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행사

교보문고 잠실점 신춘 낭독행사 초청합니다

권남희 후정 2011. 2. 22. 13:06

 

 

교보문고 잠실점 신춘 정기낭독행사입니다

 독자낭독행사 선물있습니다

 

 

 

 

정 . 기 . 낭. 독 . 행 .사

-MBC 아카데미 롯데잠실 목요수필 -

 

2011.24. 목.오후 3시 사회 유영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김명중 축하의 말 교보문고 잠실점장

이춘자 인사말 내 안에 있는 향기를 찾아서 MBC롯데잠실 목요수필 회장

권남희 격려사 서로에게 좋은 월간한국수필 편집주간

초대작품

정목일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 세한도

김남조 시인 옛 연인들

권남희 수필가 사랑에 안식처를 삼지 않았다

회원작품

전수림 나를 놓아두는 시간

이현숙 역경이 만드는 습관

문장옥 사군자

허해순 원초적 본능

이남수 멈출 수 없는 곳

김은순 낼 모레 칠십

이춘자 향에 중독되다

유영희 또 다른 나 수필작가

이해정 사랑으로 웃음을 사다

윤중일 행복을 주었던 설 풍습

안혜영 온전히 내 뜻대로

이강순 어니스트처럼

이영숙 청소하는 습관

박위순 용왕님이 돌보사

박경옥 세상살이는 도덕성이라는 터전에서 잘 자란다

이선영 삶속을 걷다

안병옥 낯익은 행복 -

문덕연 아침밥 챙기기

이순영 고요 머문 내 안의 뜰

강귀분 고래와 춤을

 

원고없는 화원

김영자/김경수/ 양경희

 

낭독작품을 수록한 회원들은 월간 한국수필. 월간문학. 문학나무. 월간 순수문학, 계간 현대수필. 월간 예술세계로 등단한 기성작가이며 송파여성문학인회. 한국문인협회. 미래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수필교실 개강안내 마지막 페이지 !!!

 

 

 

 

 

 

 

 

 

 

 

 

 

 

 

 

 

 

 

인사*말

 

 

내 안에 있는 향기를 찾아서

 

이 춘 자 (MBC아카데미목요수필 회장)

 

변함없이 낭독 행사에 참여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마네킹의 밝은 옷을 보니 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지요.

보리순 된장국으로 봄을 먹고, 풀 향기를 뿌려 볼까요.

좋은 차를 즐겨 마시면 차향이 몸에 베고

담배를 오래 피다보면 담배 냄새가 풍기듯

우리들은 어떤 습관의 옷을 날마다 입고 있는지요.

자신만의 향을 날마다 피우고 계시겠지요.

 

내 안에 있는 인격의 향기가 가족에게, 이웃에게

어떤 모습으로 훈습시켜줄까요.

오늘 낭독 행사를 통하여 우리들 속에 있는

파랑새도 찾고 기분 좋은 일이 있기를 원합니다.

 

자, 이제 훈습을 찾아 떠나 볼까요.

 

 

   

 

 

세한도(歲寒圖)

 

 

鄭 木 日(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부이사장)

겨울 산속의 움막 한 채-. 산은 묵언정진(黙言精進) 속에 빠져 있다.

추사(秋史)의 세한도를 본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눈보라와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최소한의 거주공간인 세한도의 움막-. 움막 한 채는 추사 자신일지 모른다. 산은 만년 명상을 가졌으면서도 겨울이면 어김없이 동안거(冬安居)에 들어 면벽수도(面壁修道)에 임한다. 초당 앞에 소나무는 어깨 죽지가 꺾어져 있다. 뒤편의 잣나무는 고개를 들고 청청하다. 귀청을 울리는 바람 속에 어깨 무너져 내린 소나무는 구부정하지만 푸른 기세는 여전하다. 잣나무는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솟아 있다. 꺾어진 소나무는 늙은 몸으로 귀양살이 하는 추사의 모습이고, 싱싱한 잣나무는 젊은 제자의 기상을 그린 것일까.

세한도는 즉흥적인 그림이다. 일체의 수식과 과장을 떨쳐버렸다. 나무들은 가진 것을 다 내놓아야 혹독한 눈보라와 혹한을 견뎌낼 수 있나보다. 겨울이면 소나무, 잣나무 등 상록수들이 독야청청(獨也靑靑)을 뽐내는 게 아니라, 시련을 견뎌낼 인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세한도는 간단명료하다. 더 이상 축약할 수 없는 세계이다. 초당과 앞뒤 편에 소나무 두 그루와 잣나무 두 그루로 삼각구도를 이룬다. 추사가 단숨에 그린 작품이다. 세 개의 공간 분할로 생겨난 여백은 침묵 속에 빠진 산의 모습이고, 자신의 사색 공간을 보여준다.

세한도는 고도의 압축과 감정의 억제를 보인 작품이다. 추사의 삶과 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자신의 유배생활의 삶과 풍경을 담아놓은 마음의 자화상(自畵像)이 아닐까.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도 청나라의 최 신간 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에서 구해와 보내준 것이었다. 그는 제자로부터 120권 79책에 달하는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받고는 크게 감격했다. 추사는 답례로 작은 집 옆에 벼락 맞아 허리 꺾인 낙락장송이 겨우 한 가지 비틀어 잔명을 보존한 형상을 그린 세한도를 이상적에게 주었다. 세한도(歲寒圖)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와 함께 김정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갈필(渴筆)과 검묵(儉墨)의 묘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문인화로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가 벼슬살이를 할 적에는 당대 최고의 명필이요, 금석학자로서 문화계의 중심인물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제주도 유배생활은 지금까지 누려왔던 여유로운 삶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추사는 삶의 겨울을 맞아 고독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뼈저린 소외를 맛보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자신의 삶과 서예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추사는 가슴이 꽁꽁 얼어붙는 듯 아픔을 느꼈다. 지금까지 중국 서체를 흉내 내는 데 급급했던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만 여겨졌다. 중국문화권에 빠져서 남의 문화를 답습하고 흉내 내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추사는 한국의 서체를 얻어내고 싶었다. 한국의 산, 강, 들판, 한국인의 성격에 맞는 선과 형태와 느낌을 담아내고 싶었다. 우리나라 자연과 민족의 마음이 담긴 서체를 창안해 내고 싶었다. 그의 가슴에선 번개가 치고 하늘을 뒤집고 천둥이 울렸다. 당대의 명필이란 허울과 명성을 벗어버리고, 우리나라 자연과 기후와 마음으로 빚어낸 글씨를 써보고 싶었다. 산 능선, 강물의 유선(流線), 기와집 초가집의 선들이 이루는 온화하고도 힘찬 맥박과 감정을 서체에 담아보고 싶었다. 민족의 기개와 흥과 멋과 마음을 꽃피워내고 싶었다. 추사 서체는 제주도 유배생활에서의 고독과 소외가 준 성찰과 자각의 소산이었다.

대화자도 없는 유배지에서 절대 고독과 명상은 참다운 예술세계의 길을 얻게 한 계기가 되었을 터이다. 예술가의 양식(糧食)은 고독과 침묵이다.

추사는 중국 명필과 서체를 익히느라고 임서(臨書)를 통한 절차탁마(切磋琢磨)로 세월을 보내온 사람이었다. 중국의 6체는 중국의 멋과 흥과 미와 중국의 자연경관과 문화전통이 어울리어 빚어낸 서체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거대한 중국문명 속에 편승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망년자실(茫然自失) 하였으리라. 그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곧 세한도의 세계임을 말해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침묵과 소외 속의 삶이다. 그는 고독과 소외 속에서 영화와 권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참 모습과 해야 할 일을 찾아내었다. 사대사상과 강대국 문화에 젖어있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깨달았다.

추사는 겨울 한파에 어깨 죽지가 꺾여 내려앉은 구부정한 몸으로 세한도의 초당에 들어 침묵의 한복판에 앉아 붓을 들었을 것이다. 막막한 바다를 바라보며 붓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세한도 초당과 소나무는 동안거에 들어 오랜 침묵 속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는 ‘유배생활’이란 설한풍(雪寒風)에 정신을 차려, ‘추사체’라는 독보적인 서체를 창안하여, 민족 서체를 내놓게 되었다.

고산(孤山) 윤선도, 송강(松江) 정철. 다산(茶山) 정약용 등이 모두 유배지에서 문학과 학문을 이룬 것은, 유배지에서의 고독과 침묵을 맞아들여 혼신의 집중력으로 독자적인 꽃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집 같은 세한도의 초당 한 채를 스스로 지어내려면, 안락과 호사만으로 안 된다. 영혼을 단련시키는 시련과 고통을 겪어낼 세월이 있어야 한다. 겨울 산속에 어깨 죽지가 부러진 소나무가 돼보아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린 침묵과 고독 속에서 마음의 꽃이 피어난다. 겨울 산 속의 움막 한 채-. ‘세한도’란 깨달음의 마음 풍경이 다가온다. 추사가 손에 붓을 든 채로 문을 열고 나오고 있다.

 

  옛 연인들

 

김남조시인 .예술원 회원

 

지난 세월 나에겐

시절을 달리하여 연인이 몇 사람 있었고

오늘 그들의 주소는

하늘나라인 이가 많다.

