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행사

2013년 월간한국수필 올해의 작가상 예심평

권남희 후정 2013. 11. 19. 12:40

 

2013년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월간 한국수필 올해의 작가상 심사가 11월 18일 오후 4시 한국수필 사무실에서 지연희 수필가(본회 부이사장). 유인혜 이사 두분이 12편의 작품을 두고 심사숙고하였습니다.  올해의 작가상 심사원고는 2013년 일년동안 월간 한국수필 에 발표된 수필들이 대상입니다.  심사항목은 주제일관성. 독창성. 문장과 구성력 .감동. 형상화 5 항목입니다. 아래 심사평은 류인혜이사남의 예심평입니다. 차후 수상자 작품과 지연희 심사위원장의 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정리 권남희 월간 한국수필편집주간  .

 

올해의 작가상 예심평 - 류인혜

2013년 11월 18일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은 12편이다.

안영환 〈우체부와의 동행〉, 강미희 〈경로잔치〉, 김태실 〈꿈을 지피는 풍로〉, 김무룡 〈멍〉, 은종일 〈몽테뉴에게서 장자(莊子)를 보다〉, 문육자 〈북촌의 봄〉, 김용대 〈불효를 무릅쓰고〉, 김혜숙 〈산수유 꽃물이 번지다〉, 박성숙 〈힘을 내봐〉, 이해정 〈소금이 오는 소리〉, 이희순 〈도둑을 잡지 않았다〉, 육상구〈팡세 단상〉

 

많은 작품 중에 가려 뽑은 12편이 전부 수준 이상은 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한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없었다. 짙은 감동으로 눈물이 핑돌게 하거나, 기지의 번뜩임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거나, 굽이굽이 맑은 물이 흘러가듯 사유의 물줄기로 흐르는 문장력도 찾기 힘들었다. 공통적인 약점이 독자에게 다가가는 전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맥을 기대를 하면서 수십 번 되풀이 하여 읽는 중에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수필의 진솔함을 만난 것이다. 감사하게도 연륜에서 오는 인생을 바라보는 깊음이 담긴 내용에서 우리가 수필을 쓰고 있고, 수필을 써야 되는 당위성을 찾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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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실 〈꿈을 지피는 풍로〉

 

자연이 성장하여 성숙되듯 우리를 철들게 하는 바람은 어머니를 닮았다. 만삭의 몸에서 분신을 쏟아내는 순간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을 살필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뜨게 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사랑의 바람을 일으키는 풍로다.

 

어머니가 되면 안다. 풍로 같은 심장을 쉼 없이 움직여 자식의 꿈을 지피고 희망을 살려내야 한다는 것을. 상처 난 가슴에 사랑의 약을 발라 새살이 돋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구석구석 어둠을 몰아내고 평안과 행복을 햇살처럼 피워내야 하는 것은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한평생 일궈내는 사랑의 바람은 삶의 이치를 깨닫는 눈을 뜨게 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보석과 같이 빛나게 만든다.

 

 

* 작가의 상상력이 풍부하여 문장도 풍부하다. 글을 이끌어나가는 힘이 화려하여 자칫 거품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다행이 주제를 떠나지 않는 범위에서 머물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바람을 일으키는 풍로로 설정하여 형상화했는데 꼼꼼히 읽지 않으면 내용의 애매함에 잡힐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나와 딸 삼대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주를 풍로로 설정한 것은 신선한 바람처럼 느껴져 좋은 점수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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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도둑을 잡지 않았다〉

 

