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편집 이일기 시인
물 한 사발에 시험 들었던 아기
권남희
그 방에 물 사발은 우연히 있었던 걸까. 어머니 의중을 몰라 지금도 가끔 시험 들고 마는 자신을 본다.
‘하루 종일 있어도 물 사발이 그대로 있었다니까’
돌잡이 아기를 방안에 두고 바깥일을 보러 나가야 하는 어머니는 뜰먹대다 울먹이는 아기 주저앉히는 언변을 구사했으리라. 이십 초반의 어머니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밤마다 나타나는 좀도둑과 예사로 대치하곤 했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느 땐 천둥소리였을 테고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가정을 스스로 일궜으니 태도는 늘 당찼다. 아무렴 어머니에게 자신의 생명줄이 걸려있는 일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돌잡이 아기가 어머니의 경고를 못 알아들었을까. 어머니의 시퍼런 서슬에는 물 사발 저도 움찔하여 출렁였을 것 같다. 그렇잖아도 언성을 높이며 아버지가 어머니 앞으로 날리던 국 대접이나 동댕이쳐지는 물 사발로부터 받은 공포로 아기의 삶은 충분히 자지러져버린 후였다.
“ 하루 종일 방안에 뒀는디, 물 대접도 걍 그 자리에, 쟈도 그 자리에 있었당게로. 무슨 애기가 부처님맹기로 꿈쩍않는단 말여?”
부처님은 몰라도 여자 아이는 자라면서 어쨌든 부처님과 겨룰 만큼의 미덕을 갖춰야 성품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온화하고 조용한 품성에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 물 사발부터 집어던지지 않는 진중함을 갖춰야 했다. 양은그릇을 들고 나가 엿과 바꿔먹거나 뛰어 놀다 팔다리 부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던 남동생 둘은 날마다 어머니에게 욕을 먹고도 무언가 해내라 졸라대며 목청껏 대들다가 아궁이 불을 헤치던 부지깽이까지 날리게 하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이었고 나는 목청도 없이 태어난 것 같이 녹신녹신한 여자 아이였다. 물 사발 엎지 않은 아기가 그리 대단했을까. 내 답답할 정도의 신중함에 대한 어머니의 칭찬은 사춘기가 돼도 끝나지 않았다.
나와 물 사발이야기는 전설처럼 동네를 떠돌고 친척들 사이를 돌아 다녔다. 나는 어머니가 과대 포장한 부처아기로 어머니의 친정에 일 년 넘게 맡겨졌는데 그 곳에서도 ”야가 갸여?“로 통하게 되었다. 꽤 큰 마을에 자리 잡고 살았던 외가 동네 곳곳에서는 자주 물 사발이 마당으로 뒹굴고 밥상이 내동댕이쳐졌다. 울며불며 어머니를 찾아 버둥거려할 아기의 삶은 은결되어 버린 채 더욱 숫된 아이로, 투정부릴 줄도, 울 줄도 모르는 아이로 커 갔으리라.
짐작한다.
뜰 마루는 커녕 문지방도 넘지 못할 만큼 겁을 준 어머니가 나가면 나는 분명 움직였으리라. 고개를 도리반대다가 살짝 물 사발 앞으로 기어가서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보고 살펴보았을 게 틀림없다. 이내 부엌으로 난 여닫이 문도 흘끔거린 다음 얼씬거리지 않다가 목이 마르면 살짝 물 사발에 입을 대고 들이켰을 수도 있고 때로는 울먹이다가 잠이 들었을 수도 있다. 무릎마디가 아플 만큼 그대로 있기야 했을까. 말을 듣지 않으면 물 사발이 날아들 수 있다는 위험을 느끼면서 개도 짖어대고 돼지 꿀꿀거리는 소리 음악 삼아 바깥에 귀를 기울인 채 누군가 자기 곁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라는 존재는 기다려야 온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부처가 되어 물 사발이 날아드는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돌담도 토담도, 꽃담도 대문까지 없이 살았던 외딴 집의 아이는 온통 꽃살문 밖으로, 길가 어디쯤으로 귀를 기울이며 그저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집 주위를 에워싼 배추꽃, 무꽃, 오이꽃 호박꽃 토끼풀꽃, 탱자꽃이 아무리 향기를 드높여도 그들에게 ‘예쁘구나’ 말 한 번 건네줄 줄 모르고 바라보기만 하는 아이였다.
그토록,
내 삶을 위한 심마니가 되어 치근거리고 따깜질하여 갖고 싶은 것 뺏는 재주도 없는 사람인 채, 홧김에 물 사발 한 번 날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꿔다놓은 보릿자루냐’는 앞정강이 차이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어 국 대접 날려버리고 물 사발 내 던지던 남정네들이 사라졌다. 마음속에서 두려움도 사라진 지 오래지만 나는 아직도 꿈쩍 하지 않는다.
삶이 소들소들해 보이면 어떠랴. 물 한 사발과 버티기를 한 덕분에 책을 친구삼고 글을 쓰게 되어 인생이 풍성해지는 것을.
-문학예술 <오늘의 에세이 10인 특집> 수록
권남희 약력
1987년 월간 문학 수필등단. 現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덕성여대평생교육원. MBC롯데잠실. 삼성 홈플러스아카데미 분당 등 강의.
작품집 『미시족』『그대삶의 붉은 포도밭』등 4권 .제 22회 한국수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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