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권남희 제 5수필집 <육감& 하이테크>출간사인행사

권남희 후정 2011. 10. 19. 16:10

 

       권남희 제 5수필집 출간 사인행사 가 2011년 10월 27일 목요일 오후 2시 교보문고 잠실점에서 있습니다.

      닥성여대 평생교육원 원장 /정목일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유혜자 전 이사장 ,지연희 한국문협 수필분과 회장.

     서원순 한국수필가협회 사무국장/ 미래수필문학회 전 회장 전수림 등 문인 100여분을 모시고  진행됩니다 

        

작품서평 <육감& 하이테크) 권남희 수필집

삶의 중심에서 피워낸 깨달음의 꽃

-권남희 수필세계

鄭 木 日수필가(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연금술사의 길

수필은 삶으로 그린 자화상이다. 필자의 인생론이 드러난다. 좋은 수필은 읽고 난 뒤 오래 동안 마음에 남아 감동의 여운을 준다. ‘감동의 여운’이라는 것은 어떤 장면으로 남을 수도 있고, 또 느낌이나, 향기. 빛깔, 가락으로 전해올 수도 있다.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독자들의 인생에 감동과 지혜와 깨달음을 주는 글일수록 좋은 수필이 아닐까 한다.

완벽에 가까운 글보다 진솔하고 격식 없는 수필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평온과 휴식을 안겨 주면서 인생론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너무 완전무결하면 꾸며낸 것 같고, 짜 맞춘 듯이 빈틈이 없으면 여유가 없어 보인다. 완벽보다 파격이 있으면 더 좋고, 빈틈도 보이고, 모자람도 있어야만 미소가 나온다. 굳이 성공담과 미학만을 들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실패담과 고행담에서 값진 교훈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수필은 인생을 담는 그릇이다. 인간이란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한 수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삶의 체험에서 얻어낸 금 사래기로 어떻게 감동의 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보석을 만드는 연금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2. 삶, 그 집중력의 근원인 아버지

권남희 수필가는 근면, 성실하다. 자신감, 생명력이 넘친다. 수필 강좌를 여러 개 맡고 있으며 월간 수필잡지의 주간을 겸하고 있다. 카메라를 메고 인터뷰와 취재에도 직접 나서는 등 분주한 활동을 전개하는 작가이다. 창작활동에도 항상 새로움과 모색의 길을 찾고 있다. 수필에 관한 한 맹렬한 자세로 삶의 집중력을 쏟는 작가이다. 권남희의 문학정신과 남다른 에너지는 ‘아버지의 삽’이란 작품을 읽음으로써 수긍을 하게 된다.

아버지는 삽 한 자루로 집안의 모든 일을 해냈다. 밭을 만들어 그 밭에 오이, 토마토, 호박 등의 농작물을 심으면 신의 손길이라도 닿는 듯 잘 자랐다. 삽 한 자루로 못하는 게 없는 아버지였다. 농토를 불리고 집을 짓고 특수작물을 재배하여 우리 4남매를 가르치니 대단한 능력자였다. 삽은 무엇일까. 나도 아버지처럼 삽이 갖고 싶었다. 아버지의 삽은 열 살 소녀의 키를 넘으니 제대로 삽을 다를 수 없지 않는가. 내 마음대로 땅도 파헤쳐 아버지처럼 밭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삽 한 자루 생기기를 속으로 바랬다.

(중략)

분가한 형님을 대신해서 서당만 마친 후 십대 때부터 큰 농사를 짓기 시작 했다는 아버지는 삽만 있으면 못할 게 없었다. 혼자 몸으로 북한을 탈출한 아버지에게 삽은 친구이고 고향땅이고 마음속에 만나는 가족이었을까. 모든 아픔을 묻고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면서 아버지는 죽을힘을 다해 삽질을 했다. 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지만 분명 ‘나는 혼자야, 외로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아버지 앞에서 삽을 들고 이리저리 땅을 파 헤치곤 했다. 삽으로 흙을 파헤쳐서 뒤집어 놓고 때로는 이랑을 만들기도 했다. 봄날 들든 땅은 삽질하기 얼마나 좋은가. 지난 시간들의 씨앗이 숨어있고 깊이 삽질하여 뒤집으면 다시 녹지 못한 겨울 한기가 엉켜 있다. 땅이나 사람이나 속을 뒤집어엎는 일은 후련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중략)

장지에서 나는 아버지 관 위에 흙을 뿌리려 삽을 들다가 정신을 잃었다. 아버지의 삽 한 자루만도 못한 사람으로 나는 어린 날 아버지의 능력 있어 보였던 삽을 탐냈던 소녀로 남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도 해결하지 못하는 얼뜨기 인생으로 삽질해야 하는 시간, 아버지를 땅에 묻고 절하면서 나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았던 같다.