 

기억들 빛 바랬어도

그 각각 시퍼렇게 멍이 든

심각성 하나만은

하늘에 닿았고

오늘까지 살아 있으니

그들 저마다

어찌 운명 아닐 것인가.

 

그 시절의 여자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손뜨개 털장갑을 선물했으나

나만이 그거나마 단 한 번 못했으니

오랫동안 그 분들

손시려웠을지 몰라

빌고 비오니

그저 영혼 따뜻하게들 계시고

후일 우리 만나거든

그 옛날 장마비처럼 그치지 않던

눈물 얘기도

부디 미소지으며

나누게 되기를 ......

월간한국수필 2월 권두시수록 작품

 

  

사랑에 안식처를 삼지 않았다

 

권남희

 

일 중독자인 그를 존경했다. 책임감 강하고 일에 열중인 그를 보면 대단하고 완벽해보여 나의 부족한 부분을 그의 것들로 채워도 되지 않을까 달콤한 상상을 했다. 나를 아껴준다 했으니 내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고 그의 꿈인 세계일주 여행을 하면서 맛있는 요리를 사주고 그러하리라. 일을 그토록 많이 하고 통장으로 들어오는 인세만 해도 엄청나지 않은가.

그는 내가 허약해 보이지 않건만 내가 만약 아프게 된다면 자신의 장기를 기꺼이 떼어주겠다 호언장담했고 무언가 나를 위해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너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은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의 집안에 사고가 터졌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여 그에게 달려갔을 때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허둥대다가 ‘그런 것은 은행에서 뽑는 것 아니냐’며 시치미를 뗐다. 그는 그저 몸이 부서지도록 일만하는 ‘workaholick'이었을 뿐이었다.

내 존재는 그가 쉬는 시간에 마시는 커피 한잔이었을까? 일하는 틈새 무료함을 메우는 ‘잠깐의 행복'이었다. 빈틈없는 그에게 나는 틈이 너무 많아 삶이 지루할 때 쐬는 신선한 바람이었다. 건강한 나는 아프지도 않아 그가 준다는 그의 장기도 받지 못한 채 ’ 스크루지에 돈을 사기당하면 당연한 업보라‘며 치를 떨고 그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를 배운 게 있다. 자기 일을 하는 것이었다.

사랑도 일이다. 일도 사랑이다. 나의 빈틈은 일로 채우고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독립적이고 경제적으로도 홀로서는 방법을 그를 통해 배운 것에 감사한다. 커피 한 잔 마시는 틈틈이 그를 생각한다. 그가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오쇼 라즈니쉬의 『틈』중 ‘존재의 틈’ 패러디-

 

나를 놓아두는 시간

                                                   전 수 림

  지난 가을, 걷기 좋은 날들은 뜬구름처럼 흘려보내고, 추운겨울이 돼서야 찬바람 몰아치는 강가를 걷기 시작했다. 털끝하나 보이지 않게, 눈밭에 굴러도 얼어 죽지 않을 만큼 꽁꽁 싸매고 열심히 강가를 오르내렸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던 올 겨울. 겨울이 깊어지면서 강물은 얼음으로 뒤덮어갔다. 그 위로 눈이 쌓이고 햇살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처음엔 운동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의무적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걷다보니 한낮의 짧은 볕을 쬐는 일도, 눈밭을 사각거리며 걷는 것도, 그 위에 발자국을 내는 것도 모두 유년의 그때처럼 그냥 좋았다. 그 시간만큼은 쫓기듯 초조하게 살던 일상과는 다르게 나를 온전히 놓아두는 시간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시간되는 대로 열심히 걸었다. 씽씽 불어대는 바람을 등지기도 하고, 마주하기도 하면서 겨울과 부지런히 부대꼈다. 거칠고 차가운 바람이 내 안을 휘돌아 나가면 한결 부드러워지는 자연의 향기도 느껴졌다. 안개가 낀다거나 구름을 잔뜩 머금은 날은 실루엣처럼 꽤나 몽환적이다. 그것은 마치, 잘 그린 수채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이십 분쯤 걸으면 땀이 났다. 그때는 찬 공기가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까. 이번 겨울이 정말 추웠다고들 하는데 고백하자면 나는 '정말 그렇게 추웠나?' 싶을 정도로 추위를 모르고 지냈다.

  정말 춥다고 하던 날에도 나는 강으로 나갔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있었다. 해가 머리 위 어디쯤 떠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곧 눈발이 흩날렸다. 늘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그 엄청난 자연의 존재감. 마른가지 위로 참새 떼들이 몰려들고, 자맥질 하는 겨울철새가 어제와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도 그곳에 마음 한 자락을 얹어본다. 편안하다.

  강은 내게 날마다 새로운 캔버스와 같다. 수없이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지울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내 자신과 가장 밀접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은 따뜻함과 여유로움으로 내 안에 머문다. 하루를 생각하고, 한 달을 생각하고, 일 년을 생각하는 계획의 시간. 앞으로는 좀 더 폼 나게 자주 서성이며 넓은 대지위에 나를 놓아두려 한다. 마음이 하얗게 바래질 때까지.

 

 

 

 

역경이 만드는 습관

이현숙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안일을 도와주던 할머니가 딸네 집으로 갔다. 우리 딸이 낳기 한 달 전에 와서 11년간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며 아이들을 키워줬다. 우리 아이들은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보다 이 할머니를 더 좋아하며 따랐다. 할머니가 간 후 파출부를 둘까 했지만 아이들이 싫다고 하여 그냥 살았다.

직장 생활하랴 살림하랴 갑자기 바빠졌다. 자연히 아이들 돌보기가 힘들어졌다. 저녁 먹고 설거지 하려면 아들은 교과서를 들고 와 받아쓰기 숙제가 있다고 불러달란다. 나는 귀찮아서 “그냥 책보고 아무거나 써.” 하며 설거지를 계속했다.

과학 독후감 써야 한다고 어떻게 쓰냐고 하면 “그냥 앞에서 조금 베끼고 뒤에서 적당히 골라 써.” 했다. ‘남의 아이들 가르치느라 지쳐서 내 새끼는 다 망치는구나.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오히려 아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다. 부모에게 해달라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웬만한 건 혼자서 다 해결한다. 남편, 나, 딸이 모두 일찍 나가버리면 혼자 일어나서 과일 먹고 등교한다. 점심 때 하교하면 누나는 도시락 싸가니까 빈 집에 혼자 와서 라면도 끓여먹고 계란 프라이도 해먹고 김치에 참치까지 넣어 비빔밥도 해먹는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어떻게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역경이 오히려 자립심을 길러준 것 같다. 누나와 2년 차이 밖에 안 나니까 방학 때도 실컷 놀다가 개학이 다가오면 누나 방학책 갖다 놓고 날씨 모조리 베끼고, 그림일기도 누나 것을 보고 말만 조금 바꿔서 그대로 베껴간다. 매사에 요령껏 잘 헤쳐 나간다. 좋은 환경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려운 환경이 오히려 자극제가 되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가끔 TV에서 소년 소녀 가장이 나오는 걸 본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도 놀랄 정도로 꿋꿋하게 가정을 이끌어가며 잘 살아간다. 역경을 잘 활용하면 더 좋은 습관을 기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군자

문 장 옥

 

옛 선인들의 정신이 깃든 붓과 먹 향기가 좋아 사군자를 배운 적이 있었다. 벼루에 물을 약간 부운 후, 먹을 삼십여 분쯤 갈면 걸쭉한 먹물이 벼루의 오목한 부분에 모이게 된다. 갈아 놓은 먹물 아래에 화선지를 놓고 난초의 첫 잎부터 그리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그리기에 소질과 취미가 있었지만 붓글씨를 쓰던 붓털로 먹물을 묻혀 가지런히 붓끝을 모아 난초 잎을 치려니 그리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선생님께서 화선지에 기본 잎 모양을 그려 주셔서 처음으로 붓 자락을 들었는데 길 잃은 지렁이 형상으로 흐느적거렸다. 나는 하늘거리는 붓털로 생동감이 느껴지는 난초 잎이 탄생되기까지 한 달이 넘게 잎을 그리고 그렸다. 선생님의 그림을 보고 또 보며 닮기를 바랐더니 나도 모르게 오른 편으로 두 잎, 왼편으로 한 잎의 날렵한 난초 잎사귀가 시원스레 뻗어 있었다.

세 잎의 난초는 곧 이어 꽃대를 세우고 꽃대는 꽃망울과 활짝 핀 꽃잎까지 달았다. 그 뿐이 아니다. 좌우로 서너 잎들이 더 그려져 번성해 나갔다. 그러나 암벽과 조화를 이루는 귀하디귀한 난초로 거듭나게 되기에는 6개월의 세월이 걸렸다. 난초에 이어 매화나무를 그리게 되었는데 난초를 통한 습작 탓인지 두 달 만에 용틀림하듯 굵직하면서도 비스듬이 휘어진 매화 고목나무 가지마다 꽃봉오리와 꽃이 제법 생기를 띄게 되었다. 이어서 대나무와 국화까지 그리기 기법을 배워 전시회에 출품할 세 편의 작품을 완성할 수가 있었다.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을 보면서 오랫동안 난초와 씨름하던 시간을 인내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나 돌이켜보니 벼루 속에 갈린 먹향기와 나와 같은 생각으로 사군자를 그리는 동우들의 격려의 힘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화선지와 대면하고 붓을 들어도 쉽사리 향기가 느껴지고 살아있는 듯한 난초의 모습은 그릴 수가 없다. 사군자를 그리는 문인화가 중에 평생을 오로지 난초만 그리는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한 번 잡은 붓을 일찍이 놓았기에 그런 것이리라. 쉽게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동양화야 말로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끊임없는 열정과 추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배운 사군자를 통해서 알았다. 손과 마음이 사군자를 다시 부르게 되면 사군자를 배웠던 옛 스승과 동우들 품으로 돌아가리라.

