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수필집

김명순 수필집 <뉴욕, 삶과 사랑의 풍경 2 >

권남희 후정 2010. 1. 30. 15:54

 

  김명순 수필집 <뉴욕, 삶과 사람의 풍경 2>   선우미디어

김명순 약력 ( 1954. 전북 정읍출생. 1980년 도미.  뉴욕 컬리지, F.I.T수학 , 인터내셔날 크리스챤 에듀케이션 컬리지 수료, 브리지포트 졸업,  브리지포트 경영대학원 수학. 외국어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뉴욕 한국일보 체험수기 공모 최고상 (1980)  /  뉴욕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당선( 1990) . 1995년 한국수필 신인상

제 4회 원종린 문학상 . 뉴욕한인상(1997) . 한국학교 10년 근속 공로상 . 뉴욕원광학교 교사 12년 근무. 외

제 6회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수상 2009년 12월

제 1수필집 < 뉴욕, 사람과 사랑의 풍경1> 

  공저  ' 영혼의 불' ' 낯설게 하는 하루' ' 뉴욕, 그리움' ' 뉴욕 뜨기'   등

     차례롘

머리말 / 정목일 이사장 '김명순의 수필세계' 

1부 삶, 마음의 풍경 ( 마음의 새/ 가로등/ 자기 사랑의 길 / 아침산책/목련의 봄/ 하한얀색의 신비/  분홍색 우산 

2부 꿈, 이상의 불꽃 ( 님/ 어린시절 향수를 느끼며/ 미국 대학에서 배운 것 / 신사임당의 하늘 / 엄마의 꿈, 자녀의 꿈 / 이상의 날개  

3부 사랑, 그리움 ( 참, 사랑 / 부부의 사랑 / 사랑, 인생의 보험 / 사랑, 파괴범/ 사랑, 섹스/ 사랑, 마음의 거울 / 지선의 그리움 / 사랑의 벗님들 

4부 뉴욕의 혼불 

( 조국을 위한 기도 / 미국속의 한국인 / 내가 존경하는 인물들 / 나이와 함께 / 가훈과 가정철학 /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 뿌리 교육의 보람 

5부 비오는 날, 그 거리에서 

( 비오는 날 그 거리에서 / 겨울날의 사색/ 그 길로 가서 / 새색의 단상 

6부 책속의 빛 (어빙의 집을 찾아서/ 유정/ 뿌리 알렉스  헤일리 

7부 빛과 어듬의 명상 ( 죽음, 끝/ 바람, 5.18영령들의 혼/ 생사는 하나 / 큰 나 있으매/ 의식과 망상 

8부 삶의 지혜.마음공부 ( 어려운 깨우침의 경지/ 살아있음에/ 멈추어버린 시계/ 법바다에 피어난 꽃 / 마음 한 번돌리니 

9. 인생여행기(이민수기)

뉴욕으로 / 내가 선택한 나라, 미국 / 내가 선택한 나라 미국 2

 

 



        뉴욕의 삶, 인생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의 미학

              - 김명순 <뉴욕, 삶과 사랑의 풍경2>의 작품세계


                                      鄭 木 日 (수필가.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수필은 인생의 고백, 마음의 토로이다. 자신과의 소통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며, 세상과도 소통한다. 풀벌레가 밤새도록 우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의도이다. 우주 한 복판에 안테나를 세워놓고 끊임없이 발신음을 보내는 것은 세상 어느 곳에서 단 하나의 수신자를 만나기 위한 것이다.

 수필도 자신의 마음과 인생을 토로하면서 독자들과 소통하려 한다. 마음을 털어내야 홀가분해지고 맑아진다. 마음을 나눌 수가 없으면 진실한 관계가 되지 못한다. 시, 소설, 희곡 등 상상을 토대로 한 문학은 허구를 통해 소재를 끌어들이지만,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한다. 픽션은 상상과 흥미를 통한 소통장치라면 논픽션은 사실과 진실을 통한 소통장치이다.

