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장애인 이었던 아버지, 요즘말로 장애인이지만 우리만 몰랐다

권남희 후정 2007. 4. 21. 20:32

 사진설명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었던 강가 소풍 -가마솥걸고 닭을 고아서 먹었음-웃고있는 여성은 어머니) 

권남희 글

아버지는 왼쪽 다리가 허벅지 위까지 없어서 의족을 달고 다녔다.

6.25  참전군인인데  강원도 인제전투  도중 지뢰를 밟았다. 아버지 글에 묘사 된 내용을 보면 ' 지뢰를 밟는 순간 몸이 공중에 솟구치다가 떨어졌는데 발목이 날아갔고 피가 뿜고 있었다'고 한다.  치료시설이나 약이 없어  후방에  송치되고도 발목을 바로 치료받지 못해 썩어들어가다가 결국 허벅지 위까지  톱으로 잘랏다고 한다. 마취약도 제대로 없어 잘라내는 소리를 다 듣고  온갖 고통을 겪은 아버지는  다시 사회로 나와서 고통을 겪는다.  재활병원에서 퇴원하여 도 갈 곳이 없어 당시 문제를 일으키던 상이군인들은 사회 말썽꾸러기처럼 천대받으며 소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지가 강한 아버지는 열두살 아래인 어머니와 결혼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 학구파였는지 , 지금 말로 하면 벤처창업인이었는지 , 최초로 온상에 토마토 모종을 하여 출하시기를 앞당겨 상품을 내놓았다.

그후 해마다 6월이면   라디오 프로그램 '양지를 찾아서 '  단골 손님으로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출연하였다.   전국에서 아버지의 온상재배법을 배우러 사람들이 집으로 왔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남긴 원고를 읽다가 포상기록을 위해 공무원이 쓴 일지를 보니 당시 아버지는 전주에서 갑부였다. 워낙 검소하고 구두쇠였기 때문에 자식들은 보통으로 살아가는 농부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 ,  근면성실했던 아버지의 태도가 자식에게 약이 되었다고 느낀다.   

어찌나  지독하게 일하면서 씀씀이를 아꼈는지 , 친척들에게 독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아끼고 자식교육에 매달렸던 덕분에 우리는 아버지가 한 번도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엇을 못할까  

아버지 만세!  1982년도(음력 7월 21일 )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