 

 

원초적 본능

허해순

 

올 해는 오곡밥이나 약식대신 찰밥을 했다. 가을에 팥과 함께 동부콩과 울타리 콩을 섞어 얼려두었다. 밤과 은행, 대추까지 넣고 맛있게 쪄냈건만 아이들은 물만 먹고 나간다. 속설에 대보름날 찬물을 마시면 더위를 탄다고 했는데... . 오곡밥과 아홉 가지 묵은 나물을 김에 싸서 먹는 복쌈을 아홉 번 먹어야 한다는데 개 보름 쇠 듯 하는 식구들을 보며 김이 빠진다.

동이 트기 전, 담 너머로 이웃집 아줌마가 내 이름을 부르면 “네 더위!”하고 외치는 우리 엄마 대응이 눈을 비비며 마당에 나가는 나보다 더 빨랐다. 보름날에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지 말고 “네 더위!”라고 대답해야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더위팔기 놀이다. 담 너머로 “호호, 하하” 웃음소리 넘치고 하루 종일 동네방네 다니며 밥이며 나물이며 부름을 먹다보면 족히 아홉 번은 넘었으리라.

어디 동네방네 나누는 음식이 오곡밥뿐이랴. 정월 초하루부터 하루 종일 세배 다니며 먹던 세찬상을 필두로 이월 초하룻날에는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하고 삼짇날에는 꽃전 부치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볶아 놓은 콩가루는 쑥인절미를 만들고도 남아서 나는 두고두고 밥을 비벼 먹었다. 일명 구정물통인 길쭉한 오지항아리에 음식찌꺼기를 모아놓으면 돼지 기르는 사람들이 와서 가져가는데 답례로 미나리를 듬뿍 가져다준다. 미나리강회나 미나리 초대, 미나리나물, 황포묵과 함께 무친 탕평채까지 다양하게 만들어먹었다. 삼복중에는 삼계탕과 육개장, 닭과 참깨국물로 시원하게 맛을 낸 임자수탕, 닭 국물에 칼국수와 호박을 넣고 끓인 백마자탕, 밀전병을 함께 먹으며 더위를 이겨냈다.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고 토란탕과 햇과일로 다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고 나면 모과와 석류가 익어가고 국화가 피기 시작한다.

여고시절, 동짓날에 놀러 온 친구가 팥죽 쑤어 놓은 우리 집 솥단지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절식 풍속을 생략하고 사는 이 친구네는 양식을 일찍 받아들이고 핵가족중심으로 간편하게 산다. 합리적이고 생활면에서 앞서가서 내심 본받고 싶은 점이 많았다. 팥죽을 한 냄비 얻어가면서도 새알심을 나이대로 넣어주는 나에게 미신이라고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핀잔으로 보였다. 맏며느리인 그 친구는 훗날 중년으로 나이 들어가는 길목에서, 그 때 그렇게 많이 쑤던 팥죽이 낭비라고 생각했으나 엄마란 그렇게 넉넉하여 푸근한 존재여야 한다며 우리 엄마가 자기에게 깨달음을 많이 주었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친정도 제사횟수나 가짓수도 줄였지만 엄마는 명절이나 시제를 빼고도 봉제사를 열 번도 넘게 지냈다. 엄마는 그 많은 제사도 마음을 정결하게 갖고 음식재료도 뭐든지 제일 좋은 것으로만 했다며, 오늘날 자식들이 이만한 것도 다 조상님을 잘 받들었기 때문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다달이 있는 제사 덕에 젯밥을 풍성히 얻어먹고 컸지만 나는 그 길을 따르지는 못하겠다. 내 시댁은 종가가 아니고 시아버님 기일도 추도예배로 지낸다. 그래도 명절이나 삼복중의 기일은 내 노동력을 무한히 요구한다. 어머님도 시간밥을 지킨다. 마음이 요동칠 때, 연암가문 종부의 한 말씀을 되새긴다. 종가를 지키며 그 많은 행사 준비로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힘들지만 내 식구들 먹이는 일인데요.” 꾀부리지 않고 우리 식구들 먹을거리를 챙겼다는 점은 나도 우리 엄마같이 자부심으로 남도록, 먹는 것만으로도 내가 보고파지도록 해야겠다. 함께 먹던 밥상에서 정을 느끼고 또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 본능 아니던가!

 

 

멈출 수 없는 곳

 

이남수

 

쿵쿵 울려대는 심장박동을 들으며 나는 오늘도 부지런을 떤다. 영하의 날씨에 주춤도 하련만 반짝이는 눈망울들이 폭설을 녹이는 곳이 있다. 아름다운 마음과 마음이 모여드는 정겨운 곳이다. 잠깐 주춤했다가도 상생하는 힘을 가진 곳으로 내 마음과 몸은 달려가고 있다.

퇴색되어가는 하얀 머릿속에 무지개빛 그림을 그리며 황홀함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쓰고, 읽고, 듣고’ 하면서 삶의 의미를 깨달게 된다. 그곳에 진한 향기와 여유가 있어 나는 멈추지 못하고 습관처럼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늘 느긋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열정적이지 못한 삶을 살았던 내가 가보지못한 길을 가며 환희를 느낀다.

젊은이들이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 비몽사몽 하는 지하철 속에 끼여 좁은 자리를 차지한 듯한 노파심에 미안해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나도 가야만 한다. 미안한 마음은 아무도 모르게 꼭꼭 감춰놓고 용기를 낸다. 일본 시인 ‘시바타도요’ 100세의 할머니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약해 지지마. 인생이란 지금부터야.’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벌써 밖에서는 땅을 뒤집는 소리가 들린다. 포근한 아지랑이 냄새가 퍼지는듯하다. 퇴색되어 떨어진 잎사귀 사이로 햇살을 잡아끄는 희망이 보인다. 손에 들은 가방 속에서는 연필들이 달그락 달그락 봄 이야기를 하나보다. 서둘러야겠다. 그 곳에 가서 봄을 그려보아야겠다.

 

 

 

낼 모레 칠십

김은순(수향)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을 타면 별 이변이 없는 한 좌석엔 앉지 않는다. 피곤하고 지친 또는 나보다 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앉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구십이 가까우신 어머니가 지하철을 타면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자리를 양보해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간혹 아주머니나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모른 척 눈을 감고 있을 때가 있다고 한다. 요즘 자주 지하철을 타고 치료 방을 다니시는 어머니는 미안한 마음에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을 피해서 서 계신다고 한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하고 말하며 일어난다고 한다.

얼마 전 어머니와 함께 지하철을 탔다. 어머니는 자리에 앉으셔서 옆 좌석이 비었다고 큰소리로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그러자 어머니가 보기에 나보다 한층 젊어보이는 아주머니가 냉큼 그 자리에 앉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원, 내 딸은 환갑이 넘었어도 자리에 앉지 않는데, 요즘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몰라……, 내 딸은 어른 앉으라고 자리에 앉는 걸 못 보는데….."

큰소리로 나를 부르는데도, 딸보다 젊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앉자 마음이 얹잖으셨던 모양이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저도 오십이 넘었어요."

어머니는 한층 더 큰 목소리로 "내 딸은 낼 모레면 칠십 이유! 그래도 자리에 앉지 않잖우. 요새 젊은 사람들은 왜 그리 어른 공경 할 줄을 모르는지……원!"

나는 민망해서 어머니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모른 척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엄마 왜 그래?"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 하니 "뭐가 창피해, 요새 젊은 것들은 통 염치가 없어," 하시며 "넌 참 좋은 습관인 게야.., 어디서든 저보다 나이든 사람을 위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습관은 내 딸이 지만 정말 칭찬해 줄만해." 하신다.

좋은 습관이라니, 그것도 좋은 습관인가? 어머니 눈엔 그저 자식이 예쁘게만보일 터이다. 어머니 칭찬 일색에 앞으로는 더욱 자리에 앉지 못할 것 같다. 힘들이지 않고 어른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해주는 무의식 중에 작은 습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향에 중독되다

 

이 춘 자

 

피천득 기념관에 가면 기분이 좋다. 여러 문우들과 격의 없는 대화와 서평을 받다 보면 창작에 대한 의욕이 생긴다. 내가 피천득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국어 교과서를 통해서이다. 나도 마흔이 넘으면 꼭 수필을 써 보겠다고 다짐한 때도 있었다. 그동안 어영부영 생활에 메이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두 번째의 만남은 롯데 민속 박물관 피천득 기념관이다. 목요일은 문우가 봉사하는 날이라 자연스럽게 방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기념관에는 선생님이 생시에 쓰시던 물건, 선생님의 일대기(역사), 침실, 서재, 서영이 인형, 책이 전시되어 있다. 자그마한 체구의 선생님 동상 옆에 가만히 앉으면 ‘인연’이 떠오른다.

