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등단 회고담
-고비 때마다 만난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정 종 명 소설가(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 편집국장)
나의 문학 수업은 대충 3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고등학교 시절이고, 두 번째는 대학 시절,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사회에 나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가졌던 문학수업기이다. 내가 작가의 한 사람으로 문단 말석이나마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우둔한 문학적 재능을 일깨워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베풀어 준 몇몇 고마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단편 <도주> 당선되어 특기장학생으로 대학 입학
탄광촌으로 알려진 태백시에서 중학교를 나와 유학을 간 곳이 강릉이었다. 전신이 사범학교인 강릉고등학교에 진학해 보니, 거기에 시인 원영동(元永東) 선생님이 국어를 담당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만난 최초의 문인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소설 비슷한 글을 써서 <학원>이란 학생잡지에다 이름 석 자를 올려 본 이력을 밑천삼아 겁도 없이 문예반을 기웃거리게 되었는데, 그런 병아리를 선생님은 특별히 은혜로운 관심의 눈길로 보살펴 주셨다.
그 선생님을 따라 두세 군데의 백일장에 나가 입상의 영예를 누렸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장차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을 가슴 깊이 굳히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원영동 선생님은 서울로 훌쩍 떠나시고 말았다.
당시 몇몇 대학에서는 고등학생을 상대로 백일장이나, 문예작품을 모집해서 당선된 학생을 특기장학생으로 선발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그 관문을 통해 대학에 들어갈 작심을 진작부터 굳혀놓고, 입시공부는 뒷전으로 밀어 둔 채 습작이나 문학작품 탐독에 더 열중했다.
나는 시나 소설을 써서 거의 매월 <학원>에다 투고를 했는데, 작품이 실리면 그만큼 희망이 부풀었고, 반대로 가작란에도 들지 못하는 달은 상대적으로 말할 수 없는 실의와 좌절의 늪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이듬해 초여름 데모 열풍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조기 방학이 실시되어 나는 태백시 친가로 돌아갔다. 무덥고 지루한 50여 일의 방학 동안 나는 약 1천매에 가까운 장편과 70여 매짜리 단편을 썼는데, <도주>라는 그 단편이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주최 고등학생 문예콩쿠르대회에서 당선되었다. 그 소설을 뽑아 준 사람이 김동리(金東里) 선생님이었다. 데모 주동자로 낙인이 찍혀 가까스로 퇴학을 모면했던 요주의 문제아가 이 일로 해서 하루아침에 의기양양한 스타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오정희 이경자 윤정모 등이 문예창작학과 동기생
특기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나는 약간의 우월감에 젖어 있었다. 바로 위 학년에 작가 이동하, 시인 김형영 형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1년 후면 나도 그들처럼 학생 작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리라는 터무니없는 시건방을 나는 여러 모로 과시했던 것 같다.
50여명의 학생들 가운데서 나중에 문단에 나온 문우를 손꼽으면 김년균, 오정희, 이경자, 윤정모, 이우선, 김희원, 장경호, 이남진, 이옥희 등이 나의 동기였다. 그 중에서 오정희와 이경자는 나와 동인회 비슷한 모임을 만들어 작품합평회를 통해 잠시나마 호흡을 맞추었던 친구들이었다. 두 사람은 학교 앞에다 정한 내 하숙집에도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는데, 각자 써 가지고 온 작품합평회에 들어가면 당돌할이만큼 꽤나 신랄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잔뜩 겉멋만 들어 있던 나는 늘 그들을 한수 접어놓고 상대했는데, 그 죄값을 치르느라고 그랬는지 정작 문단에 나오기로는 세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뒤늦었다.
내가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이미 신춘문예를 통과해 당당한 작가로 입신한 오정희는 문예창작학과 조교로 재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입학동기생이 이제는 학생과 선생님 사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정희는 주목받는 신인의 한 사람이었고, 나는 아직도 장래가 불확실한 신춘문예 준비생에 불과했다. 든든한 동기생 선생님 덕분에 여러 모로 득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골인 지점 앞에서 추월당한 마라톤 선수의 절망적인 좌절감 비슷한 마음고생도 함께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
■김년균 시인의 자취방에서 습작생활 계속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그 해에 학교를 졸업했으나 직장 잡기가 난감했다. 비싼 하숙비 조달이 어렵다고 해서 다 뿌리치고 시골 친가로 내려갈 처지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서울에 빌붙어 뭉기적거려야만 실날 같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을 것 같았다. 그 구세주가 시인 김년균 형이었다.
그 무렵 형은 월간문학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미아리 달동네에다 방 하나를 세 들어 혼자 살고 있었다. 문예창작학과 동기생이기는 하지만 군복무를 마치면서 대학에 들어온 그 형이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일단 자기 집에다 거처를 정해 놓고 차차 진로를 모색해 보자고 제의했다. 나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호의였다.
