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한국수필 편집주간 수필발표 <수필과 비평> 9월호
2013년 수필과 비평 9월호 수록작품
터
권남희수필가
강남거리는 ‘터’를 빼앗긴 페허의 얼굴이다. 사람을 위한 공간이 없다. ‘터’(고어 ‘Rum)는 원래 사람들이 살아갈 곳을 만들기 위해 비우는 곳이다. * ‘Rum' 은 모든 사물보다 인간의 거주를 위해 비워진 것이다. 돈 쓰러 오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주민들을 쫒아낸 거리는 어딘지 비정함을 품고 있다. 터가 사라져 존재할 곳이 없다는 막연함, 네모반듯한 수십층의 유리건물 앞에서면 어느 한 구석 마음이 들어설 틈을 찾을 수 없어 멍해진다.
별빛을 삼킨 불야성 거리.......... 이곳이 뉴욕인가, 이태원인가? 클럽과 카페, 탈출구를 찾는 젊음이 뜻을 합해 하룻밤 미치는 문화만 살아남는 장소일 뿐이다. 시대의 울기鬱氣를 발산하기 위해 날마다 축제가 벌어지는 이곳, 별 쏟아지는 논에서 개구리 울던 그 정다운 풍경을 엎어버린 이곳, 시적 언어는 사라지고 마르셸 뒤상의 ‘변기’같은 해프닝만 남아 이른 아침 출근길을 아프고 쓸쓸하게 한다.
빌딩 지어 올리는 일이 끊이지않는 도심거리에서 나는 오늘도 빌딩 하나를 해체한다. 불도저도 없고 포크레인도 없다. 오로지 공상을 연장삼아 상상력부재의 유리와 철골의 정사각형 빌딩, 간판만 즐비한 모더니즘 건물의 이기심을 뜯어낸다. 성형외과를 뜯고 치과와 피부과, 산부인과, 커피 체인점, 네일샵, 모텔, 에스테틱스, 유학원, 어학원, 스마트폰 대리점. 패스트패션 상점을 차례로 허물어버린다. 다 부수고 나니 남은 공간은 지하 알라딘 중고서점과 그 건너편 교보타워 지하 교보문고다.
드디어 강남 일대가 눈을 뒤집어 쓴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듯하고 모내기 끝난 논물이 별빛을 받아 찰랑거린다.
건물 외벽에서 번쩍이는 광고전광판을 보며 나는 별 쏟아졌던 외가의 마당을 떠올린다. 대나무 숲 뒤란과 평상이 있던 마당, 여름 방학이면 나를 반겨주던 외할머니, 소여물을 썰던 외삼촌, 외숙모와 그곳 친구들.....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터를 잃고 떠돌아야 한다는 불안 때문에 상실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낭만과 고전적 풍경을 버리지않은 채 상상력으로 잘 빚은 로마건축처럼 우리의 고향이 수백년 동안 변하지 않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백년 오백년 천년의 그 터를 지키려면 엄청난 장애물들과 싸워 이겨야 하는 도시, 아무리 높은 빌딩이 올라가도 인간을 위한 터가 아닌 이상 끊임없이 옮겨다녀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간은 존재감이 약하다.
오래 전 나는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랐던 곳이 터라는 믿음이 강했었다.
내가 태어났던 곳에서 부모님과 영원히 살 줄 알았던 때 나는 그곳이 절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부모님이 자리를 잡은 그 터에서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내 모든 존재의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날마다 눈을 뜨면 보게되는 마당의 꽃들과 열려있는 대문, 학교가는 길, 내 이름이 불리고 우정을 쌓고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던 장소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개발바람에 밀려 우리 집이 반으로 갈라지고 방문 앞으로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이 생기게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절대공간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터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 사라지는 불행을 막기 위해 어머니는 필사적이었다. 반토막난 마당을 꿋꿋하게 지키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산과 강물이 흐르는 자연으로 터를 삼고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은 후에도 귀환할 수 있는 터가 없어 풍경이 될 수 없는 도시인들이다,
폐허 위에 반전을 설계한다. 빌딩과 자동차길이 논과 밭, 살림집마당을 부수었으니 이제 거꾸로 강남 거리에 삶의 풍경을 앉히는 것이다. 논농사와 추수 풍경을, 김장하는 풍경이 거리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농업과 건축이 융합하는 어그리텍쳐(Agritecture)시대가 온다는데 이런 빌딩은 어떨까? 모기파리 개구리 뱀, 새떼 등 자연풍경 생명들이 어울려 사는 피라미드신전에 인간이 죽음으로 안착하는 터를.........
* Rum 터: 이종관의 《공간의 현상학,풍경 그리고 건축에서 》
권남희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당선. 현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덕성여대. MBC아카데미 롯데 수필강의 .
수필집 《육감&하이테크》 《그대삶의 붉은 포도밭》 《시간의 방 혼자남다》등 5권 제 22회 한국수필문학상 . 제 8회 한국문협 작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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