아사코와의 두 번의 만남이 있었고 세 번째 시든 백합꽃이 되어버린 여인과의 만남은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선생님의 고백. 나는 선생님과의 만남은 없었어도 생각이 남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아니 만나야 할 세 번째의 만남은 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사코보다 인연이 더 깊은 것 같다. 선생님의 유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나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의 은은한 미소에서 어린 아이 같은 고운 심성을 느낀다. 금방 찬물에 세수를 한 스무 살 오월의 청년과 팔 장을 끼고 숲길을 걷는다. 청자연적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향기가 베어나는 선생님의 글을 훈습 받고 싶다. 나는 오늘도 피천득 기념관으로 잰 발걸음을 한다. 어쩜 선생님의 향에 중독 되었나보다. 나도 문우들도.

 

 

 

또 다른 나 수필작가

유영희

"무작정 글이 좋아 아무대나 갈겨쓰고 옮기고......

 

문자 메세지가 왔다.

" 유사장 아니 유작가 올해가 가기전에 밥 한번 먹어야지"

어느새 작가가 되어있는 내 위치를 확인하며 빙그레 웃음을 지어본다. 거창하진 않지만 작가 친구를 뒀다는 그네들의 자랑거리가 있어 나또한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는게 나쁘진 않다. 누구나 할수있을지는 몰라도 누구나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세번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그 세 가지 기회를 다 이루는 사람도 있고 다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꿈이 작가는 아니었지만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한 한가지 소망은 이뤘으니 한번의 기회는 잡은 셈이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늘 가슴에 있었다

처음에 수필 교실에 등록하고 카페에 가입 인사가 생각난다. 그랬다. 무작정 좋아 시작한 글쓰기였다. 그 글쓰기가 수필인지 모르고 국어 시간에 배운대로 붓가는대로 쓰는 글이라 생각했다. 흔히들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감성이 풍부하다고 한다.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외로움도 많이탄다. 누구에게나 외로움은 있지만 그 외로움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소화하느냐가 문제인데 사람마다 각자 표현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하다.

혼자만의 독백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외로움이나 신세한탄을 글로 쓰다보니 신변잡기라는 말도 많이 하게 된다. 이런 신변잡기 얘기를 글로 표현할수 있다는것 또한 쉽지않은 작업이다. 수필은 신변 잡기가 뿌리다. 일상의 신변 얘기를 머릿속에 생각만하다 글로 써서 맛깔스럽게 양념을 넣어 독자들로 하여금 같은 공감을 얻고 같은 얘기라도 다르게 표현되는 묘미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수필이 진정한 진실만을 얘기하는 건 분명 아니다.

주위에서 수필작가라고하면 그냥 쉽게 받아들이는 게 아마도 사실 위주의 얘기를 쓰고 누구나 쉽게 접하고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물건에 대한 희소가치를 따지듯 시나 소설은 수필에 비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작지만 대표라는 명함을 가졌다. 그리고 서른이 끝날 때 쯤 작가라는 또 하나의 명함을 얻었다.

  나에게 붙는 다른 직함들로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팔짝 거리고 뛰었다. 비행기를 타고 바깥 세상 구경도 하고, 폼나게 차려입고 근사한 밥집에 가서 우아한 포즈로 밥도 먹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산다.

그러나 나는 나일뿐이다.

아무리 우아하게 밥을 먹어도 집에 와선 김치를 먹어야 했고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도 나는 시골구석의 촌 가시내였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어딘가에 그리움과 외로움은 간간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게 나일까? 나였다. 그런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친구는 글을 쓰는 거였다.

 

 

 

 

사랑으로 웃음을 사다

 

이 해 정

 

나는 웃지 못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 이 말을 들으면,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나도 내가 웃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몇 년 전 가족사진을 찍을 때였다. “어머니, 증명사진 찍는 거 아니에요. 활짝 웃으세요.” 사진사가 아무리 웃으라고 해도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해야 웃는 얼굴이 되는지 알지 못했다. 당사자인 나와 사진사는 물론 가족들까지 진땀을 빼고서야 겨우 가족사진 한 장을 얻을 수 있었다. 활짝 웃는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 이가 드러나게 입을 벌린 어설픈 나를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는 표정연기를 해야 하는 사진 따위는 찍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은 또 오고야 말았다.

아이들의 혼사 때였다. 아무리 사진이 찍기 싫어도 신랑엄마가 신부엄마가 사진 찍기를 거부 할 수는 없었다. 눈을 질끈 감는 수 밖에.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진사의 주문은 똑같이 이어졌다. “어머니 웃으세요.” 그러나 먼저 가족사진을 찍으며 혼찌검이 난 나는 아예 백기를 들었다. “나 웃을 줄 몰라요. 적당히 찍어 주세요.” 필름 속에 잔뜩 우그러져있는 혼주의 얼굴을 펴느라 사진사들이 고생을 좀 했을 터였다.

내가 웃지 못하는 것은 평소에 잘 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잘 웃지 않은 것은 염세적인 성격에 그 뿌리가 닿아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엄마는 조금 좋다고 헤헤거리고, 조금 나쁘다고 징징거리면 사람이 가벼워서 남들이 우습게보고 오던 복도 달아난다고 하셨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진중하게 처신해서 태산 같은 무게를 지녀야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그러나 나는 큰 사람이 되지 못했고, 세상은 바뀌었다. 자기를 표현하고 남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대접 받는 세상으로.

  요즘에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잇몸까지 들어내고 온몸을 흔들며 활짝 웃는 이를 볼 때는 함께 웃어주고 싶었다. 웃는 얼굴은 다 예뻤고, 다 행복해 보였다. 잠시 나까지 행복해 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끝은 언제나 苦笑였다. 그렇게 웃을 수 없다는데 대한 자괴감과 그들처럼 행복하지 않다는 자격지심에 내 입가에는 쓰디쓴 고소가 흘렀다.

이런 내가 요즘 웃는 법을 배워 익히고 있다.

단골미장원에서 머리를 하고 나니, 미용사가 기념사진을 찍어 벽에 붙여 놓겠다고 카메라를 들이 댔다. 예외 없이 내 표정은 굳어졌다.

그녀라고 다를 리 있겠는가. “사모님 웃으세요.” 제법 친숙한 그녀에게 장황한 사정설명이 이어지자 “사모님, 손녀 생각을 하세요. 손녀 이야기 하실 때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어요.” 그렇게 얻은 사진 속의 내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제야 나는 웃음의 원천이 어디이며 웃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사랑이며, 사랑을 기억하고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나른한 봄 햇살이 비치는 TV화면에 얼룩이 가득하다. 길게 난 손가락자리와 뭉툭한 손바닥 자리로 TV화면은 판화라도 찍어 놓은 듯하다. 웃음이 저절로 난다. 고 사랑스러운, 작고 통통한 손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물걸레로 닦고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마른걸레질을 하는 내 어깨 짓이 추임새라도 넣듯 흥겹다. 약속된 2주 뒤에 손녀가 왔다 가면 나는 이일을 또 하게 되리라. 열 번이면 어떻고 스무 번이면 어떻랴, 이리 흥이 나는 걸.

나에게 절대 사랑을 웃는 법을 알려준 손녀는, 나의 가장 큰 스승이다.

  

 

 

행복을 주었던 설 풍습

윤 중 일

내 나이 열 살 그 언저리, 아버지 살아 계시던 때는 명절 때마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던 곳으로 차례를 지내러 다녔다. 아버지는 한복을 갖춰 입고 갓을 쓰고 허리엔 담뱃대를 찌르고 다니셨다. 아주 먼 길은 아니었지만 산을 넘고 고개를 건너 산소까지 걸어가는 그 걸음이 나는 신나고 즐거웠다. 차례를 지낼 때는 문중의 친척들이 수십 명이 모여 시끌벅적 했다. 차례가 끝나면 바로 인근에 윤가 집성촌인 마을로 내려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항렬이 높던 나는 육십 대의 할아버지뻘 되는 조카들도 여러 명이었다. 육십 대 조카님은 나를 보고 “아제 오셨능교.” 라며 인사를 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또 다른 조카님은 “아제요, 작년보다 많이 컷네요.” 라며 웃었다. 나는 괜시리 겸연쩍긴 해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차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어른들께 세배를 드렸다. 살기가 넉넉지 않던 시절이라 세뱃돈을 받아 본 기억은 없고 집집마다 어른들은 덕담을 해 주시고 쌀, 콩, 검은깨 등을 조청에 버무린 한과를 내 놓았다. 우리들은 복조리를 팔러 다니기도 하고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윷놀이를 하고 농악대는 꽹과리를 치며 집집마다 지신을 밟으며 춤을 추기도 했다. 배고프던 그 시절도 명절만큼은 새 신발을 신고 새 옷을 입고 신나고 행복했다.

도시에 살면서부터 한 번도 이웃끼리 세배를 다니거나 받아 본적이 없다. 막내인 나는 위로 형님이 세 분이 계셔도 이제는 나이가 들고 보니 형제들마저 함께 모여 산소에 차례 지내기가 쉽지 않다. 큰형님내외가 기독교를 신봉하고부터 차례를 지내지 않고서다. 제 각각 자식들에게 세배를 받고 끼리끼리 모여 명절을 따로 보낸다. 아이들은 하루 밤 묵고 세배를 하고나면 처갓집으로 달려가기 바쁘다. 올해 설처럼 긴 연휴에는 이래저래 명절이 평일보다 지루하고 쓸쓸하다.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여 윷놀이도 하고 화투도 치는 집들을 보면 부럽다.