 사람들은 날마다 거울을 보고 산다. 제 얼굴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다. 그런데도 거울과 사진을 보지 않은 채 자화상을 그리기는 실로 어렵다. 타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은 인간이 풀 수 없는 마지막 질문이다. 논리와 과학, 종교와 철학으로도 알 수 없다. 수필쓰기는 삶에 대한 성찰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타인을 알 수 없으며 세상과도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

 수필의 소재는 신변잡사일 때가 많다. 사람들의 일상은 대개 특별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평범함, 사소함 속에 있다. 신변잡사를 소재로 할 때는 ‘생활경험의 금싸라기이어야 한다. 피천득은 <순례>라는 작품에서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 경험의 표현이다. 고도로 압축되어 있어 그 내용의 농도가 진하다.‘라고 했다. ’생활 경험의 금싸라기‘를 골라내는 인생적인 안목이 필요하며 마음의 경지가 있어야 한다.

 김명순 씨는 전북 정읍 출생으로 1980년 도미하여, 30년간 미국에서 살아온 중견 수필가이다. 1990년 뉴욕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당선자로서, 미국동부 한국문협 수필분과위원장, 부이사장,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런 경력을 보더라도 김명순 씨가 본격적인 수필창작에 얼마나 열중해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에 출간 된 저서만도 <영혼의 불> <낯설게 사는 하루> <뉴욕, 그리움> <뉴욕, 삶과 사랑의 풍경>등 5권이 있다. 이번에 출간되는 수필집 타이틀을 <뉴욕, 삶과 사랑의 풍경2>으로 정한 것을 보면, 공간적으로 ‘뉴욕’, 시간적으로 ‘사랑’과 그 모습을 담아낸 것을 알 수 있다. 뉴욕에서 미국교포로서 이민자로 살아오면서 한국인의 문화정체성을 잃지 않고 미국문화 속에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과 사랑을 보여준다.

 한국인의 해외 이민사는 1백주년이 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재미 수필가들이 한국에서의 성장기와 자연 풍물, 부모와의 이별과 그리움을 즐겨 다루는 것을 본다. 김명순의 수필은 이런 회고, 토로 조의 소재에서 벗어나 자신이 뿌리박고 살고 있는 삶의 중심, 뉴욕에서의 생활과 사랑에 대해서, 다인종 다문화의 종합장과 같은 이곳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삶과 지혜를 펼치고 있다는 데서 가치를 발하고 있다.

 복구풍의 회고는 그리움의 원천이지만, 이제는 현실과 미래를 통찰하면서 현재의 삶과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쪽이 더 가치 있다고 할 것이다. 한국 수필가들이 체험할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의 형상화는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이바지 하는 일이 된다.

 김명순의 수필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을 든다면 고백, 토로, 하소연, 에피소드, 감상에 그치지 않고 삶에 대한 발견과 의미부여를 통한 깨달음에 두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진정한 수필관을 갖고서 개인사적 기록 차원을 넘어서 사상과 철학을 접목시켜 나가고 있다.


이로써 수필이 서정적 이미지, 서사적인 전개로 그쳐져 버리고 마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사유의 깊이와 공간성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고 다양성을 넓히고 있음을 본다.


 이민 초, 학군이 좋고, 미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앨버슨으로 이사를 했는데, 아침이면 새 한 마리가 침실 창가의 꽃나무 가지에 놀러 오고는 했다. 붉은 털이 앞가슴을 수북이 덮고, 제비 보다는 크고 통통하게 잘생긴 라빈이라는 새였다. 그 새를 보고 하루를 시작할 때면 좋은 친구가 생긴 듯 외롭지 않았고, 유쾌해서 마음의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했다. 지금도 그 새는 잊지 못할 마음의 새가 되어 내 영혼의 둥지위에 날아와 앉고는 한다.      

  마음이 답답하고 번다할 때면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은 그 때부터 생긴 버릇일 것이다. 생존에 맞물려 돌아가는 삶이 목을 조일 때마다, 모든 애착에서 벗어나 한 마리 새가 되고 싶다는 부질없는 소망을 마음의 새로 시원하게 날려 보낸다.   

  그럴 때면 불현듯 그리움이 솟는다. 바람처럼 스쳐지나왔던 과거의 것들이 되살아나 다가온다. 비행기를 타면 어디든지 금방 갈 수 있다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마음의 새를 고향으로, 추억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로 무작정 날려 보내는 것이다.