바보도둑이 순순히 정체를 드러냈다. 열일곱 살 도둑은 용서 받았고 훔친 단감도 받아갔다. 나는 기지를 발휘하여 도둑을 잡았고 단감도 안겨 보냈지만 옛 시절의 그 형은 투미하여 나를 찾아내지 못했던 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가 나를 가만히 용서하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영영 모르도록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소년시절 속에는 ‘말 못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지금에야 돌이켜보니 ‘벙어리 할머니’나 ‘농아 할머니’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겨운 말인 듯하다. 또래 아이들이 할머니네 논밭두렁이나 말림갓에서 꼴을 베거나 소를 먹이다가 들키는 날엔 자신의 느린 걸음을 원망해야 했다. 낫과 망태기를 빼앗기고 알 수 없는 괴성에 혼쭐이 났지만 오직 나만은 예외였다. 서슬이 퍼래서 쫓아왔다가도 나를 알아보는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는 어머니와도 같은 인자함이 넘쳤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면 나는 오 부잣집 머슴살이 ‘디’를 동무 삼았다. 나와 또래인 디는 상머슴답게 나무하는 솜씨가 뛰어났고 어디로 가야 무난히 한 짐을 해 올 수 있는지 산판을 꿰고 있었다. 나는 푸나무가 무성한 자리를 늘 디에게 양보하였다.

근동의 집집이 땔나무를 하려고 피가 나도록 산판을 헤집어대는 판국이라 해가 기울도록 한 짐을 채우지 못하는 때가 잦아졌다. 그런 날이면 나는 디의 지게를 채워주느라고 쪼그랑이 나뭇짐을 부모님에게 번번이 야단맞았다. 나는 한 번 꾸중 들으면 그만이었지만 디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 감서리 이야기, 말 못하는 할머니의 충심, 머슴 ‘디’ 와의 사연 등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나누어 주는 배려의 모습을 그렸다. 세 이야기는 같은 듯 하지만 다른 색깔을 지녔다.

문장은 비교적 정돈이 되었고 글을 풀어가는 구성이 일반적이다. 사연의 전달은 겉으로 흘러내리기만 했지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주제를 이끌어 가는 구체적인 내면의 상황과 형상화가 부족하여 감동의 면에서는 떨어진다.

감도둑보다도 할머니 이야기에 중심을 두었더라면 훨씬 감동적이 수필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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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종일 〈몽테뉴에게서 장자(莊子)를 보다

 

장자가 말한 오상아(吾喪我)는 ‘나를 잃어버림’이다. 내가 나를 잃어버려야 진정한 내가 된다는 믿음이다. 장자의 ‘나를 잃어버림’, 석가모니의 ‘자기 비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버림’이 하나같이 잃어버리고, 비우고, 버림으로써 찾고, 채우고, 구하는 도교 불교 기독교의 실천 덕목이 아닌가.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장주의 의문은 사물이 나이자 내가 곧 사물 이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요, 나와 사물 간에는 구별이 없다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표현이다.

 

몽테뉴는 “인생은 그 자체의 목표이자 목적이다.”라고 했다. 어떤 목적에도 삶은 희생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몽테뉴에게서 장자를 본다. 16세기 근세에서 기원 전 4세기까지 2천년을 거스른, 16세기 근세의 서양이 기원 전 4세기 동양에 맞닿은 몽테뉴와 장자의 시공을 초월한 세계관, 우주관의 합일을 본다.

 

 

* 책을 통하여 얻게 된 사유의 글이다. 몽테뉴의 고양이와 장자의 나비, 어느 쪽이 더 사려 깊은 인간이 추구하는 비움이나 나눔의 심성에 자극을 줄 것인가. 한 사람은 서구의 개념을 이야기 하고 다른 사람은 동양적인 사고를 묻고 있다.

글을 이끌어 가는 숙련된 문장이 딱딱한 내용을 읽기 편하게 만든다. 독창성과 주제의 일관성을 높이 산다.