아들과 손자들을 전부 데리고 부모님 산소에 차례 지내러 가기가 참 쉽지 않다. 고향마을에 친척들이 살지 않은 탓도 지만 길이 멀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는 공부 탓으로 돌렸고, 직장에 다닐 때는 직장 탓으로 데리고 다니지 못했다. 이제 짝을 지워 다 내보내고 나니 처갓집으로 내달리기 바쁘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소에 차례를 지내지도 못하는데 손자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 없는데 그들은 조상을 어떻게 모실까 걱정이다.

 

 

 

 

 

 

온전히 내 뜻대로

 

안 혜 영

 

세상의 많은 글 위에 또 한 편의 잘 쓰지도 못한 글을 보태어서 무엇 하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멋진 글을 잉태할 사건이 일어나 주길 바라며 10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일어나기는커녕 삶은 점점 더 단순해지고 머리는 갈수록 둔해져만 갔습니다.

이러다 돋보기 없이는 글도 안 보일 나이가 되어 버리겠다는 조바심이 졸작이라도 쓰게 하는 채찍이 되어 보잘것없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글 쓰는 일만은 온전히 내 뜻대로만 되는 일이더군요.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계속 정진해 나가는 것, 그리 용서받지 못할 일은 아니겠지요?

 

 

어니스트처럼

 

이강순

 

얼굴은 그 사람의 성별, 나이, 교양, 성격, 건강, 심리상태 등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다. 가장 간편하고 완전한 신분증이라 한다. 정말 그럴까?

얼마 전 중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자주 만났던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육칠 년 만에, 또는 십여 년 만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이도 있었다. 오랜 공백을 깨고 만난 친구들, 순식간에 ‘00야, 00야,’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들과 맺어진 추억이 같아서일 것이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조용한 곳에 가서 차를 마시면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당연 함께 공유하던 교실 속 이야기였지만 그들의 모습과 언어 속에서는 현재 삶의 모습을 언뜻언뜻 엿볼 수 있었다. 무엇이라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서 묻어나는 이미지가 그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브라함 링컨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나이 마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이다. 동양에서는 흔히들 불혹(不惑)이라 하여 어떠한 유혹에도 현혹되지 않은 연배로 생각하기도 한다.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이제 인생의 중추적 연령에 들어선 만큼 자신과 남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일 게다.

새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벌써 2월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인격이 되고, 인격이 인생이 된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다시금 곱씹는다. 그리고 나는 나다니엘 호오도온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어니스트를 생각한다.

<어니스트는 자기의 마음속 생각을 청중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말은 자신의 사상과 일치되어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자기의 일상생활과 조화되어 있어 현실성과 깊이가 있었다. 이 설교자가 하는 말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생명의 부르짖음이었다. 그 속에 착한 행위와 신성한 사랑으로 된 그의 일생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아름답고 순결한 진주가 그의 소중한 생명수에 녹아 들어간 것 같았다. 읽고 또 읽어도 변함없는 감동을 더해주는 '큰 바위얼굴' 마지막부분이다. 어니스트가 큰 바위얼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조화로운 그의 삶이었다.

  

 

청소하는 습관

 

이영숙

 

5남 2녀 중 막내아들이 나의 남편이다. 남편이 어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제일 큰 형님이 80이 넘으셔서 이제 산소를 정리 하여 화장을 하려나 보다.

어머니는 38세에 혼자 되셨다. 열 여섯 살에 혼인을 했으니 결혼생활을 20년정도 하신거다. 시아버님이 사업을 하셨다. 그때 당시에 무역을 하시어 돈을 많이 버셨다. 아들 많이 낳고[그 시절에는 아들 많으면 최고] 남편사랑받으며 복 많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셨다. 육이오 전쟁후, 일사후퇴때 갑자기 남편을 잃었다. 어린 자식들이 많은데다 막내가 3살이었다. 고생한 이야기는 새댁때인 나에게 단골 레퍼토리였다. 재방송에 질린 나는 " 그만 좀 하세요 수십번 들었어요"해도 얼마나 한이 많은지 다음에 또 하시고,하시고 하였다. 어머니의 이야기:"큰 한옥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웬 날벼락인지. 남편이 죽었는데도 이불을 머리에 이고 자식들과 피난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슬픈줄도 몰랐단다. 피난 가서 하도 배가 고파 다이아반지를 떡장수에게 손가락에서 빼주고 떡을 먹기도 했단다. 배가 고프니까 눈에 뵈는게 없더라. 피난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집에 있는 물건들을 많이 처분 했는데. 맨나중에는 느이 신랑 고등학교 입학 때에 아끼던 화초장을 넘겨주고 등록금을 마련했단다"

"누가 복 많다는 소릴 하거들랑 그런말 하지 말라고 해라. 나봐라.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시며 이야기의 마무리를 하셨다.

어머니는 막내아들네인 우리집에 오시면 일주일이나 이주일정도 머물다 가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쓰레받기를 들고 빗자루로 온 집안을 쓸고.

식사는 반공기정도 드시고, 반주로 소주 2,3잔정도 드시고는 쉬신다.

1시간정도 쉬신 다음, 하얀 걸레를 들고 온 집안을 걸레로 닦는다.

점심을 드시고는 3시쯤 또 쓸고 닦는다. 저녁 드시고 자기전에 마무리로 쓸고 닦는다. 걸레를 하얗게 빨아서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어놓아야 하루의 일과가 끝나 주무신다.

손님들이 많이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 인사도 잘 안하시고 무슨 미션을 수행하는 것처럼 빗자루부터 잡는다.손님들 때문에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꼭 걸레로 닦고 주무신다.

그 때는 그랬다. 왜 저렇게 청소에 집착을 하실까.

어머니께서 감기가 들었는데 혀가 자꾸 말려서 큰병원으로 가신다고 큰댁에서 연락이 왔다. 큰형님 말에 의하면 병원가시는 날도 이불을 털고 당신방을 쓸고 걸레로 닦고 가셨단다.

병원에서는 폐렴으로 판명이 났고 방청소까지 하고 가신 어머니께서는 집에 못오시고 열흘만에 돌아 가셨다.

그때 연세가 83세였다.

어머니의 걸레질은 하고나면 개운한 맛을 즐기시고, 몸을 많이 움직이니까 호리호리 하셨다. 뼈도 튼튼하여 허리 아프다는 소리도 못 들었고 자세가 꼿꼿하였다. 식사때마다 조금씩 드시는 술로 혈관을 튼튼하게 유지한 것 같다. 어머니의 청소하는 습관이 어머니를 병마에 시달리지 않고 편하게 돌아가시게 한것 같다.

 

 

 

 

 

삶속을 걷다.

이선영

 

왕복 8차선 도로에 접해 있는 인도는 차 두 대도 너끈히 지나갈 만큼 넓다. 넓은 인도를 나 혼자 걷다보면 휑뎅그렁하기까지 하다. 폭신폭신한 산책로라서 걷는 느낌은 좋지만 피할 수 없는 매연을 맡으며 겨울마스크라도 쓰고 올 걸 후회를 한다. 주말엔 꼭 마스크와 워킹화를 사야지 다짐을 한다. 비스듬한 햇살이 캡모자 밑을 자꾸만 파고 든다. 폼 나는 썬그라스도 하나 사야지. 이왕 살꺼 나도 명품으로 장만해 볼까? 가격이 얼마나 할까? 가격은 K가 잘 알지. 근데 K는 왜 약속마다 딴지를 거는 걸까? 왜 항상 불평불만 투성이일까 작은 한숨이 쉬어진다.

가락시장 옆길은 좁고 울퉁불퉁하다. 가로등과 담장과 가로수가 내가 먼저 있었다며 한 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고 앉아 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할머니 여럿이 바구니를 내놓고 담벼락 밑에 앉아있다. 꼭지주위를 둥그렇게 파낸 늙은 호박 한덩이, 이리저리 썩은 곳을 도려낸 고구마 한바구니, 이런저런 과일을 섞어 한바구니, 고구마 줄기 한소쿠리를 내놓고 무심히 시선을 던지고 있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허리를 굽혀 고구마를 이리저리 살핀다.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너면서 할아버지가 고구마를 사줘야 할 텐데 생각이 지나간다. 할아버지는 집에 가서 좋은 물건 싸게 사왔다고 아내에게 칭찬을 듣고, 물건 파는 할머니는 손자에게 만원 짜리를 척척 쥐어주는 멋진 할머니의 모습으로 그려본다. 시장의 사람들은 얼굴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양재천 다리를 건넌다. 하천 바닥의 돌들은 시꺼먼 물때가 끼어있다. 회갈색 부유물들이 이름 모를 물풀에 엉겨 붙어 이리저리 몸을 흔든다. 탁한 물은 작은 둔덕을 일부러 세차게 뛰어내리며 돌에 부딪쳐서 때를 벗겨낸다. 도심에서 살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다. 학교를 마친 여고생 둘이서 종알종알 얘기하면서 걸어간다. 학창시절 나도 j와 40분 넘는 거리를 일부러 걸으며 서로의 모든 걸 나눠가지려 했었다. 3층집을 지어 한 층씩 살자고 하였는데, 매일매일 얼굴 보며 같이 아이 키우고 같이 늙어가자고 하였는데, j는 가혹한 운명을 견디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어 몇 년째 끈질긴 싸움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기는 한 걸까?