  ‘나르는 것이 모두 새라면 / 바람에 나는 나뭇잎들이 모두 / 새가 되네요 / 내 마음도 공중을 날아 / 당신에게 갔으므로 / 나도 / 새가 되네요’ 라고 읊다가 종장에는 ‘마음의 새는 새가 아닌 데요 / 기별 없는 새는 새가 아닌 데요’ 라고 썼던 최정자 시인의 심정과 마주치게 되기도 한다.


  빛은 초속 삼십만 킬로미터로 우주의 지평선을 향해 달리고, 새들은 하루에 여덟 시간 내지 열 시간씩 사백에서 오백 킬로미터씩 날아서 수천, 수만 킬로미터까지 간다고 한다. 하나 내 마음의 새는 그것들 보다 훨씬 더 빨리 날수도 있는데 마음의 새는 새가 아니라 하니 섭섭하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새만이 새라고 하면 더 높이 날아가는 내 마음의 새는 허망하고, 서글픈 새에 불과 하지 않은가. 

  모친이 외롭게 사시다가 오년 전에 돌아가시게 됨에 마음의 새만 고국으로 자주 날렸던 자신을 질책하며 한 동안 가슴을 앓았었다. 돌이켜보니 마음의 새를 수없이 날렸던 안타까움 또한 그것대로 의미가 깊었고, 그리움의 탑을 쌓은 심적 교류가 시공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렀음에야. 어머니는 내 그리움 속에, 나는 어머니의 따듯한 가슴 속에 살며 서로를 달래 주며 지탱해 주지 않았던가. 

  생애에 단 한번, 종달새나 나이팅게일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죽어 간다는 가시나무 새. 가장 훌륭한 것은 가장 위대한 고통을 치러야 비로소 얻어지는 인생의 해답이다.

  내 온전한 삶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죽이며, 그 새의 목숨 거는 흉내라도 내 볼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의 새라도 부질없이 날려 보낼 수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인생이란 죽는 날까지 장담 못하는 것. 숙성된 인격을 위해 쓰디쓴 인내를 감수해야 한다. 미지수로 남아 있는 세월이지만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디어 새처럼 가벼워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하늘에서 나는 새를 보며 살게 한 것은 새처럼 뼈 속까지 비우고 유유자적하는 인생을 살라는 창조주의 배려가 아니겠는가 싶다.

                                                  <마음의 새> 일부



 <마음의 새>는 김명순 수필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준다.

 우리는 새를 볼 때 자유, 동경, 희망, 그리움을 생각한다. 생명체 중에서 시간과 공간을 최상으로 확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철새들이다. 또한 하늘, 물, 땅을 자유자재로 날고, 헤엄치며, 거닐 수 있는 존재는 철새들이다.

 한 번 하늘에 오르면 3~4일을 날아서 기착지에 도착해야 하는 철새들의 비상은 극한의 고독과 인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늘을 자유로이 날기 위해선 목표점이 분명해야 하며, 가고자 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       

이민자들은 철새들처럼 고국을 향해 머리를 두고 그리움을 날려 보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뿌리박고 적응하는 텃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훌륭한 것은 가장 위대한 고통을 치러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 고향과 타향. 순간과 찰나도 마음의 교류를 통해 만날 수 있으며, 이 순간의 최선이야말로 삶을 꽃피우는 자각이 아닐 수 없음을 저자는 말해주고 있다. 

 내 온전한 삶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죽이며, 그 새의 목숨 거는 흉내라도 내 볼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의 새라도 부질없이 날려 보낼 수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인생이란 죽는 날까지 장담 못하는 것. 숙성된 인격을 위해 쓰디쓴 인내를 감수해야 한다. 미지수로 남아 있는 세월이지만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디어 새처럼 가벼워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하늘에서 나는 새를 보며 살게 한 것은 새처럼 뼈 속까지 비우고 유유자적하는 인생을 살라는 창조주의 배려가 아니겠는가 싶다.

