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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구독안내 (서원순 사무국장02-532-87-2-3) 발행인 정목일 이사장 / 편집주간 권남희
가을, 로렐라이 언덕
정목일수필가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
가을의 절정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독일 여행길에 우연히 찾아가게 된 곳이 로렐라이 언덕이었다. 로렐라이 언덕에 가본 사람들의 후일담은 조금씩 다르다. 체험과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실제 가보니 우리나라 절경지보다 더 나을 게 없다는 투의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 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 오르네/ 구름 걷힌 하늘 아래 고요한 라인강/ 저녁 놀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유명한 하이네의 시와 노래 가락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와 가보고 싶은 곳이다. 2009년 시월 말, 광부 출신 재독교포 박희병 씨와 간호사 출신 김선자 부부의 안내로 그들의 승용차를 타고 라인강변을 달려 노래로만 듣던 로렐라이 언덕에 갔다.
가을의 절정점이 그곳에 있었다. 라인강변의 좌우 언덕 같은 야트막한 산들과 강변 나무들이 숨 막히도록 극한의 채색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나무들이 보이는 절정의 표현법에서 생존의 존엄과 깊이를 보며 공감과 감동에 사로잡혔다. 나무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맞는 절정의 환희 속에 잠겨있었다. 수령(樹齡)에 따라 색채의 빛깔과 깊이가 달랐다. 커피 색깔처럼 온화한 중간 색감으로 가을 절정을 나타내주는 나무들도 있었고, 전체적으로 노랑과 갈색 톤의 색감으로 주변을 감싸안고 있었다.
나는 라인강변에서 나무들이 연주하는 가을 관현악을 듣는다. 가을의 찬사였고, 하늘에 올리는 감사의 헌가이다. 나뭇잎들은 일 년에 한 번 씩 별리의 문 앞에서 한 장씩의 낙엽 편지를 쓰고 있다. 편지 속에 따스한 햇살과 은은한 달빛의 말과 구름과 바람의 감촉이 깃들어 있다. 시월 말경의 라인강변 나무들은 가을의 황홀한 올르가즘에 빠져 깊은 신음소리를 토해 내고 있다.
버드나무, 수양버들, 갈참나무, 미루나무들.... 빛깔마다 오묘한 차이의 색감들이 어울려서 빚는 조화미는 신묘한 황홀감에 빠져들게 한다. 가령 홍단풍의 자극적인 붉음이라든지, 은행나무의 샛노랑 단 색깔이 아니라, 노랑과 갈색조의 엇비슷한 색깔들이 모여서 전체적으로 조화의 색감을 잘도 빚어내고 있다. 자극적이지 않게 은근하고 정답게 감싸 안아버리는 듯한 빛깔 속에 라인강변의 가을이 빛나고 있다.
로렐라이 언덕은 나무들이 빚어내는 풍경만이 아니다. 이곳에 와서 S자로 흐르는 강물을 구경하기에 절묘한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한 줄기의 강물로 흐르다가, 로렐라이 언덕 밑에 와선 여인의 날씬한 허리 곡선으로 굽어지면서 매혹적인 유선(流線)을 드러내면서 입체적이면서 육감성을 보여준다. 라인강의 아름다운 선율과 미학이 광채를 드러내고 있다.
절경을 이룬 곳에선 아름다운 찬미의 마음이 솟아나 어느새 전설로 전하는 법이다. 그 전설은 시인에 의해 시가 되고, 시는 노래로 불려지게 된다. 독일인들 중에 음악가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자연환경이 갖는 미적인 깊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풍빛깔을 뿜어내는 분수 같은 나무, 섬세한 빛깔을 찰랑이는 나무, 수많은 황금 영락을 바람에 팔랑거리며 종소리를 울리는 나무, 눈을 감고 명상 기도를 올리는 성자와 같은 나무들을 본다. 라인강변의 풍경은 강물과 나무들이 교감하는 앙상불임을 느낀다.
강변 주변의 숲속에 들어앉은 집들이 모두 뽀쪽 삼각 지붕을 이루며 검은 지붕에 흰 벽으로 지어진 동화속의 집들인 양 보인다. 모양은 비슷했으나 집집마다 건축양식이 개성적이고 조금씩 다르다..
강변의 나지막한 산이랄지 언덕이랄지 구분이 되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자리잡고, 이따금 고성(固城)도 눈에 띄인다. 마을을 통치하던 성주가 지키던 작은 성인가보다. 라인강엔 화물선의 내왕이 빈번하고 강변 양쪽 도로변에는 철로가 놓여 강을 따라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도 보인다.