그러나 생각의 계기가 된 책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몽테뉴에서 장자를 보는 시선보다는 솔 프램톤의 고양이에서 더욱 구체적인 몽테뉴를 보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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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대 〈불효를 무릅쓰고〉

 

아버지는 힘이 빠진 자세로 돌이 든 소쿠리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혼자서 중얼거리셨다. 충격이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적어도 우리 아버지한테서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남을 빗대어 자식 앞에서 변명을 해서는 더 안 되는 일이었다.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해야 하나 그렇게 하면 자신을 포함해서 단 한 사람도 헤어날 사람이 없다 하였으나 나의 아버지는 의외인줄만 알았다. 우리에게 정당한 도리를 그리도 강조하던 분이셨기에. 그러나 짧은 순간, 아버지도 이웃집 아저씨와 똑같은 평범한 시골 사람으로 나의 가슴에 짜릿하게 파고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오래도록 가슴앓이 하던 아버지의 그 행위에 대해 불효를 작심하고 감 장수를 빙자하여 폭로하고 있다. 헌데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거리를 두었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왜 이제야 조금 다가오고 있는가.

 

 

* 감장사에게 당한 부당한 상술을 계기로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흥미있게 풀어나갔다. 작자의 아버지에게 닥친 불운은 시대적 상황에서지만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술로 피폐해지는 안타까움이었다.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는 자질을 갖추었지만 똑바로 서지 못했다. 결국 도덕적 혼란으로 인하여 절단고구마 가마니의 무게를 더하기 위해서 돌을 넣는 충격적인 일을 저지르게 된다. 내용과는 달리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는 문장은 담담하여 형상화에서는 좀 빠지는 글이지만 감동이 천천히 온다.

제목이 지나치게 평범하여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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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정 〈소금이 오는 소리〉

 

하늘과 바다의 합심에 인간의 노력이 더하여 져야 얻어지는 소금. 소금꽃이 필 때 나는 타는 듯 한 그러나 은근한 자작거림을 들으며 염부는 더 없는 희열을 느끼고, ‘소금이 온다.’고 소리친다고 한다.

소금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고 ‘소금이 온다.’고 하는 그들의 말에는 신의 섭리와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얻어지는 소금에 대한 인간의 겸허함이 담겨 있다.

 

모종 한포기가 오뉴월 염천과 비바람을 이겨내고 초록의 바다를 이루도록 무성하게 자라고야 엄마 등에 업힌 아이 같은 모양의 옥수수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도 포기마다 비료를 주고 혹 두 개의 아기를 업고 있는 것을 보면, 작은 아이는 사정없이 떼놓아 튼실한 결실을 맺도록 도아 주는 일까지 하고나서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기다리며 밭둑에 설 수 있을 것이다.

 

 

* 농사를 지으며 흘리는 땀이 말라서 소금이 된다는 시작이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다. 그 부분은 없어도 상관이 없는 사족이다.

소금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옥수수 농사의 결실이 맺어지는 과정을 연결지었다. 진지한 탐구가 독창성으로 다가간다.

군데군데 적당하지 않는 단어나 표현이 걸린다. 감동과 형상화에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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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숙 〈힘을 내봐〉

 

“왜 거짓말을 했는지 말하지 못해?” 드디어 큰소리가 나간다. 한 대 때릴 기세다. 그때였다. 손녀가 팔랑개비를 들고 오빠 옆으로 뛰어왔다. 곁으로 바짝 다가앉더니 팔랑개비를 힘차게 돌리며, “오빠 이 팔랑개비처럼 힘을 내봐. 빨리 용기를 내봐,” 여섯 살짜리 동생은 엄마와 오빠를 번갈아 보면서 재촉한다. “엄마 화가 많이 낫잖아.” 수그린 오라비 머리를 흔들어댄다. 그래도 반응이 없는 오라비, 동생은 연신 팔랑개비와 머리에 손이 오가면서 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안달이 났다. 야단맞는 오라비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손녀가 대견하기에 앞서 웃음부터 나왔다.

 

아이들 때문에 사는 맛을 느낀다. 잘못을 인정하기에 말 한마디 못했던 손자, 어린것이 지혜를 짜내 오라비를 도우려는 손녀도 더할 나위 없이 대견하다. 그뿐인가. 두 아이의 재롱잔치와 구연동화 영상을 보게 해준 며느리 역시 고맙다.

