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월간 한국수필 12월호 발간
발행인 정목일 이사장 .편집주간 권남희/ 서원순 사무국장/이철희 기획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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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구독 02-532-8702-3
2009.12월 통권 178호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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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촌평 - 상호 텍스트 읽기와 쓰기 (11월호 유제완의 설거지를 읽고)
노영자 -삶의 터전에도 설거지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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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난초
鄭 木 日 수필가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달빛 속에 난초 꽃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달은 귀한 벗이다. 소리 없이 먼 길을 와서 은근한 얼굴로 다가온다. 달이 찾아오기까지 쉴 새 없이 궤도를 돌아 왔건만, 마음속에 달빛을 맞을 맑은 공간이 없어 영접하지 못하는 건 아쉬운 노릇이다. 마음에 달빛이 내릴 수 있는 사색의 마당이 없어 달과 대화할 수가 없다.
달은 말하지 않고 영감으로 닿아온다. 커다란 눈동자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얘기한다. 은은한 눈 맞춤으로 공감 속에 손을 맞잡게 한다. 우리는 어느새 휘황한 전등불 속에서 밤하늘을 잊어버렸다. 어둠이 지닌 신비로운 세상을 망각해버렸다. 어둠 속에서 문득 한 별과 눈 맞춤하는 순간이 몇 만 광년을 거쳐서 이뤄진 만남이란 걸 알지 못한다. 그 별빛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몇 만 광년 전에 출발하여 우주 공간을 거쳐 이 순간 내 동공으로 들어온 것이다. 기적 같은 순간이지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난초 꽃을 보는 것도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귀한 순간이다.
‘바깥에 대나무가 있으면 방안에 난초가 없을 수 없다’는 소리는 남도 선비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겨울동안 방안에 산수화(山水畵)나 화조도(花鳥圖) 병풍을 펼쳐놓고 자연이 없는 무료를 달랜다고 해도 그림에 불과하다. 이보다 추위에도 본색을 잃지 않는 난초가 고마운 벗이 돼준다.
차 한 잔을 놓고서 난초를 바라본다.
꽃 필 무렵의 향기도 그윽하지만, 청초하고 단아한 몇 가닥 잎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공중으로 치켜 올라간 몇 가닥 난초 잎들, 허공 속으로 뻗어나간 유려한 곡선미(曲線美)는 기막혀서 말을 잃게 한다.
우리 산 능선의 아름다움을 몇 가닥 난초 잎의 선율 속에 응축시켜 놓은 게 아닐까.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게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한 선(線)을 보여주는 산 능선-. 첩첩한 산들이 기러기 날개 짓으로 날아오는 난초 잎들, 우리 산 능선의 부드러움과 은근한 곡선을 그대로 빼닮은 모습이다. 난초 한 잎씩이 산의 만년 침묵과 마음 선율을 간직한 채 영원으로 한없이 뻗어나간 자태를 본다.
난초 잎들은 간결하다. 난초 한 잎으로 거대하고 깊은 산의 영혼과 아름다움을 뭉뚱그려 허공 속에 척척 그려놓았는가. 볼수록 기가 막힌다. 산의 명상과 영원을 어떻게 한 줄의 살아있는 곡선으로 그어놓았는가.
눈이 삼삼하게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임의 눈매 같고, 휘늘어진 허리 곡선 같다. 옛 선비들이 난초를 사랑한 까닭은 일 년 내내 푸른빛을 잃지 않는 절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청초, 우아, 고결하기 때문이 아닌가.
난초 잎은 곡선의 미(美)만 있는 게 아니다. 첫 눈으로 보면 일직선으로 늘어진 모습이다. 가늘게 공중으로 뻗어나간 잎줄기가 준수하다고 할까, 미려한 직선의 약동을 보여준다. 한참동안 바라보는 가운데서 휘어지며 구부러지면서 뻗은 곡선미기 보여서 더 묘미를 느끼게 한다.
직선 속에 넘실대는 곡선, 곡선 속에 보이는 시원한 직선이 있다. 사철 변하지 않는 절조 가운데,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품고 있다. 간결미 속에 풍만함이 있고, 가냘픔 속에 칼보다 무서운 지조가 엿보인다.
난초를 보면서 강물 소릴 듣는다.
난초 잎은 천 년 만 년 흘러가는 강물의 허리 같다. 겨울 동안 난초만을 바라보아도 심심치 않은 것은 간소한 모습 속에 깃든 함축과 여운 때문이 아닐까. 산의 만년 명상으로 빚은 선율, 강이 만년을 흐르며 얻은 유선(流線)의 미를 간직하고 있다. 방안에서 난초를 보면서 산과 강의 오묘한 선율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단출하여서 더 그리움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비법을 난초 잎이 품고 있다. 난초 잎에 흐르는 빛깔이 산의 숨결이며, 강물의 물살이다. 그 빛깔을 영원의 빛깔이라 해도 좋으리라. 선비들은 한결 같은 난초의 빛깔과 태도에 감탄하며 삶과 일생을 배우고 따르고자 했다.
난초를 보면 대금소리가 들려온다.
