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교실 추천도서 < 다산의 마음 .정약용산문선집 > 돌베개
권남희 수필교실 2014년 봄학기 수필교실 추천도서 (주문 031-955-5020)
정약용 산문 선집 다산의 마음 박혜숙 편역
정약용丁若鏞( 1762- 1836)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사상가로서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다방면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남겼다. 18년의 유배생활 동안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한 5백여권의 책을 폈으며, 평생에 걸쳐 탁월한 시와 산문 작품을 남겼다.
편역 박혜숙(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인하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저서로 《형성기의 한국 악부시연구》편역서로 《사마천의 역사인식》《부령을 그리며-사유악부선집》등이 있다
기획 박희병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로 《한국의 생태사상》 《운화와 근대》 《연암을 읽는다》등이 있으며 《나의 아버지 박지원》등의 역서와 《아사미케이서이와 홍대용》을 비롯한 논문 다수가 있다.
나를 찾아서 ( ‘나’를 지키는 집/ 좌천의 즐거움과 괴로움/ 퇴계선생을 우러르며/ 관아를 새로짓고/ ‘여유당’이라 이름붙인 뜻/ 네 가지의 마땅함/ 떠 있는 삶/ 유배생활/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가진 것은 덧없다/ 어떻게 살것인가/ 바로 ‘이 ’ )
파리를 조문한다( 목민관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 /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토지의 공동소유를 제안함/ 선비도 생산적인 노동을 해야 한다 / 신하가 임금을 몰아낼 수 있는가/ 고구려는 왜 멸망했을까?/ 음악은 왜 필요한가/ 참된 시란?/ 정치 잘하는 법/ 술잘에서 사람보는 법/ 파리는 조문한다/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다)
가을의 음악( 겨울 산사에서/ 가을 맑은 물/ 나의 아름다운 뜰/ 벽위의 국화 그림자/ 부쳐사는 삶/ 임금님의 깊은 마음 / 내가 바라는 삶/ 취한 사람, 꿈꾸는 사람 / 집/ 가을의 음악/ 근심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바쁘지만 바쁘지 않은 )
우리 농農이가 죽다니( 내 어린 딸/ 우리 농이/ 자식잃은 아내 마음 / 아아, 둘째 형님/ 그리운 큰 형수님/ 아내의 치마폭에 쓰는 글 )
밥파는 노파( 예술가 장천용 / 백성 이계심/ 인술을 펼친 몽수/ 효자 정관일/ 화악선사/ 기이한 승려/ 밥파는 노파)
멀리 있는 아이에게( 첫 유배지에서/ 오직 독서뿐/ 새해 첫날/ 남의 도움을 바라지마라/ 가을 하늘을 솟아오르는 한 마리 매처럼 / 두 글자의 부적/ 재물을 오래 간직하는 법/ 천하의 두 가지 기준/ 우리집안의 가풍/ 사치하지마라 )
해설 217페이지부터
다산의 마음 ( 과거 인물 중에서 ‘선생’으로 불리는사람은 많지않다. 다산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존경의 염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런 존경의 염은 그가 평생에 걸쳐 민중의 편에서서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했으며 18년간의 유배생활동안 불굴의 의지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점과 주로 관련되어 있는 것같다. 다산은 시대를 초월하여 참된 지식인의 귀감이 되는 분이다.
218페이지
다산은 스스로에 대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평생 자기성찰을 게을리하지않았다. 유학자라면 누구나 성찰과 수양을 강조하지만 다산의 자기성찰은 매우 진지하고 투철했다. 28세에 관직에 진출한 이래로 40세에 유배를 떠날 때까지 정적들이 끊임없는 비방과 공격을
받았고 그래서 그의 관직생할은 상당히 험난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그의 내적 성찰은 더욱 깊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다산의 성찰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로는 〈퇴계선생을 우러르며〉가 있다, 34세 때 다산은 충청도의 금정역 찰방으로 좌천되어 5개월 가량 근무하였다. 이 시절 다산은 매일 새벽마다 《퇴계집》의 편지글을 한 대목씩 읽으며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퇴계선생의 마음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언행을 반성한 것이다. 다산은 “ 보통 사람들은 어수선하며 스스로를 점검하고 성찰하지 않는다.그러므로 비록 백가지, 천가지 병통이 있지만 보고도 도무지 잡아내질 못한다.” 라고 하며 자기성찰의 공부가 자극하지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을 우습게 여기고 남을 깔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 재주와 능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영예를 탐내고 이익을 좋아하는 것이 한가지 허물이고 , 남에게 베푼 것을 잊지 못하고 원한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한가지 허물이고 생각이 같은 사람과는 한 패거리가 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은 공격하는 것이 한가지 허물이고 잡스런 책보기를 좋아하는 것이 한가지 허물이고 함부로 남다른 견해만 내놓으려고 애쓰는 것이 한가지 허물이니 가지가지 온갖 병통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여기에 딱 맞는 처방이 하나 있으니 고칠 개改자가 그것이다. - 퇴계선생을 우러르며 - 중에서
‘여유당’이라 이름붙인 뜻( 꼭 하지않으면 안되는 일인가, 온 세상에 떳떳한 일인가를 생각하며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하려고 노력한다)
224페이지부터
다산의 사회 비판은 책상물림과 탁상공론이나 지식인의 자기현시나 권력투쟁 이념적 도구가 아니었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민중의 고통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파리를 조문한다〉〈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다 〉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강진 유배시절인 1809년에 유래없는 가뭄으로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산은 자신이 목도한 지방 관리들의 무능과부패, 그로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낱낱이 기록하며 현실을 냉철하고 자세하게 분석하고 더 큰 재앙이 다가올 것을 예고하였다. 과연 이듬해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도처에 시신이 산처럼 쌓여 엄청난 파리떼가 생겨나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다. 다산은 굶주려 죽은 백성들이 파리떼로 변한 것이라 슬퍼하여 백성의 넋을 위로하는조문을 썼다. 다산의 글을 읽으며 진정한 연민이란 그처럼 절절하고 그처럼 비통한 것이며 모름지기 구체적인 현실 파악과 냉촐한 비판에 근거해야 되는 곳임을 깨달을 수 있다.
227페이지
다산은 가장적으로도 궂은 일을 많이 겪었다. 그는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한창 어머니가 필요한 나이의 다산에게 어머니 역할을 대신 해준 사람은 큰 형수와 서모 김씨였다. 두 여성은 어린 다산을 지성으로 보살폈다. 큰 형수는 다산이 19살 때 세상을 떠났고 서모 김씨는 1813년에 ‘이제 다산을 다시는 보지못하게되었다’는 한탄의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큰형수의 남동생은 초기 천주교 연구자 이벽이었으며 그 인연으로 인해 다산과 그의 형제들은 천주교에 입문하게 되었고 나중에 온 집안이 풍파를 겪기도 하였다. 다산은 15세 때 풍산 홍씨와 결혼하였다. 모두 6남 3녀를 낳았는데 살아남은 아이가 2남 1녀였고 죽은 아이가 4남 2녀였다. 죽은 아이들은 모두 만 세 살을 못넘겼는데 여섯아이중 다섯이 마마로 죽었다. 다산이 종두법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중국문헌을 적극구해 실제 적용사례를 고찰하여 〈종두설〉을 남긴 것은 그 이유로 보인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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