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바다에 등대로 깜빡이는 수필가 유혜자
- 가슴에는 Elizabeth B. Browning이 살고 있다-
대담 : 정목일 이사장
장소 :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실
일시 : 2012. 5. 16
정리 : 권남희 편집주간
정목일 이사장: 유혜자 선생은 여성이기도 하지만 방송국에 몸담고 있으면서 故 조경희 선생과의 인연도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여러가지로 촘촘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유혜자 수필가 : 1972년 늦가을, 첫 수필집『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출간한 나는 당시 <주간한국>부장이시던 조경희 회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여고시절부터 존경하던 수필가였고 매체는 다르지만 언론계의 대선배라 책 소개를 부탁드리려고 용기를 냈었죠. “나처럼 악수라는 형식을 많이 이용하는 사람도 없다”고 일찍이 어디엔가 발표하신 작품「악수」가 생각날 만큼 성큼 손을 내밀고 “수고했어” 하시고는 즉시 카메라 기자를 불러 사진을 찍게 하고, 평론가인 신동한(申東漢) 기자에게 책을 건네며 “소개 좀 해줘” 하고는 다른 일을 보셨습니다. 그 책은 제가 30세를 넘기고, 등단의 문턱에서 뒷걸음쳐서 월급쟁이로 안주하던 자신에 회의가 들어서, 감성에 묻어 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직장과 자신의 본모습을 담은 고백이 많았었습니다. 5분도 안된 조 회장님과의 만남이 좀 허탈했으나 신동한 평론가의 과만한 호평이 이후 글 쓰는데 큰 부담과 함께 힘이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 조회장님이 창립한 ‘한국수필가협회’(1971년)에서 발행하는 <수필문예> 2호(후에 <한국수필>로 개칭)에서 원고청탁이 와서 「종소리」를 발표했는데, 박연구 편집인에게서 “글이 좋더라”는 회장님의 전언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 후 수필가협회에 가입은 했지만 바쁜 직장생활로 찾아뵙는 일 없이 다른 수필 동인에서 주로 활동을 했습니다. 1980년도 조회장님의 한국일보에서의 정년퇴직은 우리 여류 방송인들에게도 화제였습니다. 당시 우리 방송에선 여성 PD는 결혼과 동시에 퇴직해야 했고 신문사에선 그런 규정은 없었지만 6.25 등 격변의 와중에서 정식으로 정년까지 근무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꽃다발을 들고 갔어야 했는데 실천을 못하고 회장님과 거리를 두고 지냈습니다만, 바쁜 매스컴 종사자 후배로서 글을 많이 쓰는 것을 반가워하셨고 수시로 다른 지면에 쓴 글에 대한 칭찬을 전화로 주시기도 했습니다. 1992년도 한국문학상 수상 때 누구보다도 축하해주셨고 선배님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97년도에 한국수필문학상을 주실 때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그 후론 과분한 신뢰와 배려로 세미나에 대한 의견수렴과, 수필 낭독회를 주관하게 해주셨습니다. 와병 중이실 때 조각된 임원진에 저를 여성 부이사장으로 챙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셨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정: 선생님이 수필가로 등단하게 된 배경과 방송국 일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유: 극소수의 가정에만 TV를 보유했고, 전파사에서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고 축구, 권투, 야구, 레슬링 등 중계방송을 동네사람들이 함께 듣던 60년대 후반에 라디오PD로 출발했던 나는 다른 선배들처럼 방송에 나가는 짧고, 혹은 긴 멘트를 직접 써야 했습니다. 연속방송극이나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주로 날씨와 계절, 생활정보에 대한 것은 작가가 따로 없이 담당PD가 작성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아나운서나 성우들이 전달하는 것이라 해도 자신의 원고가 방송되고 청취자들의 좋은 반응이 있으면 성취감과 함께 보람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고나니 방송이 전파를 타면 어떤 이의 기억 속에 단편적으로 머물 수는 있지만 흩어지고 마는 것이 허무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방송글을 쓰다 보니 명색이 문과를 전공했는데 자신의 글을 써야 한다는 욕구가 없어졌습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께서, 편집자나 기자 같이 글을 늘 다루는 사람은 창작욕구가 없어진다면서 시인 T. S. 엘리어트가 은행원이었기에 줄기차게 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들려주셨던 것이 생각나기도 했었죠.