<아버지의 삽>

<아버지의 삽>은 북한을 단신으로 탈출한 아버지가 남한에서 삽 한 자루로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꾸리고 4남매를 길러낸 삶의 궤적과 인생의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다. 한 가족사에 불과할 지라도, 남북 분단의 아픔과 농경시대의 삶의 모습을 통한 우리 민족사의 애환과 숨결을 담고 있다. 농경시대의 한 상징물인 ‘삽’은 도구나 연장이라는 것을 벗어나, 성실과 근면의 얼굴이고, 개척과 삶을 가꾸는 열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삽은 가족을 부양하고 일생을 경작한 다정한 벗이요, 삶의 길을 열어준 희망의 안내자이기도 했다.

삽으로 땅을 파고 일구면서 평생을 보낸 농부가 죽으면, 가족들의 삽질에 의한 한 삽씩의 흙으로 덮여 땅으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삽>은 농경시대 농부였던 아버지의 정직하고 근면한 삶의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오늘날의 삶을 재점검하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권남희는 ‘아버지의 삽’을 통해 농작물을 심고 경작하는 농부들의 손을 발견하고 그 위대성과 생명력에 대해 경건한 감사를 표하고 있다. 아버지가 심었던 작물들이 무엇이든 신의 손길이 닿는 듯 잘 자란 이유는 자나 깨나 땅과 기후와 작물의 상태를 관찰하고 애정을 기울여 재배해낸 노력의 결과였다. 농부는 땀과 정성으로 작물과 일체가 되어 살아왔다. 한 알의 씨앗, 한 포기의 배추라 할지라도 생명을 다룬다는 일은 신의 위임을 받은 거룩한 소명이다. 이런 까닭으로 농부의 손은 신의 손이 된다.

<아버지의 삽>을 통해서 권남희가 보여준 수필정신은 신성한 노동의 생명력과 끈기가 이루는 꿈이다. ‘수필’이란 삽으로 삶의 경작지를 꿈의 들판으로 채우고, 일생을 통한 깨달음의 꽃을 피워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3.삶의 본질성에 파고드는 치열함

우리 수필의 모습이 삶의 절박성, 치열성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관조, 회고, 달관, 사유, 취미 등을 담아내고 있고 있다. 삶의 치열성, 노동의 현장, 시대정신, 역사의식, 시회문제 등 실제로 삶과 직결 되는 문제와는 동 떨어진 주제와 소재를 담고 있는 듯 보인다. 삶의 주제어가 ‘지금, 여기, 오늘’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지향의 회고가 태반을 이루고 있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문학이다. ‘체험’이란 과거의 소산이기에 과거 문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시, 소설, 동화, 희곡 등에서 삶의 중심을 관통하는 현장과 문제들을 펼치는 것과는 달리, 현실 문제엔 관심조차 나타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실 문제를 분석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삶의 형태나 상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문제 해결의 의식과 시대정신의 결핍을 느낀다. 물론 자연 감상이나 신변잡사를 통한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담으려는 소박한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노동의 땀 냄새, 일터의 애환, 삶의 치열성이 담긴 수필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수필문학이 삶의 본질적인 일을 외면한 채 취미, 산책, 회고 등에 빠져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수필이 삶의 중심과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한가로운 취미나 여행, 혹은 회고조의 토로와 에피소드에 머물고 만다면, 아무리 수필인구가 증가하고 발표되는 수필양이 많다고 할지라도 주변문학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실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분석하고 해결해 보려는 뜨거운 작가정신과 작품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삶의 주변부를 맴돌아선 안 된다. 삶의 심장을 느끼고 우리가 서 있는 현장, 오늘에 처한 현실의 중심에 서서 인간의 삶을 표현해내야 한다. 수필가들의 독자적인 전문 세계와 개성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와 치열한 작가정신, 탐구가 요구된다. 시대와 현실의 한 복판에서 삶을 수용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권남희의 수필에서 주목되는 것은 삶의 핵심과 내부를 통찰하면서 삶의 본질성에 관심을 갖고 파고든다는 점이다. 여유(餘裕). 산책, 휴식, 취미 등 삶의 주변부를 맴도는 수필이 아니라, 시대적인 사회적인 고뇌와 해결에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의식하고 있다.