수서역의 번잡한 사람들을 조심조심 피하며 걷는다. 향긋한 커피냄새에 한눈을 팔다가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힌다.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며 다시 걷기에 몰두한다.

작은 산 옆을 지난다. 달리는 차가 바람을 만들지 않을 때마다 낮은 산자락 밑으로 나뭇잎 썩는 냄새가 스며나온다.

본능처럼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신다. 나무는 어쩌면 썩어가면서도 저렇게 향긋한 냄새를 내는 걸까?

풀을 벨 때 나는 시원한 냄새, 그리고 썩은 낙엽에서 나는 깊고 축축한 냄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냄새이다. 마스크를 쓰고 왔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횡재이다. 5년전 줄기차게 다녔던 S의료원 앞을 지나고 드디어 아이가 있는 남편 회사가 보인다. 1시간 45분을 걸었다. 안에서 나는 열로 나의 손은 기분 좋게 따뜻하다. 양말을 삐뚜로 신었는지 바느질자국이 새끼발가락을 성가시게 하고 있다. 내일은 도톰한 양말을 신고 등산화를 신어야겠다. 새침데기 K에게 전화를 해 다시 약속을 잡아야겠다. 살짝 부딪힌 낯선이에게 따뜻한 눈인사를 건넨다. 당장 컴퓨터를 켜면 줄줄줄 명문장이 쏟아질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내 안에 켜진 불이 꺼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갈무리하여 가두어 두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찾아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 오른다.

 

 

용왕님이 돌보사

-박위순-

 

어릴적 내 고향엔 우물이 귀했다. 집에서 제법 먼 거리에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새벽에 솟아오르는 정화수가 어머니의 위경련에 좋다기에 제일 먼저 길어 올때나, 물이 떨어져 꼭 필요할때 사용하는 우물이다. 그곳에서 신작로를 건너 초등학교 정문 옆 일본인이 집 지어 살았던 교장 관사에 우물이 있었지만, 학생들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북쪽으로 더 멀리에 금융조합 마당에는 지붕이 있는 우물이 있었다. 오래된 잎 넓은나무들과 등나무에는 보라빛꽃이 피었고 여름엔 그늘이 시원했다. 그 금융조합은日制때의 건물로 목욕탕도 있었다. 그저 물을 데우는 큰 솥과 크고 둥근 나무들통 두개와 물을 흘러보낼수있는, 광 같은 시설이였으나 동네에서는 유일한 목욕탕이였다. 가까운 친척 아저씨가 조합에 계셔 친구와 가끔 이용할수 있었다. 장작을 한 아름 가져가 물을 데워서 했지만 추웠고, 차라리 벌겋게 타 오르던 장작불길이 강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집 담을 경계로 골목길에 접해, 기와를 얹은 반듯하고 긴 토담에 쪽문이 있는 집 안에 우물이 있었다. 너무 넓거나 크지는 않아도 살기에 요모조모 효율적이고 아기자기하며 아름답고 이상적인 구조의집이다. 칼을 차고 말을 타던 위엄있는 경찰출신의 댁이지만, 아버지와 남다른 친분이 있어 우리만 그 우물을 사용할수 있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녘에는 예가 아니라고 어머니는 미리미리 항아리마다 가득가득 물을 채워 놓는게 일이셨다. 나도 가끔 어머니를 도와 물을 길어 날랐다. 양철로 중앙에 받참과 기둥은 나무로 만든 삼각두레박인데, 그 두레박질도 요령이 있어야 한다. 가만히 살짝 옆으로 기우려 물을 가득 담고는, 쏟아지지 않게 힘의 안배를 중앙에 두고 가뿐하게 줄을 당겨 올리는게 요령이다. 또 독아지(입이 바닥처럼 넓은 질그릇)를 머리에 이는데도 나름대로 요령이 필요하다. 물을 적당히 담아 바가지를 엎어 물이 출렁거리거나 쏟아지지않게 균형을 잘 잡아, 심호흡을 하며 최적의 순간에 힘을 모아 쓱~ 들어 올려 머리위 따뱅이에 얹어야 한다. 그때도 따뱅이가 떨어지지않게 머리채를 흔들어서는 안된다. 걸을때도 물의 출렁임을 달레며 물과 함께 리듬을 타며 걸어야 한다. 조금 서둘어 균형을 잃으면, 물이 쏟아져 옷이 홈빡 젖어 비맞은 생쥐꼴이 되기 일쑤다. 물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면 그리 흐믓했고, 부엌에는 내 키 만한 쌀독과 물항아리들이 반짝빈짝하던게 기억난다. 또 어머니는 쌀씻은 애벌뜬물은 모아 소죽 쑤는데 보태고, 속뜬물은 숭늉 끓이는데 쓰셨다.

우리도 세수한물을 모아 걸레를 빨거나 마른마당에 뿌려 먼지를 재우기도 했다.

어머니는 물은 귀하기에 헤프게 쓰면 절대로 안되고 귀하게 써야 한다며 하시는 말씀이 있다.

"물을 잘 쓰면 용왕님이 돌보시고 불을 잘 쓰면 신령님이 돌보사 복을 받는다"고...

빨래는 동네를 돌아 흐르는 도랑에 가서 하는데 빨래터가 몇군데 있다. .그러나 아낙들은 두 셋 모이면 누구도 행굼질이 아닌 초벌빨래는 그들 윗쪽에 가서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개운한 빨래를 할 수 있다. 물론 빨래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항상 청소되어 있었다. 맨 나중에 끝내는 사람이 청소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맑은물이 흐르는 개울을 보면 빨래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흐르는 물에 더럽고 지저분하던 빨랫거리가 땟국물이 빠지면 속이 다 시원하고, 맑은물이 날때까지 씻어 행구고 행궈 깨끗해 질때 그 만족스러움은 행복하다고 할까!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얘기를 적절한기회에 간절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뜻을 새겨주는게 나의 사명으로 생각한다.

집에서는 물론 특히 사우나에서 생각없이 수도꼭지를 끝까지 올려 놓고, 물이 철철 쏟아져 넘쳐 흘러보내는건 다반사요, 아예 수도꼭지를 잠글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면 몸이 오그라든다. 그리 물을 무한정 써재키는 사람들은 물 한 방울의 소중함을 알까? 한 목음의 생수를 찾아 허끼비같은 여인이 마른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쩍 쩍 갈라진 강바닥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풍경을 한번이라도 그려 보면 어떨까... 그런건 자기와 상관없는 일 이던가...이제 용왕님이 아니라 하늘님이 노하실까 두렵다.

 

 

세상살이는 도덕성이라는 터전에서 잘 자란다

박 경 옥

 

20여 년 만에 그를 만났다. 볼이 터질 것 같던 내 얼굴은 주름이 자연스레 자리했지만 그는 여전했다. 우선 근황을 묻기에 바빴다. 인편을 통해 나의 소식은 가끔 들었으며 서울입성 축하 겸 시간을 냈다고 한다. 2010년 12월 22일 중앙일보에서 그가 소비자 권익증진 신뢰부문 경영대상을 받았다는 내용을 이미 보았던 터라 대화는 술술 풀렸다. 10년간 H투신운용 사장으로 근무하는 그는 나의 전 직장 상사였다. 나는 그가 사장감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보았었다.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겸손한 눈빛과 행동은 명문대를 나온 그에 대한 경계를 일시에 무너뜨렸다. 수 년 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의견갈등 시 화를 섞지 않고도 훌륭하게 해결하는 능력은 그만의 재주 같았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동료 네 명은 점심 때 여의도의 식당가를 누볐다. 세 명이 발령 나고 나만 남았던 적이 있었다. 그 일을 두고 20년이 지난 오늘,

‘그때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참 미안했다.’

고 했다. 서운하다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의 사과를 들으니 그런 배려가 오늘의 훌륭한 사장을 만든 또 하나의 이유일까 생각되었다. 나도 그를 속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제가 H투신에 근무하던 어느 날, 대한보증보험에서 M씨가 그곳에 근무하느냐고 전화를 했어요. M씨가 M대리의 형이라는 사실을 전 알고 있었어요. M대리가 형 을 우리 회사 직원이라 증명서를 위조하고 대출을 받으려는 심산이라는 직감이 왔 어요. 찰나에 내 머리는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M대리는 사표감이 라는 생각이 들어 M씨가 근무한다고 거짓말을 해버렸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옳 았는지 지금도 혼란스러워요.”

“사실대로 말한 후 나에게 알렸으면 M대리에게 원상태로 되돌리도록 하고 한 번 의 기회는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탄로 나지 않은 그의 거짓은 더 커져서 대형사 를 내고 회사를 떠난 상태다.

그에게 진실의 힘을 가르쳐줄 기회를 놓쳤다.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고 키우는 원동력이 된다. 신뢰가 생명인 우리 회사 운용실적 전국1위를 지키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나는 회사이름도 True Friend를 앞머리에 붙인다. 때론 진실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무릅써야 한다. 단 한 번의 거짓은 지금까지의 진실을 거짓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더욱 한결같이 진실을 지켜야한다.“

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평사원에서 시작하여 사장이라는 자리를 10년 간이나 지킨 비결이 묻어 나왔다. 이제는 후진양성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내가 존경하는 H투신운용 사장의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며 세상살이는 기본적인 능력에 도덕성을 갖춘 아름다운 터전에서 튼실하게 자란다고 알려주었다.

