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희 소설가 안성 삼희동산 방문사진
거실 임구에 놓인 김응삼 장로님 사진
벽난로 앞에서 (왼쪽부터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 김수자 수필가 , 정연희 소설가.김경실 수필가. 박미경 수필가 )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 정연희 소설가
권남희 수필가 .정연희 소설가
이층에 마련된 기도실
조각품이 있는 정원에서
정연희 소설가 작품집
사진촬영 권남희 수필가 ( 문파문학 2008년 가을호에정연희 소설가 인터뷰 내용이 실립니다 )내용은 문피문학 출간이후 올립니다
2008년 문파문학 가을호
절망의 중독자 묵상의 중독자 정연희 소설가를 만나다.
권남희 (수필가.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
이제 고인이 된 부군 김응삼의 삼과 정연희의 희를 넣은 ‘삼희’ 동산은 주소지는 안성이지만 백암에서 찾아가는 게 휠씬 빠르다. 박미경 수필가가 운전하는 승용차로 길을 떠나면서 10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노래가사를 생각했다. 정연희 소설가의 문단 50주년 기념으로 후배들이 지어 헌정하는 출판기념회가 2007년 10월 마지막 날 양재동 스포타임에서 있었다. 그 때 부군이신 장로님과 나란히 사진을 찍어 드렸는데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삼희동산 앞에 양산을 받고 서서 기다리시는 선생의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였다. 지연희 수필가. 문파문학 발행인, 김수자 수필가 , 김경실수필가, 박미경 수필가와 함께 방문한 자택은 3천여 평의 정원 안에 조각상, 작은 세미나 하우스 등이 잘 손질되어 구석 구석 두분의 부지런함과 손길을 느끼게 했다.
교수직을 버리고 뉴욕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 직접 집을 지으며 살았던 스콧 니어링과 헬렌니어링 부부가 연상된다. 풀과의 전쟁이라며 이른 아침이면 풀을 뽑고 오디를 따고 갖가지 약초로 발효차까지 만들어두는 선생의 부지런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평생 도우미한 번 부르지 않고 큰 살림살이를 혼자 하신다니 놀랄 뿐이다. 지난 해 야외 음악회도 열었던 곳, 늘 많은 손님들을 초대하지만 선생이 직접 요리하고 장로님은 설거지까지 도와주던 정경이 눈에 선하다.
선생의 환경사랑과 절약하는 생활습관은 유명하다. 모임 회식자리에서 선생은 음식 남기는 일을 죄라 여겨 늘 챙기곤 하였다. 음식 쓰레기는 두엄으로 만드니 손님이 다녀가도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봉투를 뒤집어서 재활용하고 수십년 째 요강을 써오고 있는 일 , 김칫독 부신 물을 나무 둘레에 주면 너무 잘 자란다고 말씀 하신다. 대부분 옷도 벼룩시장에서 구입하신 거라 하여 평소 화려한 이미지에서 받았던 약간 사치스러울거라는 선입견까지 깨버린다.
부군인 김응삼 장로님을 지난 1월 갑작스럽게 잃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어떻게 지내시느냐’ 일 것 같아 망설이는데 여쭙기도 전에 7개월 째 혼자 사는 심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셨다.
“ 소설가 협회 봄나들이 갔을 때 질투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언제나 마지막처럼 살자고 했어요”
그동안 남편이 나를 강보에 싸서 돌봐주며 수족처럼 살았기에 현금카드도 써 본 일이 없어요. 이제 혼자 살면서 두 가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하는데 너무 익숙해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모습이 보기 싫어서 이제 너 혼자 가라 한 그 의미를 깨달아가고 있어요. 그동안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살아왔을까. 새삼스러움이 시간이 갈수록 살아나고 있어요. 선생님이 어느 행사에서 장로님에 대한 표현을 ‘70%는 여왕대접을 , 30%는 쥐 잡듯이 하는 남자’로 하셨던 걸 기억하여 여왕대접이야 선생님에게 당연하겠지만 ‘쥐 잡듯이’가 궁금하여 말을 꺼냈다. 근본적으로 여자와 남자는 맞지않는 존재예요. ‘천년의 사랑’은 영화 제목일 뿐이지 않나요. 연애할 때는 인체에서 도파민이 나와 서로에게 빠져 지낼 수 있지만 길어야 1년이고 결혼을 하면 부딪히고 싸우는 게 당연하잖아요.? 전실 자식문제와 시어머니가 두 분인 것, 6대 독자에 자기만 아는 응석쟁이 장로님을 거슬리게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대 나라고 가만히 있겠어요. 대들고 싸우면서도 그분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으려 촉각을 곤두세웠어요. 내 성격이 의외로 변화를 무서워하는 면이 있었지요.
‘소설가 정연희’는 나이를 떠나 대중을 사로잡는 매력이 분명 있다. 무엇일까를 따져 올라가보니 대학생 신분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일과 신문기자가 되어 여권도 내기 힘들던 당시 세계일주를 4-5번이나 하면서 신문에 연재했던 성공한 삶이지 않을까 철없는 추측을 한다. 당시의 인기가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경향신문에 문명비평을 1년 반 동안 실었고 40개국 넘게 여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기충천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 때 내 삶은 결혼생활의 파경을 겪고 난 후였어요. 인기있는 남자하고 어울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가도 알고 쉽게 연애에 빠지지 못하는 성격에 늘 ‘왜 내게는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을까’ 생각하며 일만 했지요. 여행을 해도 신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비행기를 타고 흔들리는데 에어포켓에 빠져서 이대로 떠나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만 있었어요.