난초의 선형(線型)은 대금산조의 선율이 아닐까 한다. 대금의 끝자락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달빛에 흔들리는 듯이 부는 대금산조 가락은 난초의 유현한 곡선이 아닐까. 어디에도 막힘없이 영원의 세계로 흘러가는 길목과 그리움을 전해주는 대금산조의 음률과 난초의 곡선은 닮은 데가 있다.
난초를 보면 혼자서라도 차를 마시고 싶어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지고 많은 대화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향기로지는 것은 욕심으로부터 벗어난 듯 초탈한 난초의 자태 때문이리라. 무욕의 경지에서 한 가닥씩 뽑아 올린 불과 대여섯 가닥으로도 한 세계를 이뤄놓는다. 일체의 수사와 설명과 묘사를 버리고 간명, 함축, 절제로 고요와 고결과 명상의 세계를 구축해 놓았다. 욕심을 다 채우려는 것들과는 그 격이 다르다.
난초 꽃이 피면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어릴 적에 우리 집 방 바깥에 ‘난향십리(蘭香十里)’라는 화제(畵題)의 난초도(蘭草圖)가 붙어 있었다. 과장법도 심하다고 여겼더니, 그 향기는 지금까지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난초 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몸을 숨긴 채 암향(暗香)을 풍긴다. 난초 꽃이 피면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은 것은 난향을 마시며 난초 갗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이다.
찬 한 잔을 앞에 두고, 난초를 바라본다.
만년 산과 만년 강물이 나를 쳐다본다. 난초의 자태 속엔 대금산조의 음률이 있고, 산 너머 영원으로 흘러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울리는 종소리가 있다. 장구를 매고 휘몰이 장단에 빠진 여인의 허리 곡선이 있고, 판소리 한 대목이 있다.
난초와 더불어 차 한 잔을 나누는 것은 영원과 마주 앉는 무욕의 시간이고, 정갈한 마음의 공간이자, 삶의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난초 꽃이 피면 혼자라도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한국수필 권두에세이
지금은 자성(自省)할 때
정 명 숙
눈이 오면 발자국이 하나 둘 남는다. 우리네 인생도 그와 같아서 흔적으로 남게 된다. 현대수필 100년, 195.60년대 수필가가 몇 안 되어서 희소가치가 있었다. 지금 문인협회에 등록된 수필가 수 천 명, 수필전문지 20여 곳 종합지등 매년 200여명이 등단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많은 수필가가 있는데 정작 좋은 수필이 없다. 큰 북 센터 수필코너에는 자비출판인 신간수필로 넘친다 정말 놀라운 발전이다. 그런데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 몇이나 될까, 수필이론가지고 수필 쓰는 시대가 아닌데 웬 수필이론가 수필평론가가 그리 많은지 알 수가 없다.
금년 초 수필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여기저기서 성토하는 걸 보았다. 남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성(自省)과 자정(自淨)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등단이란 과정을 거치면 어깨에 힘을 주게 되나 보다. 옛날처럼 희소가치도 없고 남녀노소 국민 모두가 수필가가 될 것 같다.
신문 방송에서 연일 신종플루로 야단이니 외출을 삼가다가 모처럼 어떤 수필모임에 초대되어 나갔다. 접수에서 반가운 이들과 인사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묘령의 여인이 다가와서,
-어디서 나왔습니까 - 하는 게 아닌가. 족보와 등단배경을 알려는 게 분명하다.
내가 잘 나가지 않아서 생긴 일이지만 씁쓸했다. 수필가가 대단한 것이 이제 아니다. 우리가 자기의 가치를 정해 주는 것은 남과의 비교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생로병사를 짊어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오직 하나뿐인 나라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남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면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함이 바른 길이다.
이 혼미의 시대 싸르트르의 실존주의나, 일본작가 타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존재의 의미에 자신이 없으면 원점으로 돌아가라 즉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대접 안 한다고 투정하기에 앞서 거울 속에 일그러진 자신을 보라, 자신을 먼저 알고 낮게 겸손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 얼마 전 1970년 초의 내 수필을 보며 너무 부끄러웠다. 잘한다는 바람에 마구 써 버린 글이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글은 기록으로 남는 것이기에 정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지나가 버린 일이라 덮어두기엔 너무나 선명히 현재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삭제 할 수도 없는 엄연한 내 역사인 것을 어찌하랴,
문학 지망생들이 등단이란 고지를 통과하고 나면 성취감에 도취되어 버린다. 우리가 산에 올라갔으면 슬슬 내려 올 때를 알아야 한다. 수필은 체험문학이다. 많은 독서로 넓은 세상을 추 경험하며 앙금처럼 가라 앉아 교양이 되고 품격이 생기게 된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삶의 고뇌와 통분을 삭이며 여과되어 탄생하는 것이 수필이다. 수필가가 많다고 걱정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솎아내지 않아도 자연도태 되고 말 것이다. 수 많은 가수가 다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 나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한 평생이라 한다. 수필가도 수필가로 등단 해 수필가가 되어지는 과정이 붓을 놓는 날 까지라 생각하기에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경력 숙명여대졸업 .이화여대 상명대 대학원 수료
1967년 여성동아 오는 정 가는 정으로 등단.
1972년 한국수필 신발동냥으로 등단.
1995년 선문대 정년.
한국 번역가협회, 국제 펜 한국본부, 한국수필가 협회 고문
수필집 7. 대학교재및 번역서 있음
수상경력 5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