학창 시절에 저는 시인 지망생으로 『세계명시선』에서 영국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Elizabeth B. Browning 1806-1861)의 이름다운 시를 읽으며 부러워 했습니다. 특히 병약했던 처녀시절, 집 꼭대기 그녀만의 밀실인 ‘녹색의 방’에서 걸작을 쓰며 연하의 무명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과의 서신왕래로 그의 재능을 향상시켜 세계문학사상 유명시인끼리 부부로 맺어졌던 일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대학 졸업반 때 월간지<여원>의 신인상에 응모, 심사위원들이 최종심의 두 작품을 놓고 논의 끝에 떨어진 제 작품이 아쉬워 길게 인용한 심사평이 실린 뒤로 브라우닝 부부의 시는 거의 잊고 지냈습니다.
MBC에 입사해서 잡다한 일에 매달려서 문학잡지 한권도 안 읽고 지내다보니 남 보기엔 화려해도 내면으로 느껴지는 실존의 고독감을 어쩔 수 없었죠. 어느 해 12월 초, ‘신춘문예 마감박두’라는 신문글자를 보고 불에 덴 것처럼 허둥지둥 제작된 녹음테이프를 주조정실에 인계하고 나오다가, 스튜디오바닥에 초록색 새 카페트가 깔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카페트를 보자 ‘녹색의 방’에서 꿈을 지녔던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가 생각났었죠. 서둘러 퇴근하여 몇 년 전에 써두었던 습작시를 손질하여 부랴부랴 K신문에 응모했었습니다. 결과는 <여원>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종심에 오른 두 편 중 “현대시에 기여할 만한 참신함이 부족하다.”는 심사평을 읽고 반성을 했습니다. 평소에 꾸준히 연마하지 않고 연말에 몇 자 적어 보내는 연하장 쓰듯이 해서 등단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녹색의 방’에 갇혀 있던 영혼이 진정을 담은 편지로 한 남성을 부추겨서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했던 돈독한 사랑, 진정한 사랑에 공들이지 않고 막연하게 행복한 만남을 꿈꾸면서 보낸 세월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해 봄부터 퇴근시간이면 집에 달려가 방송 삽화(揷話) 위주로 두 달 이상 원고지에 매달려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K신문 신춘문예 발표이후, 김후란(金后蘭) 시인이 MBC의 상사였던 김아(金雅) 선생님의 부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후일 김후란 시인은 내게 원로시인 S선생님을 소개해주시며 시 쓰기를 독려해주셨는데 시는 나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던 처지였습니다.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탈고했던 무렵, 방송출연으로 오신 김후란 시인과 김우종 평론가에게 출판취지를 말씀드렸더니 두 분은 후일의 문단활동을 위해 추천과정을 밟을 것을 강권하셨습니다. 그해 봄(1972년)에 창간된 <수필문학>지에 추천제도가 있었으나 두 차례의 추천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갑자기 문학적인 수필 쓰기엔 역량이 부족했고 시간도 없어서 인쇄중인 글 중에서 수필적인 것을 골라서 수필문학에 보냈죠. 마침 수필문학에 들른 김우종 선생님께서 편집자(고 박연구 선생)에게 전후 사정을 전했을 때, 흔쾌하게 「청개구리의 변명」을 전무후무한 ‘신인가작’(新人佳作)의 제목으로 등단시켜주셔서 지금껏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막상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1972년)란 책을 내놓고 나니 명색이 문과 출신인데 문학적인 향취도 없어 부끄러웠습니다. 이듬해 봄<수필문예>에 수필「종소리」를 발표하여 지금껏 데뷔 수필로 삼고 있습니다.
젊은 여성 방송인 수필가라는 희귀성(?)으로 많은 잡지(당시 종합교양지와 여성지에는 수필난이 있었음)의 청탁을 받으며 내게 맞는 글,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70년대엔 경제 성장과 함께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우리고유의 전통과 미풍양속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한국의 미의식과 전통을 담는 서정수필로 출발했죠.
40년 동안 수필을 쓰면서, 방송 초년기에 방송에 모셨던 유명인사나 인간승리자들에게서 자극을 받았던 것이 기억나고, 늘 참신한 것을 요구하던 방송 일을 했기에 진부하지 않은 것을 소재로 하려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필소재의 확충을 위해서 클래식음악과 문학의 만남인 음악에세이도 쓰고 나름대로 변화를 추구해왔으니 나의 글쓰기는 방송에서 비롯되고 지금까지도 많은 덕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정: 선생은 가장 힘들었던 시기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을 떠맡았다고 봅니다. 일을 하시면서 힘든 점과 보람을 다 말씀하신다면 무엇일까요?