                                               <마음의 새> 일부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으려면 마음을 비워 새처럼 뼈 속까지 비워야만 유유자적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달관의 삶과 마음의 경지를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으면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생이 그리워진다. 위대했던 인생(人生)은 해바라기의 충직성과 우직함을 지녔다. 민족과 인류를 위해 생을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간디,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등의 이름들이 떠올려 진다.

  자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조차 어려운 나 같은 소인에게는 이 분들의 생애가 하늘의 별빛처럼 멀고, 영롱한 것이다. 쳐다보기에도 송구해지는 그분들의 생애는 어둠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가로등 같다. 그런 분들이 계셨기에 후세대인 우리는 이만큼이나마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리라.

  얼마 전 신문에 보니 반 기문 유엔사무총장이 2009년 5월 21일 존스홉킨스 국제관계 대학원 졸업식에 참석, 기념축사를 하면서 “공공에 봉사하는 삶보다 고귀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현시대의 가로등 같은 분의 말씀이어서 잊혀 지지 않는다. 그 분의 빛이 오래 동안 사라지지 않기를 빌어 본다.

  한번 와서 살다가는 인생이지만 바르게 살고, 선하게 행동하다 죽는다면 가로등불빛 같은 거룩한 이는 못 되어도 세상의 욕은 먹지 않을 것 같다. 정직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 비굴하게 얻어진 부귀영화 보다 나을 것이라 싶다.  

 오늘밤도 가로등 불빛은 여여(如如)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다. 키가 멀쩡하게 크고, 잃어버린 사랑의 열정을 밤의 불빛으로 피워내는 듯한 해바라기 모습으로 미소를 띠우고 있다.


                                                       <가로등> 일부

 ‘가로등’을 봉사자로 이인화법으로 봉사와 희생으로 공동체 사회를 건전하고 아름답게 발전시켜 가는 위인, 봉사자들의 삶을 찬양하며, 자신의 삶과 결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인의 자세를 가다듬고 있는 글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인생관과 성찰이 드러나 있다.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과 같은 위인이나 봉사자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사랑의 온기가 감돌고 용기와 협력의 마음이 뻗어나가면서 꿈과 성취가 영글어간다.

 권력자는 권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부자는 빈자를 위해, 정상인은 장애자를 위해, 지식인은 무식자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고 나눠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과시하고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무시하려는 태도를 갖기도 한다.

 ‘가로등’은 물질만능과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의 삶에 반성과 봉사의 미덕을 일깨워주는 마음의 등불이다.


 어머니는 오래 동안 고쟁이까지 하얀색 일색으로 흰 옷만 입고 계셨다. 단정하게 옷매무세를 갖추고 아버지의 영정 앞에 정화수를 올리던 어머니는 그리스 신전의 제사장처럼 경건해 보였다. 아마 어머니는 정성어린 치성(致誠)을 드리면서 아버지의 부활을 꿈꾸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 여인이 견디기에는 너무 무거워 하늘과 땅이 하얗게 맞닿아 버렸다던 암흑의 슬픔이 하얀색을 수호(守護)하는 것만으로 감당이 되었을까. 

  어머니가 흰옷을 입고 외출할 때면 동네 사람들은 “얼마나 애통하십니까?”라며 고개 숙여 경의를 표했다. 고통의 바다에 숨어 있던 모비 딕이 하얀 물줄기를 내뿜으며 나타난 듯 사람들은 경직하여 소복 입은 여인에게 자비의 눈길을 보내었다. 성스럽고 맑은 품성을 지닌 성의(聖衣)같은 흰색으로 몸을 감고, 정절의 끈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는 딸 여섯을 온전하게 키워 주셨다. 참 장한 일이었다. 아마 어머니의 하얀 옷이 희망이란 부적을 숨겨 어머니를 강하게 지탱해 주었을 것이라 믿는다면 억지가 될까.

  어머니를 한 마리 학처럼 고아(高雅)하게 우러러 보며 자랐던 나는 어머니의 하얀 자태를 떠올릴 때면, 아툼(Atum)이 사정한 흰색의 정액에 의해 이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이집트인들이나, 하얀색은 깨달음을 향해 올라가는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의 빛깔’이라고 믿었던 티베트인들처럼, 흰색을 신이 선택한 최고의 색깔이라고 믿는다.