종전 대부분의 수필들이 ‘삶의 산책’ ‘여기의 문학’이란 느낌을 주고 있다. 현실이나 시대상항에 있어서 수필이 외곽으로 비켜나 있었다. 권남희의 수필은 한가와 여유 보다는 치열함을 드러내고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해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수필이 주변부 문학이 아니라, 삶의 핵심문학이 되기 위해선 수필의 사회참여가 필요함을 느끼고 있다.

갑자기 정적 같은 시간이 내 머리칼을 곤두세운다. 나는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홀낏 옆자리의 그를 염탐한다. 빗질 안 된 그의 머리는 올마다 엉켜 새가 알을 낳아도 될만큼 집을 지었다. 내 구두 옆으로 고개를 내민 그의 검은 구두는 모양이 일그러지고 곧 터질듯 낡아 푸른 물이 배어있다. 씻지 못한 몸을 가린 기다란 국방색 사파리는 얼룩이 쌓여 방수 옷으로 변했다. 그에게서 소화 안 된 소주 냄새가 퍼지며 달려든다. 손가락마다 기름때가 켜로 앉았다. 나는 그를 불행을 짊어진 사람으로 치부하며 벌써 무시하고 있다. 드러내놓고 내색하지 못하는 나의 불편한 마음을 그도 이미 알고 있다.

책을 읽던 나는 그를 의식하면서부터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책장이 안 넘어가니 호홉까지 딸린다. 얼른 피해서 다른 자리로 갈 수 없는 채 그대로 얼어있다. 비상벨위치를 확인한다. ‘돈을 달라’든가 시비를 거는 나쁜 일을 상상하며 불안하게 앉아 다음에 내릴까를 고민한다. 어느 날 서울역에서 보았던 노숙자들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구 역사 주변 여기 저기 바닥에 앉아있는 그들에게서는 묘한 분위가가 풍겼다. 엉키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 엉켜있는 그들, 고야의 그림 ‘정신병동의 내부’에 나오는 벌거벗은 남자들이 엉켜있는, 그런 장면을 보는 착각이 들었다. 햇살 아래 자신을 마음껏 드러낸 채 취한 그들은 부끄러움을 잊었다는 듯 웃으며 떠들며 있었다. 벗질 않았는데도 벌거벗은 느낌의 그들.... 비록 그들이 평온을 원하는 온순한 성품이라 해도 그날 광장에 주저앉아 있던 노숙자들은 나에게 삶의 의지를 팽개쳐버린 듯 충격적인 풍경일 뿐이었다. 비둘기들은 그들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날며 떨어진 먹이를 쪼아댔다.

<누가 그를 천하다 할까> 일부

지하철 안에서 옆 자리에 앉은 노숙자와 전철을 타고 갈 때의 심리묘사가 절박하게 잘 드러나 있다.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해 옆자리 승객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이럴 땐 누구나 태연자약한 군자가 되지 못한다. 승객들의 주시 속에 다른 자리로 냉큼 옮겨 앉을 수도 없다. 기분 나쁜 냄새를 참으며 표정관리를 할 뿐이다.

우리는 IMF사태를 겪으면서 실업사태를 경험했다. 작장을 잃은 사람들과 실업자들이 노숙자가 되어 전철역과 지하도에 잠자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당국은 노숙자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밥과 잠자리를 얻지 못한 노숙자들을 목격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수무책의 방관자로 회피와 무반응을 보일 뿐이다.

<누가 그를 천하다 할까>는 저자가 겪은 보편적인 사회 경험의 성찰을 통해서, 이 문제를 삶의 중심부로 옮겨 진지하게 해결의 모색 점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방관자의 시선을 거두고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으로 모두가 해결점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의식이다. 시대정신과 사회의식이 담긴 수필이다.

개인의 생활이 아무리 풍족할지라도, 사회공동체가 잘 살지 못한다면 편안하지 않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를 천하다 할까>는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貧富)의 격차, 돈에 따라 좌우되는 귀천(貴賤)의 사회적 인식과 평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국가는 국민이라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다. 권남희의 <누가 그를 천하다고 할까>는 오늘의 삶의 한 단면을 통해서, 기본적인 삶과 행복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수필이다. 수필이 삶의 산책, 사색, 여유, 아름다움을 보이며 개인적인 성찰과 인생의 발견에 머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권남희는 사회적인 현상과 시대상, 삶의 고뇌를 수필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은 진보적인 태도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4.