유: 36년이라는 전통이 무색하게, 맘대로 찾아 쓸 수 없는 작은(2260만원) 액수의 정기예금통장 하나 외엔 이어받은 게 없어서 사무실을 얻고 집기를 마련하여 월간지를 계속 발행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협회의 존폐여부가 불투명했을 때여서 동업 수필잡지 발행인들의 시선도 부정적인 가운데 한 가지를 해결하고 나면 계속 다음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국수필작가회원들을 비롯한 원로문인 몇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준 있는 신인을 등단시키려고 함량이 안 되는 이를 추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운영의 묘를 살린다며 편집주간이 작품을 고치는 수고를 하고 있을 때 속이 상했습니다. 2011년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우수콘텐트잡지로 선정되어 영광이지만, 2008년에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우수잡지로 평가되어 다른 잡지보다 액수 높은 지원금을 받아 얼마간의 원고료를 지불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정: 선생은 수필집도 7권이 넘지만 음악에세이 작품집도 5권을 쓰셨습니다. 테마에세이를 쓰시면서 보람을 느꼈다면 무엇인가요?
유: 수필이 일상의 일들을 소재로 삼거나 쉬운 글이기 때문에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문학적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많습니다. 음악적 지식과 정보도 주는 음악에세이는 선호하는 이들이 많아서 몇 군데 지면에 연재할 때 호응이 많아서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정: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주제는 무엇인지요
첫 수필집을 내고 난후, 70년대 후반에는 경제성장에 따라 잊혀져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추구하는 작품을 쓰려 했습니다. 고향 사랑과 가족, 이웃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했죠. 이어서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음악에세이에 집중했고, 최근엔 문화재 사랑을 주제로 거창한 문화재보다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것들을 친근감 있게 수필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한국의 전통적인 미의식 추구의 일환인 셈이죠.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제시하고 해결점을 제시하는 사회수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의 주장에도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사유가 얕고 시시각각 급변하는 세태를 따라가는 속도감도 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얕은 지성과 철학으로는 일깨울 만한 능력이 없어서 시도할 엄두를 못 냅니다. 앞으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아름다움과 경이, 감동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일시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보다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것을 쓰고 싶은 욕심은 계속될 것입니다.
정: 선생님은 늘 수필작가는 글로 말해야 한다며 작품에 최선을 다하라 강조했습니다. 수필문학동호인 단체들이 여느 장르보다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볼 때 많은 생각을 하실줄 로 알고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발전방향을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유: 디지털문화, 영상문화시대여서 문학의 위기를 맞았으나 수필만은 자기를 드러낼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어서인지 활동하는 그룹이 많아져서 희망을 갖게 됩니다. 양적인 팽창이 곧 질적으로의 향상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발전을 기대할 수 있죠. 선지자, 예언자는 혼돈의 시대에 필요한 것입니다. 한 그룹의 발전만을 위한 강의와 결속을 넘어서 담을 헐고 어느 수준에 이른 동인들의 원고를 다른 동인지에서도 청탁하여 주고받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네 출신 작가가 최고인 듯 한 비평란의 객관성도 신중하게 유지해야 하고, 시상(施賞)도 자기네 그룹 출신만 대상으로 하지 말고 전국 수필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정: 문학 후배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유: 등대는 가로등처럼 계속 켜두면 바다 가운데서 그것을 보는 이들이 거리 감각이나 방향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깜빡깜빡 하고 껐다 켰다 해서 갈 길을 가늠하게 하는 등대처럼 수필가의 소임이나 사명감도 소중함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사연이 있는가? 그때 너는 붓을 들라. 그러면 너는 한 줄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테의 수기』에서 라이너 릴케(R. M. Rilke)가 한 말을 잊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따금 잊어버리는 자신에게도 부탁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유혜자 약력
월간 <수필문학> 1972년 등단. (사) 한국수필가협회 前 이사장
새종대 국문과 졸업. 동국게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MBC라디오 PD 부국장 대우로 퇴임.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
수상 : 현대수필문학상 . 한국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 조경희 문학상. 한국펜문학상. 동국문학상. 한국방송대상( 1998년도 라디오부분) 외
수필집 :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거울 속의 손님》《세월의 옆모습》《어머니의 산울림》《절반은 그리움》《자유의 금빛날개》《사막의 장미》《
음악에세이: 《음악의 숲에서》《차 한잔의 음악읽기 》《음악의 정원 》《음악의 에스프레시보》
수필선집 :《꿈꾸는 우체통》《종소리》《파가니니와 냉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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