 

오늘은 우리 집 무대에서 영상이 아닌 실물로 관람 했다. 손녀가 주연으로 등장했으니 그 감동이 배로 온다.

 

 

* 할머니의 즐거운 한때가 눈앞에 그려진다. 형상화의 성공까지는 아니지만 감동을 줄 수 있는 단계로 진행하고 있다.

지나친 설명으로 주제가 산만하기는 해도 두 아이의 정겨움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며느리인 어머니의 역할이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아이들이 힘을 내도록 용기를 주는 뒷심이 필요하다. 무엇을 중심으로 쓸 것인가를 유념해야 된다. 문장력은 일반이고 독창성도 전달의 문제가 있어 조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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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환 〈우체부와의 동행〉

 

산간수가 흘러 만든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넜을 때 바윗돌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곁에는 자전거인지 모터 싸이클인지, 그런 것 한 대가 받쳐 있었고, 안장 뒷좌석엔 우편배낭이 묶여 있었다.

 

화려하지 못한 드문드문 외롭게 핀 들꽃들에 관한 얘기를 한참 풀어낸 다음 마음이 가라앉아서이지 며칠 전 하나 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이 자살한 사실을 털어 놓으면서 “돈 못 버는 못난 애비가 자식을 죽였지요. 대학 등록금은 왜 그리 비싼지…”라고 남의 얘기하듯 중얼거린다.

 

“저기 보세요! 애기똥풀이 널려 있네요.”하고 그가 말한다. 우리는 애기똥풀이 흩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 잠간 아기가 되어 앉았다. 근심, 고통 없는 얼굴로 백치 같은 웃음을 교환했다.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근심과 고통에 다시 잠기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었으므로 기실은 그 웃음은 슬픈 것이었다.

 

 

* 사람이 함께 걷는 길에 서로 힘이 되면 가는 길이 힘들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우체부의 사연을 듣고 위로해 주는 것은 사람의 관심도 가능하지만 길옆의 자연도 힘을 보탠다. 독자들은 무심히 대하는 풍경이 알게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는 의미를 찾게 되는 수필이다.

단번에 해결되기 어려운 고통을 위로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인생길을 걸어와 그 어려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속마음을 숨기고 웃게 된다. 인생은 사계절이 순환이 되는 자연처럼 희노애락을 겪으며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주제의 일관성과 문장력, 보통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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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희 〈경로잔치〉

 

소나무, 계수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전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숲길은 공기가 맑고 신선했다. 나무의 유래며 생태에 관해 설명을 듣는 것이 흥미롭고 숲은 심미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는 연합여전도 임원으로 어른들을 모시고 여러 해 봉사를 했는데, 이제 내가 경로의 일원으로 잔치에 초청을 받다니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나보다 나이가든 권사님들도 많이 오셨다. 등이 굽고 무릎이 약해 잘 걷지 못하지만 열심히 따라다닌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애착을 느낀다며 앞으로 몇 번이나 봄을 맞을지 몰라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소중하게 보인다며 여행이 매우 즐겁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지난세월보다 남은 세월이 짧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남은 세월을 건강하게 잘 갈무리해야 한다고 마음에 다짐하며 숲길을 걸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하는 경로잔치였다.

 

* 제목 그대로 경로잔치의 과정을 보는 대로 묘사한 글이다. 노인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던 작자가 그 혜택을 받게 되는 감회가 독자에게 모두 그렇게 나이들어 간다는 의미를 준다.

작자는 그 장소가 수목원이라는 데에 의미를 두었다. 비바람을 이기고 잘 자라나서 의연히 서있는 나무들은 인생길의 어려움을 이기고 잘 살아온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준다.

주제의 일관성과 문장력은 일반이고 형상화에서는 떨어지지만 담담한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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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룡 〈멍〉

 

‘자식보다 딱 하루만 더 살다 죽고 싶다.’던 자폐증을 앓고 있는 자식을 둔 어느 어머니의 절절한 심정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이 아려온다.