개인의 행복과 이웃의 행복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자신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일이라 해도, 주변과 이웃에게 혐오감이나 나쁜 인상을 줌으로서 갈등을 일으킨다면 충돌이 생긴다. 아파트에 개를 기르지 못하게 돼있는 규정을 무시하고 몰래 개를 기르는 행위 등을 흔히 볼 수 있다.

골목 사람들의 차 소리와 발자국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된 개들은 낯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잘 가려낸다. 개도 주인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주인여자의 마음을 읽었는지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잠들었을 새벽이 되면 낮보다 수백 배 예민해진 청각으로 작은 발자국 소리에도 으르렁 거리고 크게 짖어댔다. 세상소리들은 낮보다 밤에 더 확대되어 울려 퍼졌다. 세 마리 개가 짖어대는 소리는 골목을 들썩이고 밤하늘로 울려 퍼져 올랐다. 이 때쯤이면 골목에서 살고 있는 다른 집들의 개들이 모두 따라 짖어댔다. 이유도 없이 덩달아 짖는 동네 개들보다 처음 짖기 시작하여 원인제공을 하는 여자의 세 마리 개가 늘 문제였다. 쓸 데 없이 짖지 말라고 야단을 쳐도 그 때뿐이었다. 어느 새벽, 여자는 개들이 왜 그토록 사납게 짖을까 바깥을 지켜보았다. 개들은 우선 잠을 자지 않았다. 구석구석 순찰을 돌다가 누군가 대문을 기웃거리기만 하면 달려가 물어뜯을 듯 짖어댔다. 제 방귀에 놀라 듯 작은 소리에도 컹컹거렸고 그 소리를 이어받아 앞집 개가 신호처럼 짖고 다시 옆집으로, 건너편으로 결국 동시다발로 개들이 짖었다. 참다못한 골목의 몇 사람들이 여자가 기르는 개들을 신고하여 잡아가도록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개를 기르는 집이 한두 집이 아닌데 그럴 수는 없다고 했으나 여자가 키우는 개들이 공격적이고 사납게 짖어대는 게 그 이유라고 했다. 결국 실랑이 끝에 여자는 처음 기르기 시작했던 한 마리만 남기고 개장수를 불러야 했다. 아이들이 울고 개도 주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며 짖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을 무는 미친개도 아닌데 단지 이유 없이 따라 짖는다는 개들의 속성 때문에 사람들을 잠들지 못하게 한 죄였다.

<개 짖는 소리> 일부

<개 짖는 소리>는 삼인칭 소설기법으로 쓴 수필이다. 일인칭 수필의 보편성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관점에서 통찰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개들은 따라 짖는 속성 때문에 사람들을 잠들지 못하게 한 죄로 동네에서 추방을 당하고 만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직무에 충실한 것 밖에 없음에도 골목안 사람들의 삶에 지장을 초래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느 새벽, 여자는 개들이 왜 그토록 사납게 짖을까 바깥을 지켜보았다.’- 저자의 사회 관찰력의 예리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골목 안 밤의 세계는 청각과 후각을 동원한 개들이 파수꾼이 되어 순찰과 경계에 임하는 시, 공간이다. 한 집의 개가 짖으면, 온 골목의 개들이 연쇄적으로 따라 짖는 것은 연대적인 소통으로 공동 경계에 만전을 꾀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람들이 잠자는 밤의 세계는 개들이 깨어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수면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개의 속성인 ‘개 짖는 소리’를 추방한 것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고 있다. 개들의 직무수행과 속성이라 할지라도, 개를 사육하며 거느리는 인간사회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지배와 권력의 힘을 상기시킨다. ‘주인을 무는 미친개도 아닌데 단지 이유 없이 따라 짖는다는 개들의 속성 때문에 사람들은 잠들지 못하게 한 죄였다.’- 작품의 결미가 묘한 여운을 준다.

권남희는 수필이 삶의 주변부를 맴돌던 관심으로부터 시대와 삶의 중심부로 시선을 옮겨서

치열성과 삶의 현장을 예리한 통찰로 담아낸다. 언제나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현장 취재에 임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수필가로써 현실감을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5.

권남희의 <끈>은 삶에 있어서 종횡으로 연결된 혈연, 학연, 지연 등과 사회생활을 통해 얻어진 소통 망에 대한 의미와 성찰을 보여준다. 인생은 운명이란 줄에 연결돼 있는 듯이 보인다. <끈>은 유유상종(類類相從)과 동색(同色)끼리 어울리는 이치를 품고 있다.