산비탈의 경사가 심한 곳인 데도 석축을 쌓아 청포도밭을 조성하여,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특급품으로 알려져 있다. 45도 정도 경사지에 포도밭을 조성한 까닭에, 일조량이 많아서 포도맛을 좋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포도밭에도 노란 단풍이 들어서 가을의 색감에 일조하고 있다. 라인강의 가을 색감은 노랑 색깔의 잔치 같다. 노랑 색감의 다양함과 깊이를 알게 해준다. 도로변에는 플라타나스 가로수도 보이고, 면사포 같은 안개가 끼인 강변에 자전거도로 개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마침내 라인강변의 한 정점이자, 목적지였던 로렐라이언덕에 도착했다. 로렐라이 언덕 위로 차를 타고 올랐다. 언덕 위에 호텔이 있고 그 앞에 로렐라이 언덕 소녀상이 있다. 긴 머릿결을 바람에 휘날리며 소녀는 배를 타고 가는 선원들을 향해 이별의 아픔을 노래로 들려주고 있다. 배가 떠나가는 길목엔 만남과 이별의 슬픈 전설이 전해지기 마련이다. 아름다움과 사랑이란 오래 갈 수 없는 것이기에 전설로 남아 민중의 가슴을 채워주는 게 아닐까. 인생의 미흡함을 보완해주는 여운의 향기가 전설이 아닐지 모른다. 전설은 어쩌면 충만이 아닌, 결핍에 대한 아쉬움과 위로의 손길이 아닐까.
나는 로렐라이언덕을 가본 사람들로부터 “실제로 가보니 별 게 아니더라.”란 말을 들었다. 이곳에 와보니 그저 감탄만 솟구칠 뿐이다. 독일의 어머니 라인강을 바라보고, 로렐라이 언덕에서 맞는 가을 절정과 라인강의 영혼과 대면한다.
금수강산이라 일컫는 우리나라의 절경지들에도 좋은 문학작품들이 나오고, 다시 음악이 되어 널리 퍼져나가야 한다. 독일 여행 중에 로렐라이언덕을 가본 것은 독일의 자연과 아름다운 가을과의 만남이고 잊을 수 없는 가을의 그리움이었다. 로렐라이 언덕은 독일의 자연과 라인강이 피워낸 서정의 기념탑이었고, 영혼의 한 꽃송이였다.
제 189회
신인상 당선작
강미옥 「마당」외 1편
최필녀「남편의 딸」외 1편
원용숙 「상자속에 가득한 행복 」외 1편
심사평
강미옥의 「마당」「모과」를 신인상 당선작품으로 한다. 「마당」에서는 작가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엄마를 따라다니는 작은아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아이의 모든 기억은 장사를 떠나는 어머니를 따라가지 못했던 마당에서 출발한다. 어릴 적 기다림의 마당에서 성인이 된 후에는 행복을 느끼는 마당으로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 어울림의 마당으로 확장되는 작가의 기쁨을 그리고 있다. 「모과」는 일터에서 돌아오는 가을날 아파트 입구에서 문득 모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다. 모과나무는 진즉부터 있어왔지만 모과를 달고 있는 나무에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향기나는 인간미를 기대하면서 모과를 사는 작가의 마음이 따뜻하다. 작가의 관찰력은 예리하다. 또한 그것을 통해 삶의 고리를 연결시키는 통합적 사고력도 뛰어나다. 앞으로 정진하여 의도성을 갖고 있지않은, 감동적인 글쓰기에 연마한다면 작가의 역량은 훨씬 돋보이리라 믿는다..
최필녀의「남편의 딸」「업그레이드」를 신인상 당선작으로 한다.「남편의 딸」은 시집간 큰 딸과의 사랑을 남편 중심으로 엮어간 수필이다. 일남이녀 엄마가 200점이 되는 세상, 여자 없는 집안에서 자랐기에 첫딸 사랑이 유난했던 아빠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가슴으로 몰려온다. 아빠 딸이라고 서운해 하기보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딸을 슬쩍 응원하는 맛도 괜찮다.「업그레이드」는 식탁에 남긴 메모의 일화를 통해 요즘 삶의 업그레이드까지 들여다 본 수필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에서 오는 불안감은 이 시대 누구나 갖는 것이다.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시대가 바뀌어도 한결 같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아이들의 생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게 안타깝고 서글프기도 한 것이 또한 부모 마음이다. 그런 부모의 갈등을 살그머니 내보이면서 마음과 마음을 열어보려는 엄마의 노력도 삶의 업그레이드가 아니냐며 독자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수필이다. 평범한 제재를 맛깔나게 수필화 했다. 구성과 주제감이 약하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힘, 생각하는 폭이 앞으로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힘으로 보인다.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좋은 작품들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원용숙의 「상자속에 가득한 행복 」「우울한 아침에」를 신인상 당선작품으로 한다. 「상자속에 가득한 행복」는 소중하게 간직해온 두 개의 상자에서 행복을 찾는 내용이다. 상자 하나는 어머니가 남긴 상자로 그속에는 가족들이 함께 한 시간들과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다른 상자는 자신도 어머니처럼 타임캡슐을 만들어 아이들을 키우며 함께한 시간들의 흔적을 담아두어 가끔 행복을 음미하고 있다. 삶의 보물창고는 이렇듯 인간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사랑의 흔적들이다. 「우울한 아침에」는 외출한 이유로 우편물을 수령하지 못해 남편으로부터 추궁을 당하고 마음 상해하는 주부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 모든 일이 사회생활을 하는 남편중심으로 자신은 뒷전에 밀려있어 혼자 드라이브를 떠나며 정체성을 묻고 있다.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작가의 섬세한 감각과 자제력이 돋보인다. 늘 깨어있는 의식은 사색의 힘을 갖게 하여 남다른 글을 쓸 수 있게 한다. 날마다 한 줄이라도 써두는 프로의식으로 연마하여 대성하기를 기다린다.
신인상 심사위원회 정목일. 하길남 . 최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