끼니는 대개 미아리 길음시장에서 매식(買食)으로 때웠고, 형이 출근하고 나면 나는 어두컴컴한 그 빈방으로 혼자 돌아갔다.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작품을 쓴답시고 고심했지만 여름날 뿌리 뽑힌 고구마 줄기처럼 심신이 고루 시들어 버린 나머지 이렇다 할 진척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당시에 쓴 약 5백매의 중편 하나를 기념삼아 지금도 나는 가지고 있는데, 지금 보면 어디에도 내놓을 형편이 못 되는 엉터리 작품이다. 그 엉터리 작품을 싫증도 안 내고 끈기 있게 읽어 주면서 “잘 썼다. 넌 틀림없이 작가 될 거야.”하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던 김년균 형의 그 무던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두어 달을 그렇게 버티고 나서 이동하 형이 소개해 준 월간 <스포오츠> 잡지에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잡지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출근 6개월 만에 다시 실직자가 되고 말았다. 이동하 형이 다시 소개를 해서 이번에는 작가 김원일 선배가 부장으로 재직 중인 국민서관이라는 출판사에 입사했다. 아동물 출판사인데 걸핏하면 야근이었다. 나는 거기서 4년 6 개월을 근무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아내를 따라 병원에 갔는데,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 굴러다니는 잡지 한 권을 집어 뒤적거리다가 거기서 나는 참으로 충격적인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글은, 내가 한 사람의 작가가 되기를 내 자신보다 더 간절하게 소망했던 '그 여자'의 당선 작품이었는데, 그것이 그 즈음 싸늘하게 식어 버린 나의 문학혼에 불씨를 당겨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난 3년간 문학과는 거의 의도적으로 담을 쌓고 지낸 스스로의 배신행위가 당치도 않은 패배주의자의 자기 기만적 자학(自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로부터 오래잖아 사직서를 제출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 때 이미 돌을 지난 아이까지 거느린 가장으로서는 참으로 무책임한 행위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가하는 채찍으로서는 그 이상 가는 다른 충격 요법이 전무하다는 판단이었다.
단칸 셋방에 들어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일에 대한 아무 보장이 없는 불확실한 일말의 ‘가능성’과의 고달픈 씨름의 연속이었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엄습하는 처절한 불안감과도 싸워 이겨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숙제 앞에서는 더더욱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생계 유지의 수단으로 김문수 작가가 재직하는 출판사에 연줄을 대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몇 사람과의 교우가 시작되었다.
■이문열 이외수 윤후명 등과 <작가동인> 결성
처음 만난 사람이 윤후명이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유익서, 황충상, 이채형을 만났다. 윤후명은 이미 기성 시인이었지만 유익서, 황충상, 이채형은 냉담하기 짝이 없는 문단이란 대문 앞에서 문전 축객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경험한 만년 문학도였다. 동병상련의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고, 누구의 제안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에 없지만, 하여간 우리는 월 1회씩 습작품에 대한 합평회를 갖는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약 1년 정도 그런 작품합평회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장했고, 다소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네 사람 모두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작단에 얼굴을 내밀게 됨으로써 그 지루하고 암담하고 차라리 처절하기까지 했던 힘겨운 문학수업기에 종지부를 찍기에 이르렀다.
나는 1978년 10월호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나의 데뷔작은 <사자의 춤>이다. ‘처남이 죽었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서두를 놓고 나는 한동안 고민했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까뮈의 <이방인>을 모방했다는 오해를 살 우려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 작품 <사자의 춤>도 까뮈의 <이방인>처럼 일인칭 소설이었고, 실제로 그 무렵 까뮈는 나의 우상이었다.
이 작품에 대해 어느 자리에서 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진단한 적이 있는데, 내가 내 작품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실없는 군소리를 자꾸 늘어놓는 쑥스러움을 모면해 볼 방편으로 여기에 인용하겠다.
--- <사자의 춤>은 인간관계의 특이한 양상을 추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집을 뛰쳐나가 버린 아내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처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갓집에 찾아가게 된다. 처남의 장례식에 아내가 다른 사내와 함께 나타난다. 병을 얻어 세상을 일찍 떠난 처남을 위해 집안에서 벌이는 무당굿에서 주인공은 신장대를 잡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신장대를 잡고 있던 주인공에게 혼백이 내려 예기치 못했던 소동이 벌어지고, 결국은 아내와 함께 나타난 사내에게 주인공이 구타를 당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주인공과 아내의 인간관계가 완전히 깨어지는 순간이 바로 그 장면이다. 소설 <사자의 춤>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선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요건이 되고 있는 신뢰와 사랑의 결여 상태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적인 병리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 정종명은 자기 풍자의 방법으로 그런 현상에 접근하고 있다.---
나의 다른 작품들과 묶어서 논의했고, 또 평론가는 때로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점까지도 착안하는 법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을 두고 ‘사회적인 병리 현상’ 운운 한 대목은 작가인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점인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내 작품세계의 한 축을 이룬 것만은 사실이다.
등단하고 나서 1년 남짓 지났을 때였다. 내 생애를 통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작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문열 이외수 윤후명 손영목 서동훈 유익서 김원우 김채원 유홍종 표성흠 등, 쟁쟁한 젊은 작가들을 만나 <작가동인>을 결성한 것이다. 1980년 8월 15일, 한국문예진흥원 뒤뜰 잔디밭에서 첫 회합을 가졌고, 이어서 도서출판 민음사에서 <작가동인> 1집을 내었다. <작가동인>은 4집까지 내었는데, 나중에 강석경 김상렬 김인배 정소성 최학 황충상 등도 참여했다. 이들 덕분에 나도 덩달아 ‘좀 쓰는 젊은 작가’로 분에 넘치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 문단 말석이나마 지킬 수 있었던 내력도 어쩌면 그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 <문학예술> 가을호에서
*daum 검색창에서 ‘정종명’과 ‘위키백과’를 검색하면 필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문학발전포럼 http://cafe.daum.net/k.l.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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