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수필집

구양근 수필집 <이웃나라에 떨지마라> 선우미디어

권남희 후정 2015. 4. 19. 19:07

 

돛을 내려라

                          구양근 수필가

돛을 내리고 돛단배의 속도를 줄인다. 앞만 보고 달려온 35년간의 뱃길. 이제는 나도 좀 쉬어야겠다. 돛 내린 배 위에서 손으로 서서히 물을 헤치며 장난질을 쳐본다.

나는 살았다. 나의 무리한 뱃길이 더 이상 계속되면 금방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무엇보다도 음식의 과잉섭취에서 해방 되어야만 했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코스요리는 나의 수명을 단축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대만에서는 중국요리가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에 서양요리나 일본요리는 인기가 별로 없다. 내가 초청하고 초청을 받을 때도 역시 중국 요리가 최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요리가 다른 요리보다 월등하게 풍성하고 고급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소한 7∼12가지의 일품요리가 시간 맞추어 차례대로 운반되어 나오는 데는 아무리 절제한다 하여도 과식이 될 수밖에 없다.

휴일이나 주말에도 파티다 골프다 해서 과식이 계속된다. 혹시 집에서 쉬는 날에도 관저에는 전문 요리사가 있기 때문에 자기의 임무인 양 코스요리에 가까운 상차림이 이어진다. 식사 이외에도 애피타이저, 디저트가 나오고, 차며 과일이 격식 맞추어 나온다. 관저요리사는 집에서 할 일이 별로 없다. 대사의 건강을 챙기는 식사준비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하는 관저만찬이 전부이다. 청소하는 사람 따로 있고 빨래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요리사는 자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공무원으로서 모든 식사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 때문에 특히 음식 절제를 못하기로 유명한 나는 거의 매일 과식이 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어떤 계기가 오기 전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공관장 3년 임기가 끝나고 본부귀임 발령이 떨어졌다. 본부귀임이라고 해보았자 실질적인 퇴임이기 때문에 음식과잉에서 벗어날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대학에서 정년하고도 공관장 생활 3년을 더하였으니 이제는 어떤 유혹도 뿌리쳐야겠다.

중국인들은 음식이 풍성해야만 한다. 대접하는 쪽에서도 음식이 남아돌아야 하고, 대접받는 쪽에서도 음식이 많아서 남길 정도가 되어야 대접받았다는 기분이 든다. 술도 거의 전부가 50°이상의 독주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된장찌개, 상추쌈, 김치를 먹으니 하늘을 날 것 같다. 새삼 깨달은 것은 누가 뭐래도 한국요리는 건강식이란 것이다. 귀국해서도 한동안 중국 코스요리를 대접받았는데 한국에서의 중국 코스요리는 대만의 절반 양도 안 된 성싶었다.

그리고 내가 살았다고 소리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 좀 과하게 말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그저 등을 떠밀려서 피동적으로 살아 왔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부를 안 하면 주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학점이 안 나오기 때문에 꼭 해야만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교수가 되어서는 강의를 하고 논문을 써야만 했다. 내일 당장 수업인데 강의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의무논문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논문이 대여섯 편 이상 모이면 자동적으로 단행본이 한 권씩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1년에 한두 편의 논문, 3∼4년 만에 한 권의 단행본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교수이다. 이 속도가 느려서는 무능한 교수로 점 찍히고, 너무 빨라서 더 많은 논문이 나오면 부실한 논문, 엉터리 저서라고 비난받는다. 어떤 교수들은 1년에 두세 권씩의 저술이 쏟아져 나오는 분도 있는데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인간은 누구나 토털 에너지가 있어서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직책을 맡으면서는 더욱 더 등을 떠밀려가게 되어 있었다. 출근하면 결재 서류가 이어지는 것이고, 고위인사와 면담 일정이 잡히면 해당 부서에서 토킹 포인트(Talking Point)를 적어오고, 축사를 해야 할 경우는 해당 부서에서 연설문을 작성해 오기 때문에 수정을 지시하든지 아니면 그대로 한 번 읽어보고 출발하면 된다. 모든 것은 조직화 되어 있다. 비서진이며 담당부서들은 내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내가 스스로 할 일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할 일은 누구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하고 누가 등을 밀지도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직책에 있을 때는 가만히 있어도 떠밀려가던 것이 이제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있는 고장 난 자동차가 되고 만다. 정년 후에 실의에 빠져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앞으로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소설을 써야 한다. 얼마나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렸던 기회이던가. 그리고 틈틈이 에세이를 쓰고 대만에서 배워온 수묵화도 그릴 것이다.

나는 연구를 하며 한계를 느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미공개자료를 나 혼자 발견하고,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발표해 줘도 그 논문을 읽었다는 사람이 없었다. 혹 자기 연구에 필요해서 읽었다는 사람이 있어도 그저 그런 것인가 보다 하는 정도이고 크게 놀라기는커녕 별무관심이다. 나는 실망스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일본 친구인 홋카이도 대학 다나카(田中) 교수와의 대화를 나는 잊지 못한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사학은 하지 않을 거야. 문학작품을 써야 되겠어. 역사는 영향력이 너무나 없어. 문학이 역사의 몇 십 배, 몇 백 배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뭐, 몇 백 배? 몇 만 배 아니야?”

그가 뭐 몇 백 배라고 반문했을 때 나는 한껏 긴장하였다. 자기 전공에 대한 자존심도 없느냐고 힐문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도 그는 문학이 역사의 몇 백 배도 아니고 몇 만 배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오히려 한껏 나를 격려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제부터 인기 없던 학문연구에서 해방되어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진 문학 창작활동을 시작하련다.

구양근 수필가 성신여자대학교 교수.학장 총장역임. 주 타이빼이한국대표부 대사 (2011퇴임) 

수필집<새벽을 깨는 새> < 우리는 왜 노하지않는가> 외 다수 

이메일 : kooyangkeu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