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전복죄나 저질러볼까
국가 전복죄나 저질러 볼까
권남희
작가에게 있어 남보다 많은 체험은 작품 생활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주는 건 분명하다. 겪어 본 것들을 통해 갖게 된 다양한 시각과 깊은 사유의 흔적, 자신 넘치는 필력은 맛있는 요리처럼 감칠맛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에게 체험은 소금이라고 해야겠다. 글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로부터 가끔 짖궂은 질문을 받는다.
“ 작각가 글을 쓰려면 체험이 중요하다는데 사랑에 대해 쓴다면, 그 때마다 애인을 바꿔가면서 연애를 꼭 해야 하나요.”
“ 처녀가 연애소설 잘 쓰는 경우에서 보면 상상력도 꼭 있어야겠지요.”
이렇게 대답하지만 작가와 체험의 관계는 언제나 이미 짝이 있는 대상과 사랑을 주고받는 일만큼이나 위험지수가 높아 줄다리기를 잘해야 한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하건, 죽이건 어쨌든 지는 게임이라는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뒤 TV에서는 워싱턴 정가나 아프카니스탄 현지에 파견된 특파원의 활약을 시간마다 보여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자 묘한 부끄러움을 갖는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 빌딩 두 개와 팬타곤을 공격받아 자존심이 망가진 미국이 이슬람을 향해 승산도 없는 전쟁을 벌리며 공격해대는 아프카니스탄 현장은 작가의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어떤 작가는 장기간의 전쟁도 불사하지 않는 호전적인 미국의 태도를 비난한다. 그러나 반대 입장을 가진 작가는 국가가 처한 입장도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감상에서 비롯된 반전입장을 밝히는 태도를 두고 비난을 한다. 미국과 이슬람권의 테러전은 이 땅의 많은 작가들을 갈라놓는다. 정치적 테러와 작가적 저항의식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없지만 현실 참여의식이 강한 아랍 문학인을 친구로 두고 있다면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자기 입장에서 말하기를 즐겨할 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고 그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가르기의 그 무의미함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세상은 이렇게 혼란스럽게 돌아가건만 아직까지 나의 체험은 늘 미미하다. 그렇다고 지금가지 써온 수필들이 체험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체험의 한계나 강도나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소재들 뿐이어서 식상함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어떤 남성은 ‘ 여성 수필가들의 글은 너무 내숭 일색이어서 아예 읽지를 않는다’ 고 면전에서 혹평을 하기도 한다.
한국전생을 비껴간 전후세대로 태어나 큰 혼란을 겪지 않고 살아온 40대 여자의 일상이란, 오랫동안 두문불출한 채 집안 일에 파묻혀도 대인관계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만큼, 사소한 것에 이름 걸고 사는 자질구레한 체험의 연속이지를 않은가.
사회가 안정될수록 작가는 고통을 받는다. 허위의 글을 쓰지 않아야 하고 그렇고 그런 글이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문학성이란 눈치를 보며 글쓰고 책을 출판하지만 희대의 살인마 이야기나 포르노적인 성애소설이 더 잘 팔리는 현실에서 작가는 엽기적인 꿈을 꾸고 만다. 사람 몇백 명이 죽어가는 사고 현장에 가보고 싶어하고 전쟁에 참전하는 생각을 하며 몇 번의 이혼을 거듭하며 애인을 바꿔서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사랑 이야기를 써내는 망상을 펼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독일 소설가 에리히뢰스트는 행운아다. 16 세 나던 생일에 아버지에게 권총을 선물로 받아야 했던 그는 소년 시절에는 히틀러 소년단에 가입했고 청년기에는 예비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여했다. 1959년에 그는 구 동독의 노선을 비판했다가 국가 전복죄로 체포되어 악명높은 바우첸 정보부 정치범 감옥에서 7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그런 고통이 뿌리가 되어 그는 서독으로 망명한 후 비로소 ‘동독 노동자 봉기사건’에 대한 심도있는 방송극을 쓸 수 있었다.
‘체험적 사실주의’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하면 더 빠져드는 경향을 「타이티닉」이나 「쉰들러 리스트」에서 느끼지 않았던가.
소설 「손님」의 모티브를 얻을 수 있었던 황석영씨의 체험은 이 세상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자신의 삶을 전부 내던진 모험심 때문이었다.
1989년 북한으로 몰래 들어간 그는 김일성도 만나고 주민들의 환대도 받으며 지내다가 베를린으로 망명했다. 다시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93년에 귀국하여 자신의 선택한 모험의 대가로 5년동안 감옥생활을 한다.
그러고도 그런 경험을 ‘복받고 운좋은 반생이었다’고 고백하는 그를 보면서 엄두도 낼 수 없는 참여적 체험사 앞에 나는 심한 열등감을 가질 뿐이다.
영감을 얻기 위해 스스로 고난 속에 빠져드는 작가를 보면 시련은 평범한 인간에게 치열한 작가 정신을 길러주는 게 분명하다.
헤밍웨이도 전쟁체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무기여 잘 있거라」의 소설을 쓸 수 있었고 고래 잡는 소설 「백경」을 쓴 멜빌은 고래 잡는 어선의 선장이었다.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자전적 소설이다. 한수산은 「부초」를 쓰기 위해서 곡마단을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불가해하고 혼란스러운 성애소설 「북회귀선」을 쓴 헨리 밀러는 ‘작품이란 그것을 쓴 인간과 동일하다. 즉 북회귀선은 나라는 인간과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블랙동화 「양철북」을 쓴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도 대단한 체험작가다. 폴란드에서 출생한 그는 청소년기를 2차 세계대전 속에서 보냈는데 강제로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하였고 공군 보조병, 전차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다가 미군 포로가 되었고 석공 조수, 조형예술대학에서 조각과 판화를 공부하였다. 귄터 그라스는 핵무기 반대운동을 시민운동으로 이끌기도 하였고 자본주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독일통일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섬머 셋이 쓴 「인간의 굴레」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정조관념도 없는 여자에게 매달려 비술한 애정관계를 계속했던 경험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작가적 힘의 근원을 찾아보면 이렇게 모두 체험이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식와 현실참여 정신 등등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온다.
이들이 아니어도 나는 요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아시아 주변국들과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일본 때문에 더없이 초라해져 있다. 나의 작가적 힘은 꼭 밑둥 덜 든 고구마 같이 가볍기 짝이 없다.
1990여 년 백악관 앞 라페엣 공원에서 만난 ‘반핵 아줌마’를 생각했다.
81년부터 지금까지 백악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반핵 아줌마 ‘콘셉션 피시노트’와 나는 그때 사진도 찍으면서 한국을 아느냐고 물었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안다고 대답했는데 이제는 한국의 남북공동선언에 동조하며 ‘ 한국은 곧 통일이 됩니다’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고 한다. 그녀까지도 나를 주눅들게 한다.
겉멋과 열등감과 제 잘난 맛으로 뭉쳐진 나는 초라함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일탈의 한 방법으로 에리히뢰스트처럼 ‘국가 전복죄’나 저질러 볼까 한다.-제 3수필집 ‘시간의 방 혼자남다’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