 

나의 가시밭 인생길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다. 네댓 살쯤에 나타난 척추의 이상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갖은 병치레로 삶을 힘들어하자 어머니는 어느 점술가를 찾아갔다. 그는 옛날부터 우리나라를 한없이 괴롭혀온 일본에 유학까지 가서 대학 공부를 한 아버지 탓이라며 그때 쓰던 물품들은 모조리 내다 버려야만 한다고 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그 시절 사용했던 손때 묻은 책과 노트, 유도복과 럭비화 등 갖가지의 애장품들을 이 못난 자식의 앞날을 위해 모두 불살라버렸다.

 

아버지는 주무시듯 평안히 누워 계셨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혹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윗옷을 살짝 들어 가슴에 손을 갖다 대 보았다. 체온의 차는 느껴지지 않았다. 옷을 다시 잘 여미며 보니 가슴 한편에 멍이 든 것이 보였다.

 

이십 대의 아직 젊었던 시절의 어느 날 저녁,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큰방에 계시는 부모님께서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주정을 했다.

“이럴 거면 왜 날 낳았어요. 차라리 낳지를 말지.”

 

영화 속의 ‘조지’에 생각이 머문다. 작가는 신이 창조한 완벽한 이 세상에 왜 굳이 없는 여덟째 날까지 할애하며 조지를 만들었다고 했을까. 가족의 아픔이며 짐인 그를 말이다.

 

 

* 영화 이야기, 아내의 팔에 생긴 멍, 아버지 가슴의 멍 그리고 내 가슴에 깊이 새겨진 멍, 이 모든 멍의 시작은 어디에서 일까, 신은 왜 여덟째 날을 만들어 하필 장애인은 왜 만드셨을까. 정상적인 모양으로 태어난 인간의 가슴에 멍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의 멍은 스스로에게 주는 멍인가 보다.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나간 이 수필의 독창성을 높이 산다. 문장과 주제의 일관성은 보통이다. 그리고 형상화에는 점수를 주고 싶다. 글을 이끌어 가는 힘은 있지만 표현과 단어의 선택에서 신선함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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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육자 〈북촌의 봄〉

 

삼청동의 비탈진 길을 내려와 단팥죽 집으로는 꽤 알려진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에 들렀다. 맛도 맛이지만 이 집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 가끔 찾는 집이다. 그렇다. 둘째다. 첫째를 내어 준 넉넉함이 거기에 있다. 여기에 터를 잡은 지도 벌써 서른다섯 해가 되었다. 둘째라는 이름을 가진 이 집이 북촌에 자리한 것도 의미 있는 일로만 느껴졌다.

봄도 그러하다. 우리가 계절의 앞자리에 두었을 뿐 봄은 결코 첫째이기를 바라지도 않고, 첫째라고 힘을 주거나 군림하지도 않는다. 만물이 힘을 얻고 얼었던 냇물이 풀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올 때 봄은 제 할 일을 다 한 목자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다. 안개 속에서, 아지랑이 품에서.

뽀얀 안개 같은 봄빛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기만 하는 물 오른 여린 가지들을 보라. 봄의 여유로움이며 넉넉함이다. 아니, 부드러운 숨결이다. 봄은 즐기는 사람들을 다소곳이 관망할 뿐이다.

북촌 또한 그러하다. 졸음에 겨운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오는 봄, 물 오른 봄의 버들가지처럼 휘어지는 유연함이 북촌에서 느끼는 멋이다. 북촌의 봄은 우리네 마음결이다.

 

* 같은 곳을 보면서 무엇에 초점을 두는가가 글의 독창성을 만들어 준다. 모든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보다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어디일까.