 

 

 

 

 

 

 

 

 

 

 

 

 

 

 

 

 

 

 

 

 

 

 

 

 

 

 

 

 

 

 

 

 

 

고요 머문 내 안의 뜰

 

이순영

 

서늘한 바람이 귀밑을 스치는 가을이면 시댁에 갈일이 많아진다.

증조부님 조모님 어른들께서 아이들을 기다리셔서 주말이나 평일에도 시댁에 자주 갔다. 아이들이 어려 준비할 것은 많은데 마음이 급해져 챙기는 것이 뒤바뀌기 일쑤였다. 내 조급한 성격 탓이다. 병아리 몰고 다니다 부수수 깃털 세워 적 경계하는 어미닭처럼 부룹숭이가 되어 설쳐대었다. 가방에 넣었던 막내바지 다시 꺼내 확인하고 들었던 선물꾸러미 안 쓰는 가방에 넣고 한없이 찾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럴 때 내 가랑잎 성미에 불을 붙이는 사람은 남편이다. “아빠 나갔어” 큰아이 소리와 동시에 부르릉 차 소리가 나면 마음이 급하고 행동이 급해져서 이것 들었다 저것 놓았다 허둥대며 나서기 일쑤였다. 그럴 때 물건을 어디에 얹고 돌아서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어머니는 저애가 뒷손이 없어서…. 걱정도 많이 들었다. 속으론 이런 습관이 일 처리를 빨리 해야 하는 맏이의 고뇌라고 변명도 하고 있었다. 작은 버릇이 습관으로 굳어진다는 걸 알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다. 간혹 주위에서 벌써 그일 끝냈느냐고 빠르다고 칭찬이라도 하면 실수투성이 행동 때문에 서늘했던 마음 한 자락이 때로 위로의 말로 들릴 때도 있었다.

읽던 책을 덮고 색실 가득한 반짓고리를 열고 옷감을 꺼낸다.

메마른 마음이 버석거릴때 기웃기웃 선인의 위로를 찾아, 동류의 다른 삶도 보고 싶어 책을 들지만, 오늘은 좋아하는 바늘을 들고 음악 선율에 마음을 싣고 바늘을 잡고 무언가를 만든다. 천을 자분자분 매만지고 옷감에 맞게 색실을 고른다. 저렴한 기성품이 흔한 시대에 누가 바느질 하느냐고 묻겠지만, 때로 들끓는 가슴을 잠재우는 침묵의 노래가 되고 바다보다 우주보다 넓다는 마음이 넉넉하고 깊어 진다는것이 그이유다. 내 급한 성정이 바늘을 잡으면 어떤가? 치수는 열 번을 재고 가위질은 한번만 하라는 어른들 말씀을 까맣게 잊고 한번 재보아 맞으면 가위부터 들어 숭덩 잘라놓기 일쑤였다. 급한 마음 다독이지 못한 초기에는 버려 없애는 옷감이 많았다. 그러나 올을 다투며 한 땀씩 늘려가는 조각이어 붙일 때는 내바쁜 성정도 침잠한다. 고도의 정교함이 요구되어서일 것이다.

  유명한 스승께 배운 적은 없지만 혼인날 입는 새악시 윗저고리 원삼도 지으셨다는 어머니 어깨너머로 깨친 바느질은 옹골찬 재미가 있어 마음정화 수단이 되고 무아의 안식처였다.

어릴 적 버릇 나이 들어도 고치지 못한다는 옛 말을 나는 수긍하지 못한다. 혼신을 바쳐 어깨춤사위 절로 들어가는 일에 신명을 다하면 성정도 바뀐다고 말하고 싶다.

외국에서 패션공부를 하고 온 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치수에서 일 밀리의 차이라도 나면 무조건 뜯어 해체시켰다 한다. 바느질이 무한 정성이 들어감을 말해준다. 수많은 오류 끝에 오롯한 나만의 작품을 완성해가며 조바심을 누르고 평정을 찾는다. 옷을 줄이거나 작은걸 해줄 뿐인데 식구들도 흡족해한다.

오래전 보았던 화가의 그림이 떠오른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1920년대에 한국에 와 우리 일상의 순수한 모습을 처음으로 그린 영국의 여성 화가다. 글읽는 선비, 나막신 가게 등 많은 작품을 그려 세계에 알렸지만, 여성인 그는 특히 길쌈하는 여인들 모습을 많이 그렸다. 어두운 호롱불 아래 바느질 하는 모습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으리라. 댕기머리 처녀가 다홍치마 고운 자태로 혼수로 가지고갈 꽃베게 만들 때 한팔 길게 뻗어 실 당기는 모습은 어두웠을 등잔대신 환하고 번쩍이는 내 방 전구로 바꾸어 주고 싶을 만치 인상적이다. 의식주의 첫째인 의복을 책임져 관복부터 코흘리개들의 조끼까지 다듬어 지었을 여성들의 노고와 절제된 습관들을 후손인 우리가 물려받지 않았을까?.

반짓고리를 덮고 평정해진 마음으로 하늘을 본다. 신이 기록 한다는 다가오는 시간에는 혹여 올지 모를 전전 긍긍 급한 마음 조붓이 누이고 아늑한 풍경의 삶 그리고 싶다.

 

 

 

 

 

 

낯익은 행복

 

 

안 병 옥

 

 

은 말이라도 단어 하나에 생각이 꽂혀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인생 고작 몇 십년’ 어떤 네티즌이 무심코 던졌을 댓

 

글 중에 나온 말입니다. 길지 않은 삶을 나타낸 무수한 말에 무감각해져 있던 내게 왠지 일곱 글자로 압축된 이 말은 충격적으로 다가

 

더군요.

 

쁨도 슬픔도 화려함도 초라함도 한 순간 왔다간 사라지는 것!

 

 녀적 별명이 잉그릿버그만이었다는 할머니가 이웃에 계십니다. 여든이 넘었지만 훤칠한 키에 아직도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수

 

려한 이목구비가 한 때는 주변을 압도하고도 남았으리란 짐작은 가는 분이죠. 당당하고 멋진 외모에 어울리게 남부럽지 않게 키운 아

 

들딸들이 한 때는 그 분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거기에다 당신 스스로도 걸쭉한 입담과 남다른 패션감각으로 무리에선 자타인정의 스타

였답니다. 그런데 뭐 하나 부족함이 없던 그분의 화려한 인생이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 전부터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음을 옮기자 운동선수 같던 당당한 풍채가 오히려 짐스러워 보입니다. 예쁜 머리도 멋진 옷도 이

젠 그분을 떠난 지 꽤 되었구요. 그분의 자랑이던 자식들마저 지금은 오히려 숨기고 싶은 아픔을 주는 가 봅니다. 의사를 남편으

 

로 둔 따님이 말기암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다 유명 탤런트 부부인 아들과 며느리도  결국은 이혼으로 노모의 가슴에 대못질을 해 버렸

 

다는군요. 은 집에 외로이 홀로 살면서도 주변의 화려함으로 늘 화제의 중심에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을 날리

 

던 잉그릿버그만을 닮은 그분이 최근 우울증으로 사람들 만나는 걸 피하고 홀로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곤 한답니다. 모임

 

에 꼭 나오시던 그 분은 이번 달도 불참입니다.

 

 분과 어울리며 늘 배경만 되어주던 뽀글머리 파마를 한 할머니 두 분만이 분홍색의 알록달록한 윗도리를 맞춘 듯 입고 모임에 나오

 

셨습니다. 두 분 모두 직장에 나가는 며느리와 딸을 위해 살림과 손주를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다는군요. 낮에 잠시

 

틈을 내 경로당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꿀맛 같은 시간을 얘기하는 두 분의 표정이 얼마나 예쁜지.... 미처 몰랐더랬습니다.

음으로 그 분들의 소박한 얘기에 귀 기울이며 아무 이유도 없이, 수줍어하고 면목 없어 하며 사소한 얘기에도 조글조글한 미소를 짓는 우리 할머니 같은 그분들의 얼굴에서 낯익은 행복을 읽었습니다.

생이란 어찌 보면 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받은 기쁨만큼, 상실할 때의 슬픔이 크고 눈부시게 화려한 만큼 사그라듦의 초라함이 처절하고...

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충만감을 잠시라도 맛볼 수 있는 롤로코스트의 유혹도 아직은 떨쳐버리기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웃 어르신들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희로애락에 몸을 싣고 유유히 흘러가는 길을 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꿈을 꾸며 작고 사소한 것에 눈을 맞추며 살아갈 제 소박한 노년의 길을 그분들에게서 배워보렵니다.

어? 그런데 이 몇 글자 계속 신경을 건드리긴 합니다. ‘인생 고작 몇 십 년’ 이란 말이요.

 

 

 

 

 

아침밥 챙기기

문 덕 연

 

여러 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에게는 이렇다 할 좋은 습관이나 내세울만한 자랑거리가 별로 없다. 결혼 전에는 늦잠꾸러기에다 어딜 가나 늑장 부리기일수이고 무슨 일이든 부모님이나 언니 오빠 심지어 동생에게까지 의지하며 짐을 지웠다.

