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까 시바료타로 기념관장과 김우종 교수. 유혜자 이사장 인터뷰
시바료타로 기념관 관장 .가우� 김우종 교수. 오른쪽 유혜자 이사장
시바 료타로 기념관 우에무라요오코오(上村洋行)관장과의 대담
보고만 가는 곳이 아니라,
무언가를 느끼고 얻어가는
일시; 2008년 5월15일
장소; 시바 료타로 기념관 회의실
대담; 본 협회 유혜자 이사장
통역; 본 협회 정명숙 고문
“단지 보기만 하고 가는 곳이 아니라, 무언가를 느끼고 얻어가는, 혹은 시바 작품과의 대화,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공간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수필가협회 일행이 동 오사카(東大阪)에 있는 국민작가였던 시바 료타로기념관에 도착한 것은 지난 5월 15일 오후 2시였다. 본명이후쿠다 사다이치(福田定一)로 시바 료타로 전집50권 등 많ㅇ른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가 1996년 돌아갈 때까지 기거하고 집필했던 자택과, 자택에 붙여 지은 건물(지난 2001년에 건축을 완공한 건물)까지 포함한 시바 료타로 기념관은 밖에서 보기에는 아담한 주택 같았다.
자택이 있는 쪽 정문으로 들어가, 잡목이 우거진 작은 정원을 지나면서 그가 많은 작품을 썼던 서재가 유리창너머로 들여다보였는데 다시금 반원으로 휘어진 유리복도를 따라가니 높다란 서가가 눈에 들어왔다.
안내원의 인도로 사무실에 들어가니 고인의 처남 우에무라요오코오(上村洋行)관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시바 료타로기념관의 특징을 물었을 때 “단지 보고만 가는 곳이 아니라 무언가 느끼고 얻어가게 하는 것이 기념관의 목적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다.
다음은 관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유: 귀 기념관이 여느 문학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관장; 우리 기념관은 가운데는 수장(收藏), 전시, 정보발신 홀 등 세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대표할 만한 것으로는 높이 11m나 되는 벽면 서가에 책이 가득 있는데 이것은 이미지 전시로 2만 여권이 전시되어 있고 자택에는 자작도서를 포함해서 6만권 정도 책이 있습니다.
작가자신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작품구상의 그림을 여기 한군데 모아 두어야 안심할 것 같아서 모아둔 것이 자료메모, 연필로 줄친 것, 메모지를 붙인 책 등으로 작가의 창조과정을 탐색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태여 자택의 장서를 옮겨올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선생은 “시바선생하면 책이죠”하고 ‘또 하나의 서재’인 이미지서가를 세워주었습니다.
유: 한국에도 개인문학관이 많은데 국가의 보조로 운영됩니다. 귀 기념관은 어느 단체나 후원자의 도움이 있습니까.
관장; 시바 료타로가 돌아간 1996년(2월12일) 11월에 그의 업적과 유지를 영구히 전하려고 문화청의 허가를 얻어 시바 료타로 기념재단이 발족을 했습니다. 이 기념관외에 <시바 료타로상>과 <시바 료타로 휄로우쉽> <유채꽃을 기리는 문학 및 강연회>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유: 시바 료타로는 초기에는 전기성향이 강한 작품을 썼는데 역사소설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일본의 국사’라 불렸고 한국에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소설로 방향을 설정한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관장; 19세에 오사카외국어대학 몽골어과에 입학하여 제2 외국어로 만주어와 중국어를 하게 되면서 일본이라는 좁은 땅보다 드넓은 동북아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22세 때 일본 전차부대소속으로 만주에 주둔하여 중국인 쿠리들의 비참한 삶을 보며 짧은 중국어로 교우하게 되엇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1945년 5월 남방으로 이송되려다, 6월 오키나와가 미군에게 점령되자 본토수호의 임무를 띄고 고국으로 후송되었는데 8월15일 종전을 맞이합니다.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온 시바는 생활을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지방신문 말단기자로 취직해서 미술담당문화부기자가 됩니다. 그러나 데스크에 앉은 시바가 생각한 것은 자신은 운 좋게 살아서 돌아왔지만 만주벌판에서 명분도 없는 전쟁때문에 먼저 간 젊은 전우들이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위로하고 사죄해야 할 것 같은 자괴감으로 자기 스스로에게 띄우는 수기형식으로 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쓴 첫 작품‘부엉이가 있는 도성(都城)’을 중외일보(1959)에 연재했지요. 이것으로 제42회 나오키(直木)상을 받았습니다. 그때 필자의 나이 35세였습니다.
유: 시바선생의 『한나라기행』을 보면 한국인 가이드에 대한 호의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작가의 품성은 어떤 분이었고 작가의 인격은 어떠셨습니까.
관장; 서민적이고 인간적이어서 외국인이라고 거리를 두지 않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 친절하고 인간미를 베풀었습니다.
유: 귀 기념관에는 문학인들이나 문학애호가를 위한 정기적인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관장; 지하 전시층에 작품과 관련된 기획전을 반년마다 개최합니다. 평소에는 기획전과 연계된 시바 료타로의 영상을 볼 수 있고 매달 강연회, 콘서트, 영화상영도 하고 있습니다.
유: 한국은 문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젊은이들은 인터넷에 빠져 더욱 무관심합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관장; 네 시바는 문학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각 분야에 걸쳐서 적극적인 호기심과 관심을 가져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기대와 희망을 품어왔습니다. 시바 료타로휄로우쉽은 이 시바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 젊은이의 지적탐구를 응원하는 것입니다. 만 16세부터 25세까지의 젊은이를 대상으로 장려금을 주어 일 년에 걸쳐서 리포트를 발표하게 합니다.
유: 앞에서 시바 료타로 기념재단에서 시바 료타로상과 유채꽃 문학 등 강연회를 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관장; 시바 료타로상은 매년 2월12일 시바의 기일(忌日)에 동경과 오사카에서 격년 간으로 시상하는데 문학, 학예, 저널리스트 등 넓은 분야에서 창조성이 뛰어나고 맹활약이 예감되는 대상을 선정해서 주고 있습니다. 2006년까지는 상금 3백만 엔과 시바가 좋아하던 회중시계를 주었는데 작년부터는 경제적 사정으로 상금 백만 엔과 시계를 줍니다. 지금까지 12회를 시상했는데 권위 있는 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시바가 좋아하던 유채꽃을 기리는 문학 등 심포지엄도 그의 기일인 2월12일에 하는데 진지한 심포지엄을 열고, 기념관 동네 사람들이 화분에 미리 유채꽃을 가꿔서 환하게 핀 것을 집 앞에 내어놓아 거리가 환해집니다.
-네, 오랜 시간동안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귀 기념관의 발전을 빌겠습니다.
*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약력
1923년 오사카태생으로 1996년 2월에 돌아갔다, 오사카외국어학교 몽골어부 졸업. 2차 세계대전 때는 학병으로 참가, 탱크부대 장교로 복무했다. 종전 후 산케이 신문기자가 됨. 1959년 장편소설『올빼미의 성』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2년 후에는 작가로 전념하게 된다.
『불타는 검』『료마가 간다』『유채꽃 바다』『언덕위의 구름』으로 일본 중요문학상인 기쿠치칸 상, 아사히 상, 신초 학예대상등 많은 상을 받았다. 소설 외에 수필, 기행문, 평론 등의 많은 작품이 있는데, 논객으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시바 료타로 전집 50권, 기행문 『가도를 가다』시리즈4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