인간의 삶은 끈, 띠, 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목숨을 명줄이라 했으니 오래 전부터 아기가 태어나면 탄생 사실을 알리는 금줄을 문밖에 걸었다. 새 생명은 어머니의 몸에서 줄 따라 세상 밖으로 나오지만 냉정하게도 그 줄은 끊기게 된다. 탯줄을 자를 때 비로소 진짜 생명을 부여받고 홀로서기의 아픔을 겪기 시작한다고 본다.

인간은 그 때 벌써 줄에 대한 집착을 보이며 생명줄을 찾아 허둥거린다. 줄에 대한 애착은 원초적이기에 곳곳에서 살기 위해 줄을 잡고 바꾸고 줄을 대려 애쓰는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물에 빠졌을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살림형편이 어려워져 규모를 줄이려 할 때는 허리띠를 졸라맨다. 출세를 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하는데 그 줄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면 ‘끈 덜어진 두레박’이나 ‘끈 떨어진 박첨지’라고 불렀다. 공부를 많이 했는지 아닌지는 ‘가방끈이 길다, 짧다’로 돌려 말한다. 옛날 지게에 짐을 얹고 잡아매는 지게꼬리도 끈이었다.

하다못해 죄인을 잡아갈 때도 오랏줄로 묶었으니 틈만 나며 사람들은 줄을 만들어 두었을 것 같다. 옷이나 일상소품에 관계된 끈 매듭이나 바구니 등 살림도구를 단단히 묶어주었던 테는 얼마나 많았던가. 생활 뿐 아니라 내 어릴 적 어지간한 놀이에도 줄이 빠지지 않는다.

줄넘기, 고무줄놀이, 줄다리기, 실 떼기, 그네타기, 기차놀이 등, 아이들이 많으니 줄을 만들어야 놀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늘에서 줄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에 감동하고 우물 속으로 줄을 내려주고 함정에 빠진 동물을 위해 밧줄을 던져주는 동화를 읽고 나면 누군가를 구하는 줄 하나를 갖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줄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암시를 받고 살아온 것이 우리 삶인가.

<끈> 일부.

인간과 끈에 얽힌 인간사에 대한 모습들을 살피고 있다. ‘끈’은 ‘독립’과 ‘협조’의 관계를 수용하고 있으며 협력과 소통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태어날 적부터 죽을 때까지 ‘끈’이란 혈연과 사회적인 소통체계 속에서 살아간다. 현대는 미디어의 발전으로 ‘끈’이 ‘스마트 폰’이나 ‘휴대폰’ 등의 소통도구에 의해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체재 속에 움직이고 있음을 본다. 인터넷 시대에 ‘끈’의 변화 현상에 대한 통찰이 날카롭다. ‘세계화 된 사이버 끈은 미세한 신경세포처럼 예민하고 전강석화처럼 빠르고 동시다발성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이버 끈은 마음먹으면 잘라내고 일방적으로 잘려나가기도 한다. 아무리 벗겨내도 그 뿐인 양파의 속성일 수 있다.’

작자는 현대의 ‘끈’이 신속성과 동시다발성으로 거대한 연결망을 지니고 있지만, 순수한 인간관계에서 맺은 인연의 끈처럼 생명을 걸 수 있는 신뢰의 ‘끈’이 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끈’이란 상호 관계성에 대한 통찰과 현대인의 삶의 변모를 살피고 있다.

6. 삶의 현장을 살피는 예리한 눈

권남희 제5수필집이 던지는 의미와 특성이 있다면 과연 무엇인가? 삶에 대한 사회적인 통찰력과 의미 캐기가 아닐까 한다. 수필을 여기나 취미, 산책이나 개인의 독백 등 삶의 여유로움을 보이던 태도를 지양하고, 본질적인 삶의 문제와 인생의 의미를 담아보고자 한 점이 돋보인다.

문체는 지적이고 이지적이며 수필정신이 치열하고 삶의 현장을 살피는 눈이 예리하다. 현대 감각과 시대성을 수필에 수용하고 있다는 점, 종전의 서정성 위주의 감성에서 벗어나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는 현대인의 의식과 삶의 모습을 담고자 하는 의식이 철저하다. 수필가들이 삶의 현장을 파고들지 못한 채 낭만과 서정에 치우쳐 있는 듯한 인상에서, 권남희 수필들은 참신성과 현대 수필이 가야할 방향까지를 제시해 준다. 삶의 중심과 현장을 중시하며 사회문제와 시대상을 담고자 하는 의식의 수필가로 개성과 독자성을 뚜렷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