결혼 후에는 거의 모든 일을 남편에게 의존하며 살아 온 것 같다. 나의 어린 자식들 돌보는 일까지 시누이, 친정올케, 언니나 여동생에게 동냥하듯 맡기며 키웠고 부지런만하면 충분히 혼자 해결 할 수 있는 일들도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았다. 두 아들이 중고생쯤 되자 물리적 힘을 가하는 일들은 거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심지어 장보기까지 시켰다.

한편으로 결혼 후 이제껏 내가 살아 온 날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에게도 좋은 습관이 전혀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지는 않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신접살림 차린 후부터 지금껏 아침밥 챙기기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것 같다. 남편이 언젠가 자신이 몇 년간 모 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느라 지방근무 했을 때와 간간히 외국 출장 갈 때 빼고는 따끈따끈한 아침밥을 한 번도 거른 적 없었다고 내게 칭찬 비슷한 말을 한적 있다.

바쁜 일상에서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이 우리 가족도 온전히 함께 식사하는 시간은 아침뿐이다. 남편은 아침식사만 집에서 할 뿐 나머지는 거의 밖에서 해결한다. 아이들도 자라면서 학교에서 돌아와 바로 학원으로 가고 서로 시간대가 맞지 않아 아침식사 외에는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 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전 7시면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 앉아 20~30분 정도라도 다 같이 밥 먹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결혼하고 처음에는 새벽 6시에 일어나 밥 짓는 것이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를 떠올렸고 어릴 적부터 존경했던 인도의 초대수상인 자와할랄 네루가 했던 말을 생각하며 지금껏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밥을 짓는다.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새벽 5시면 깨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가마솥에 뜨끈한 밥을 지어 식구들을 챙겨 먹이고 각자 일터로 보낸 후 당신들도 흐뭇해하며 논밭으로 시골장터로 일하러 나가셨다. 인도의 독립운동과 종교분쟁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살았던 네루수상은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아침식사만큼은 반드시 챙겼다고 한다. 천안함 사태니 연평도 폭격이니 하루도 안심할 날 없이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분단된 조국에서 살얼음 딛듯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어떤 일이 돌발할지 모르니 날마다 아침밥만큼은 챙겨야 할 것 같다.

밑반찬인 김치나 찌개, 마른 반찬 등은 전날 미리 준비해 놓지만 귀찮긴 해도 밥만큼은 꼭 아침에 짓는다. 전날 미리해서 보온밥통에 넣어두어도 되긴 하지만 아침에 바로해서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보온 밥은 왠지 푸석하고 밋밋해서 반찬이 아무리 맛있어도 입맛이 돌지 않는다. 아침에 압력솥에 바로 해서 먹는 밥은 김이 모락모락 솟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감칠맛이 나고 별 반찬 아니어도 먹고 나면 속이 훈훈하고 꽉 찬듯하다.

온 가족이 잠시라도 한 밥상에 둘러 앉아 갓 짓은 뜨끈한 밥을 먹으며 따뜻한 시선으로 스킨쉽 하면서 하고 싶은 말 몇 마디씩 주고받은 뒤 학교나 각자의 일터로 간다. 웬지 그날하루 주부로서의 나의 임무를 다 한 듯 마음이 뿌듯하고 온 집안에 행복이 그득해진다.

 

고래와 춤을

강귀분

그날도 나는 남편과 함께 미국 케네디 공항 입국장의 길게 늘어선 사람들 틈에 서있었다. 입국장에 들어설 때마다 왜 그렇게 긴장이 되는지, 금지된 물품을 소지한 것도 아니고 면세품을 규정 이상으로 산 것도 아닌데, 그날 따라 더 긴장되었다. 짐이 다른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각자 입국신고서, 여권과 귀국용 비행기표를 손에 쥐고 입국심사대 앞에 서 있다, 남편이 먼저 세관신고서를 들고 수속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세관 신고서에 V자를 확~ 그리는 게 아닌가. 드디어 걱정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동그라미는 문제가 없으니 그냥 들어가라는 뜻이고 V자는 엑스레이 투시기로 가라는 말이다.엑스레이 화면에서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것이 보이면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엎는다. 건어물, 고춧가루, 밑반찬, 김치, 심지어 옷가지들까지 뒤엉켜 널브러지고 그것들을 다시 주어 담을 때는 정말로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한다. 게다가 허리 춤에 손을 얹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 보는 백인이 있을 때는 정말 자존심까지 상한다. V자가 그려지는 것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렇지만 나는 억지미소를 띠고, "하이! 유 핸섬~(Hi! You Handsome)" 이라고 말하면서 여권을 내밀었다. 약간 화가 난듯한 얼굴로 여권을 확인하고 있던 공항직원은 ‘핸섬’이라는 한 마디에 표정이 풀리면서 "리얼리? (Really?)"라고 물었다. 나는 힘주어 "슈어~(Sure)" 라고 말해줬다. 그는 순간 씨익 웃으면서 라인 밖으로 나가 있던 남편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세관 신고서에 그려진 V자를 동그라미로 고쳐주고 나의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줬다. 나는 고대하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손까지 흔들며 큰 소리로 "땡큐 쏘 머치(Thank you so much)"를 연발하며 카트 두 개에 가득 짐을 싣고 기분 좋게 입국장을 빠져 나왔다.  출입국 직원은 미남이기는커녕 그 반대였다. 아마도 태어나서 잘생겼다는 말을 처음 들어 정말 기분이 좋았거나, 아니면 겁먹은 것 같은 아시아 할머니의 아부하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날 돈도 힘도 안 들이고 잘 생겼다는 칭찬 한마디로 엄청난 덕을 보았다. 영어도 못 하는 내가 그 순간에 어떻게 그런 용기와 순발력이 나왔는지. 아마도 위기를 모면하려는 절박함 때문이었던 같다.

미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원더풀, 뷰티플, 그레이트란 말을 자주 쓰면서 호들갑스러워 보일 정도로 맞장구를 치며 상대를 칭찬한다. 칭찬받는 사람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칭찬하는 사람도 "도파민"이란 호르몬이 나와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문화의 차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칭찬에 인색한 것 같다. 칭찬은 남편이 나보다 너무나 잘한다. 과한 칭찬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 때문인지 그의 주위에는 항상 친구가 많다.

나는 그렇게 쉽고 모두를 기분 좋게 만드는 칭찬을 이제부터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데.

2011년 2월 8일

 

 

 

 

 

 

 

 

 

 

 

권남희 수필교실 개강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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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홈플러스 금요수필 3월 4일 오전 9시 30분

미래수필문학회 ( cafe.daum.net/milaessay) 소개

1. 초대회장 원명재(월간 한국수필 등단 ) 2003-2004

2. 2대 회장 여옥례(격월간 수필과 비평등단 )2005-2006

3. 3대회장 전수림 (월간 예술세계 등단) 2007-2008

4. 4대회장 정구필 (문학나무 등단 ) 2009-2010

각 수필잡지로 등단하여 활동하는 회원( 김신혜. 전수림. 이정애. 김상미. 이영실.

이병희. 원명재. 지정자.손정자. 이강순.구회남. 박을순. 이남수. 김성숙. 김혜숙. 유영희. 이현숙 . 문장옥. 신미금. 이춘자. 고인숙. 허해순. 차미숙. 김은순. 안혜영. 김명옥. 진정래. 윤중일. 김선미. 권진숙. 윤자숙 . 윤정희

해외: 연주영(캐나다) . 조숙희(그리스) . 서라별 (베트남)

분당 야탑문학회( 전현숙. 김성락. 김단혜. 김형욱. 한정화. 김수진. 최정은. 김태실.

주정자. 이여원. 이윤희. 박순향. )

덕성여대 수필반( 전병수. 강영실. 오석영.홍성미)

MBC아카데미 롯데잠실 목요수필 정기낭독행사와 주제

2008년 8월 ( 글읽는 소리. 유금호 소설가 특강과 최원현 수필가 초대낭독)

회장 김혜숙. 총무 유영희 사회 김성숙

2008년 11월 ( 내 인생의 책방. 김영순 송파구청장)

회장 김혜숙. 총무 유영희 사회 유영희

2009년 2월 ( 지혜와 희망의 시간 .용혜원 시인 초대 )

회장 김혜숙. 총무 유영희 사회 유영희

2009년 5월 (가족이 희망이다) 회장 이남수. 총무 김은순 사회 김은순

2009년 8월 ( 인생의 보물섬 여행 )회장 이남수. 총무 김은순 사회 김은순

2009년 11월 ( 청바지. 정목일 이사장 특강. 용혜원 시인 낭독 )

회장 이남수. 총무 김은순 사회 김성숙

2010년 2월 ( 구두이야기. 덕성여대 수필반 초청 전병수회장. 백승국수필가.

류장우 수필가 ) 회장 이남수. 총무 김은순 사회 김성숙

2010년 5월 ( 맛 )회장 이춘자. 총무 이해정 사회김성숙

2010년 8월 ( 내 인생에 부는 바람) 회장 이춘자. 총무 이해정 사회 김성숙

2010년 11월 (멈출 수 없는 것. 용혜원시인초대 ) 회장 이춘자.총무 이해정.

사회 유영희

2011년 2월 ( 훈습) 회장 이춘자. 총무 이해정 .사회 유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