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월간 한국수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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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집
鄭 木 日(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거미와 만난 것은 뜻밖의 충격이다.
새벽 3시, 혼자 깨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때다. 앞쪽 흰 벽에 검은 물체가 붙어있다. 거미가 분명하다. 하얀 타일 벽면에 검은 거미의 출현은 예상 밖의 일이다.
도시의 아파트 화장실에서, 새벽에 거미를 보게 되다니! 직육면체의 공간은 거미가 살만한 환경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 빈 구멍과 틈도 없는 공간에 어디서 거미가 나타난 것일까?
거미는 절지동물의 하나이다. 곤충과는 달리 다리가 여덟 개다. 곤충은 머리, 가슴, 배로 세 등분으로 이뤄져 있는 모양새이나, 거미는 머리와 배밖에 없다. 날개가 없어 날아다니지 못하지만, 거미줄을 만들어 공중을 드나든다.
거미는 집을 짓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꽁무니에서 가느다란 점액질의 실을 뽑아 상하좌우로 촘촘히 거미줄을 연결하여 둥근 그물망을 완성한다. 허공 속에 거미줄로 만든 투명의 집이라고 할까. 거미는 설계에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일사천리로 왔다갔다 공중 서커스를 하는 동안 집이 이뤄진다.
거미의 집은 거주 공간일 뿐 아니라 사냥터이기도 하다. 집을 가짐으로써 생존점을 갖게 된다. 거미줄의 영역은 생활 공간과 연관을 가진다.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펼치며 집을 짓는다.
거미의 집은 곤충들이 날아다니는 길목에 짓는다. 주변의 자연과 간격을 알고서 바람과 빛이 잘 통할 수 있는 곳에다 투명 그물을 설치한다. 곤충들에게는 함정이고 속임수이지만, 거미에게는 생존의 수단이고 지능이다.
거미집은 안테나 같다. 날아다니는 곤충들이 걸려들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거미는 줄에 닿는 미세한 반응과 느낌까지도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앞다리로 거미줄을 당기면서 어떤 물체가 걸려들었는지, 달려 나가 거미줄로 칭칭 묶어놓아야 할 것인지를 판단한다. 거미줄에 전해오는 촉각과 반응으로 모든 상황과 사태를 알아낸다.
거미는 먹이를 점액성의 줄로써 칭칭 감아 공중에 매달아 보관해 둔다. 한 번 걸려들면 빠져나갈 수 없다. 거미의 식사는 피를 흘리며 살을 뜯으며 먹는 육식 동물들과는 대조적이다. 곤충의 몸에 소화액을 주입한 뒤, 그 체액을 빨아 먹는다. 마치 주스를 빨아 마시듯이 가뿐히 배를 채운다.
숲속이 아닌 화장실에 거미가 있다니, 무슨 일인가? 차디 찬 느낌의 하얀 타일 벽에 꼼짝없이 붙어있는 그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 구멍에서 숨어 지내다 이 시각에 나온 것일까. 필시 눈에 띄지 않는 틈새가 있을 것 같다. 꼼꼼히 찾아본다. 천정 위 사각판자가 달려있는 곳에 드나들 수 있는 틈과 그 안에 생존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거미를 바라보며 ‘존재의 집’을 생각한다. 거미가 집을 짓지 못하면 어떻게 살까? 생존 수단과 방법을 달리 한 것일까. 마당과 정원이 있는 집을 갖고 싶었던 나도 어느새 아파트에 안주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거미도 숲속의 집을 버리고, 도시의 아파트 공간을 거주지로 삼은 게 아닐까. 먹이도 날개를 가진 곤충 대신에, 어둠 속에 드나드는 곤충으로 대체한 게 아닐까.
거미의 생존과 집이 궁금하다.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고 싶어진다. 하얀 타일 벽에 검은 다리와 몸체를 붙이고 죽은 듯이 있는 거미는 사람들이 잠든 시각에 몰래 산책하러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도 거미처럼 꿈꾸던 집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거미와 만난 이후, 나는 가끔 갖고 싶은 집을 생각한다. 존재의 집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