문학작품보다 선생님의 전설적 염문에 가까운 사생활을 묻게 되어 죄송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영화배우 신성일과 가끔 데이트도 하며 지적인 영감을 많이 주었다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를 기억하시냐고 했다. 신성일은 당대 청년문화의 상징이었고 섹시스타였는데 현재도 좋아하고 있다고 국회의원 깅신성일이 얼마 전 인터뷰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신성일 주연 ‘아낌없이 주련다’시사회에 초청된 사회 인사 100여명 중 선생님을 처음 보고 청년 신성일은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실망했었다고 밝혔다.
선생은 인터넷를 하지 않아 인터뷰 기사를 직접 못 보았지만 누군가에게 신성일씨의 인터뷰 내용을 들었다고 한다. 신성일씨가 용감하다는 생각을 한다며 그렇게 스쳐가는 것은 인생에 많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선생은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의 간증에서 사적인 면을 절절하게 내보인다. 참 인간적이고 여성으로서 당당한 자세에 존경심을 갖는다. 대중들로부터 소설가 정연희로도 사랑을 받지만 개인적으로 유추해볼 때 정연희라는 인간적인 면모에 더 점수를 준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태어나기 석 달 전 오빠가 죽고 둘째딸로서 여동생을 보게 하는 불운을 몰고 온 딸이라는 집안 이야기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는 것까지 당당하게 밝히기도 하는데 묵상의 힘에서 오는 것인지 물었다.
우리집이 한국에서 제일 부자만 산다는 집이 에워싼 가회동 삼거리 모퉁이 한옥 집이었어요. 지금도 그 집이 있는데, 3녀 2남으로 내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또 동생을 낳았어요. 진통을 겪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많은 아이들이 먹거리를 놓고 아귀다툼 쟁탈을 해야하는 삶이 참 싫다고 느꼈어요. 내 방도 없는 게 항상 불만이었고 왜 저렇게 살까 ? 늘 회의적으로 보았는데 어머니가 또 여섯째 딸을 낳았던 것이지요. 나는 어머니 머리맡에 앉아 ‘엄마,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이렇게 아이를 낳아요. 무얼 먹이고 어떻게 키울라고 ?’물었어요. 그 동생이 얼마 안가 죽고 석달 열흘을 울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밉겠어요.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화해가 안 되었지요. 불행을 몰고 오는 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협박’을 어린 시절부터 인식해야 했는데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어머니였지만 내가 이제 이곳에 납골묘를 만들어 모셔놓고 김을 매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은 멍에라는 강박증을 갖게 된 선생은 백파와의 힘든 결혼생활에서 더욱 자식을 갖지 않겠다는 각오를 굳히고 남편의 아이를 중절한 이야기도 크리스찬 간증에서 숨김없이 밝히기도 했다.
선생님에게는 예지의 눈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춘문예로 갓 등단한 오정희소설가를 TV인터뷰 할 당시 선생은 무서운 질문을 하나 하겠다고 하며 여자작가에게 가정과의 양립은 무거운 짐이지 않겠냐는 질문을 했다. 후배 소설가에게서 무엇을 읽었는지 무서울 정도로 예언적인 말씀이라 느꼈던 것은 그 후 오정희 작가의 활동에서 알 수 있었다.
문단야화를 쓴다면 경험과 자료가 많다고 생각했기에 쓰실 의향은 없으신 지 물었지만 선생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밝히신다.
국내외를 통틀어서 존경하는 작가는 도스또예프스키라고 하신다. 그의 생애가 그렇고 죽음을 거쳐간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치열성이 없으면 죽음이나 같은데 옵스크 감옥에서의 체험이 ‘죄와 벌’ 작품을 낳았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에서 예언자적 능력이 나타나 있는 측면에서 톨스토이보다 더 큰 거봉이라 강조한다.
영어권 번역서『정연희 단편집』이 있는데 선생이 아끼는 작품은 오페라 예정인 ‘내 잔이 넘치나이다’ 로 150쇄 를 찍었고 ‘난지도’는 80판이다. 선생에게서 종교는 자신이다. 언제나 묵상을 하며 자신을 추스르기 때문이다.
코엘료를 세계적인 작가라 꼽는 이유를 종교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데서 찾는다. 한 작가가 신앙을 통해서 성숙을 했느냐, 자기가 갖는 신앙 속에서 어떻게 성숙을 해나가느냐는 중요하다고 한다. 선생의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오랫동안 생각하고 우러나온 묵상의 결과물이다. 그러한 뿌리를 다락방처럼 꾸며놓은 지붕 밑 기도실에서 찾았다. 작은 책상과 벽에 걸린 십자가와 높은 곳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성서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낭만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문단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기를 바랐지만 선생은 그저 떠나는 후배들에게 발효차와 목거리를 하나씩 챙겨 주시며 돌아가는 길을 꼼꼼히 일러주실 뿐이다.
선생님 댁을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삼희 동산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숲속의 공주라고 농담을 했지만 선생님은 결국 남는 것은 그 분 앞에 홀로 서는 것이라 말씀하신 게 마음에 걸린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나 넣어줘, 잘 갔다고......’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숲속에 선생을 혼자 두고 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 왜일까.
약력 현재 (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역임.
1957년 이화여대 국문과 3학년 재학중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64-68년 이화여대 출강. 신문기자 활동 . 월간 주부편지발행인 역임 . 한국 기독 여성문인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직품집 『난지도』 『늪에서 나온 사람』『여섯째날 오후』『양화진』『내 잔이 넘치나이다』『바위눈물』외 다수. 대한민국 문학상 . 유주현 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한국소설가협회상. 김동리 문학상 . 펜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