책을 버리지않아도 된다 !’ 안도를 한다. 종이책을 정리하는 날이면 나는 '조금 더 간직하면 안될까‘ 갈등을 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는데 씨앗을 뿌린 후 대책없이 돋아난 어린 푸성귀들 중에서 상품이 되지 않을 것들을 솎아내는 모습이었다. 액자 속 슈타이틀은 말을 건넨다. “종이책과의 이별이 그렇게 아프면 이런 식으로 너의 종이책들을 전시하는 게 어때?”
아트북을 생산하는 슈타이틀의 의도는 그가 인용한 발터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글에서 분명해진다.
“독자와 필자사이가 사라진 세상에서 글쓰기는 보편화된 재능이다.” 글쓰고 책을 내는 일이 더 이상 재능이 되지 않는 디지털 시대에서 종이는 소모품이 아니기에 종이의 예술시대를 열고 글자와 그림, 사진을 섞어 가치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How to Make a Book with Steidl 展이 열리는 대림미술관은 평일인데도 종이책을 생각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도서관이 아닌 미술관에서 종이책 만드는 과정이 예술로 대접받는 일을 상상이나 했을까. 1층 전시장 입구에서 팔고 있는 종이책 향수-인쇄된 책의 잉크냄새-에서 인간적 체취를 느낀다면 과장일까. 앞으로 인간의 존재가치를 돈이 아닌 종이에서 평가받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버려지는 종이책을 모아 종이책 향수를 만드는 상상을 한다. 헌책 향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하는 동화책 향수, 교과서 향수 등.... 향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는『향수』소설에서 인간적 냄새를 갖지 않고 태어난 인간유형을 창조했다. 주인공은 아무도 자기를 인간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실에 고통을 받으며 인간적 체취를 얻기위해 25번의 살인을 한다. 인간성을 잃은 현대사회를 풍자한 천재적 감각의 소설이다.
종이책 향수를 보며 소설 여행을 떠난다. 전자책 사회에서 종이책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2100년쯤 종이책 냄새가 나는 사람을 교사나 공무원 채용에서 가산점을 주는 것이다,
미술관 밖 정문에서 바라보는 미술관은 창문도 예술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러시아화가 칸딘스키의 콤포지션 X 그림처럼 빨강,파랑 노랑색상을 입혀 멀리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슈타이틀과 만난 반나절동안 나는 다시 모험심으로 충전된 나를 느낀다.
* 작품제목 패러디( 로버트폴리도리의 “디지털은 잊기위해 만들고 아날로그는 기억하기 위해 만든다.”에서 )
권남희 약력 stepany1218@hanmail.net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당선 .현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
작품집 『육감&하이테크』『그대삶의 붉은 포도밭』『시간의 방 혼자남다』등 5권
제 22회 한국수필 문학상 . 제 8회 한국문협작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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