지붕의 선, 안빈낙도를 이룬 맹사성과 시, 생활사 박물관에서의 옛 물건, 전통을 파는 가게 등은 북촌의 일반적인 광경이다. 여기에서 둘째라는 상호를 지닌 단팥죽에서 여유를 본다. 그 여유에 담기는 여운은 봄이다. 북촌의 모든 것들이 부드럽게 흐르는 봄에다 연결 지었다. 약간의 무리는 있지만 작가의 심성이 보이는 글이다. 주제의 일관성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고 독창성도 부족하다. 형상화와 문장력은 일반이라서 감동에는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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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 〈산수유 꽃물이 번지다〉

 

어둠 뚫고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새순과 얼음장 밑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봄비에 부풀어 오르는 흙, 살랑거리는 봄바람. 이 모든 봄의 전령사들이 움츠러든 나를 깨웠고 새 출발을 다짐하며 희망을 속살거렸다.

삼월 초, 새교실에서 산뜻하고 힘찬 모습으로 어린이들을 맞이할 사전 준비였다. 활력이 넘치는 반 아이들과 호흡을 맞추려면 에너지를 비축해 둬야 했기에. 한 학기를 원더우먼처럼 잘 버텨나간 비결은 봄나들이의 공로가 아니었을까.

 

순천 금둔사 설선당 앞에는 두 그루의 매화나무가 서 있었다. TV 방송국 사진 기자가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려는 홍매화 몇 송이를 근접촬영하고 있었다. 다도해와 남쪽땅을 정처 없이 찾아다니며 이른 봄꽃의 개화소식을 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전문가다운 투지를 엿볼 수 있었다.

 

겨울에 갇혀 있는 시청자들을 위해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고 인내심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전하고 싶었을 게다. 한두 주일 먼저 이른 봄꽃을 보게 하려고 제 맡은 소임을 다했던 그들도 나처럼 기대와 설렘으로 이른 봄을 맞이했으리라.

 

파종을 서두르는 농부의 마음으로 새학년 새학생을 맞이했던 그날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봄은 첫만남, 첫사랑, 첫마음, 첫수업 등의 첫경험을 연상하게 한다. 상큼하고, 맑고 순수하다. 이제 묵직하고 암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하다.

 

 

* 추운 겨울을 지나고 맞는 이른 봄 남녘 나들이는 새 학년과 새 아이들을 맞이하는 힘을 준다. 활력이 넘치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한 준비라는 봄나들이의 여러 광경을 보여 준다.

어머니의 고로쇠 나무, 산수유 꽃, 광양 매화나무 순천 매화 나무 등을 소개하는 일반적인 내용에서 독창성은 부족하다. 많은 예화는 주제전달의 중심을 흐리게 한다. 봄 풍경의 일반적인 시선보다 봄을 맞이하는 내면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그려냈다면 더욱 알친 수필이 되었을 것이다.

형상화와 문장력과 감동은 보통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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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구 〈팡세 단상〉

 

나는 여태까지 파스칼의 삶에 대해서 깊이 공부한 적이 없을뿐더러「팡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도 못했다. 세계적인 위인들에 대해서 단 몇 사람들만 안다고 할 수 있거나, 고전으로 알려진 책조차도 읽은 숫자는 불과 몇 권에 지나지 않는다.

 

희대의 천재인 파스칼은「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지상의 어떤 존재보다 위대하다. 인간은 어떤 모순 속에서도 자신을 알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할 때 진정한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으로 여기고, 고귀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도 그걸 것이다. 비록, 영세한 자영업자로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고 있지만 가을 하늘처럼 고결하고,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드넓은 사색을 누리며 살아야 되지 않을까싶다.

 

* 파스칼의 팡세에 대한 서두를 시작으로 그 책에 관심을 갖는 약사할머니, 작자의 수필을 보여줌으로 서로 알고 있는 홍교장을 기억해내고 그를 매개체로 오랜 친분인 듯한 감정으로 발전한다.

팡세를 읽고 싶어 하는 할머니는 잘 키워 좋은 직업을 갖고 있는 자식들에 대한 자부감보다 인간의 존재는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팡세의 내용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존귀하게 살아가야 된다는 내용이다.

주제를 풀어가는 구성력과 문장의 흐름에 무리가 없다. 모든 면에서 진지한 자세로 수필의 격을 높여 잔잔한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