  고행을 넘어섰던 신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 이차돈의 목에서 흘렀다던 하얀 피가 어머니의 몸속에도 흐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영과 육이 인간의 본능적 욕망 앞에서 꿈틀거림을 멈추고 하얀색의 꿈으로 돋아날 때 신(神)은 그 몸속에 하얀 피를 수혈해 준다는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닐까. 그래야 하얀색이 인간을 신의 영지(靈地)로 주제하는 힘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그 지선(至善)의 경지가 궁금해진다.

  종교 회화나 만다라(Mandala)에서 조차 가장 순수한 빛의 색으로 하얀 공간을 의도적으로 비워(虛)상생을 희구한다는 하얀색. 그 흰 색깔의 기도 복을 한 벌 해 입고 싶다. 내 힘은 미약하지만 세계 평화를 위해, 죄 없는 생명들이 전쟁터에서 가치 없는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얀색의 숙연함으로 빌어 보고 싶다.

  죽음조차 희망의 믿음으로 바꿔주던 하얀색의 신비가, 그 안에 지닌 초월적 힘과 의지가, 이 우주의 만 생령(萬 生靈)을 살려 주고, 이 땅의 혼탁함을 정화시켜 줄 수 있는 위력을 베풀 수 있는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그것이 인류를 위해 줄 수 있는 내 작은 희원이 될지라도 나는 흰색에 대한 믿음을 희망처럼 간직해 보고 싶은 것이다.  


                                           <하얀색의 신비> 일부

 ‘하얀색의 신비’는  흰 색에 대한 분석적인 탐구와 색채 미학을 담은 이색적인 작품이다. 흰 색은 숭상이 드러나는 관혼상례 등 통과의례를 비롯하여 신화, 신앙, 삶에서의 여러 현상과 전통적인 의식에서 그 신비를 찾아보려 했다.

 특히 한국인은 다른 민족보다 흰빛에 대한 숭상이 짙었으며 조선 5백년간에는 의생활에 있어서 흰 옷의 선용이 많아 백의민족이란 말을 들었다. 도자기 예술에 있어서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백색 탐구에만 바쳐진 희귀한 모습을 보였다. 아기가 태어나면 보통 흰 빛의 옷을 입혔고, 돌아갈 때 입는 수의도 백색인 경우가 많았다. 백색은 정화와 구원과 영원의 빛으로써 의식돼 왔다. 모든 색을 포용하고

모든 색채의 근원이 되는 바탕색이 아닐 수 없다.

 김명순 수필에서 품은 ‘백색의 신비’는 곧 생명과 영원의 신비를 말해 주며 혼탁과 혼돈, 더러움과 무질서를 정화, 순치시켜서 항상 새롭고 정결한 세상을 만나기를 희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백자 항아리에서 달빛과 같은 은은하게 눈부시지 않게 마음을 채워주는 맑은 고요의 도취를 맛본다. 김명순의 수필에서도 이와 같은 달빛 어린 마음의 은유와 투영이 있어 반갑다.   

 김명순 수필은 작가 자신의 삶의 흔적이요, 반영인 까닭에 신변잡사적인 모습도 드러나고 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부모와 자녀가 가고자 하는 진로가 다를 때가 있다. 자녀가 바라는 길로 가도록 선택권을 주면서 협조해 나가는 모습과 가족간의 조화와 협력을 위한 사랑의 배려와 헌신이 마음을 끈다. 

 김명순의 수필에서 보여준 삶의 테마는 ‘사랑’이며, 그 인생은 사랑의 풍경과 투영물이 아닐 수 없다. 이 수필집에 비춰진 사랑은 자연과 인간, 시간과 공간, 순간과 영원을 아우르는 최선의 노력으로 피어낸 깨달음의 꽃이다. 모든 존재와 관계에 삶의 의미로써 꺼지지 않는 ‘사랑’이란 촛불 하나를 온 일생의 집중력으로 밝혀놓으려 했다. 김명순은 뉴욕 삶의 한복판에 ‘사랑’이란 촛불을 우주 중심으로 삼아 반듯하게 세워 놓은 것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