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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수필과 비평 10월호 다시읽는 이달의 문제작 ( 권남희 편집주간 수필 '터' )

권남희 후정 2013. 10. 8. 16:13

 

 

 

2013년 수필과 비평 10월호 문제작품 재수록 (작품평 박양근 부경대 교수)

권남희수필가(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

 

 

강남거리는 ‘터’를 빼앗긴 페허의 얼굴이다. 사람을 위한 공간이 없다. ‘터’(고어 ‘Rum)는 원래 사람들이 살아갈 곳을 만들기 위해 비우는 곳이다. * ‘Rum' 은 모든 사물보다 인간의 거주를 위해 비워진 것이다. 돈 쓰러 오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주민들을 쫒아낸 거리는 어딘지 비정함을 품고 있다. 터가 사라져 존재할 곳이 없다는 막연함, 네모반듯한 수십층의 유리건물 앞에서면 어느 한 구석 마음이 들어설 틈을 찾을 수 없어 멍해진다.

별빛을 삼킨 불야성 거리.......... 이곳이 뉴욕인가, 이태원인가? 클럽과 카페, 탈출구를 찾는 젊음이 뜻을 합해 하룻밤 미치는 문화만 살아남는 장소일 뿐이다. 시대의 울기鬱氣를 발산하기 위해 날마다 축제가 벌어지는 이곳, 별 쏟아지는 논에서 개구리 울던 그 정다운 풍경을 엎어버린 이곳, 시적 언어는 사라지고 마르셸 뒤상의 ‘변기’같은 해프닝만 남아 이른 아침 출근길을 아프고 쓸쓸하게 한다.

빌딩 지어 올리는 일이 끊이지않는 도심거리에서 나는 오늘도 빌딩 하나를 해체한다. 불도저도 없고 포크레인도 없다. 오로지 공상을 연장삼아 상상력부재의 유리와 철골의 정사각형 빌딩, 간판만 즐비한 모더니즘 건물의 이기심을 뜯어낸다. 성형외과를 뜯고 치과와 피부과, 산부인과, 커피 체인점, 네일샵, 모텔, 에스테틱스, 유학원, 어학원, 스마트폰 대리점. 패스트패션 상점을 차례로 허물어버린다. 다 부수고 나니 남은 공간은 지하 알라딘 중고서점과 그 건너편 교보타워 지하 교보문고다.

드디어 강남 일대가 눈을 뒤집어 쓴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듯하고 모내기 끝난 논물이 별빛을 받아 찰랑거린다.

건물 외벽에서 번쩍이는 광고전광판을 보며 나는 별 쏟아졌던 외가의 마당을 떠올린다. 대나무 숲 뒤란과 평상이 있던 마당, 여름 방학이면 나를 반겨주던 외할머니, 소여물을 썰던 외삼촌, 외숙모와 그곳 친구들.....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터를 잃고 떠돌아야 한다는 불안 때문에 상실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낭만과 고전적 풍경을 버리지않은 채 상상력으로 잘 빚은 로마건축처럼 우리의 고향이 수백년 동안 변하지 않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백년 오백년 천년의 그 터를 지키려면 엄청난 장애물들과 싸워 이겨야 하는 도시, 아무리 높은 빌딩이 올라가도 인간을 위한 터가 아닌 이상 끊임없이 옮겨다녀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간은 존재감이 약하다.

 

오래 전 나는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랐던 곳이 터라는 믿음이 강했었다.

내가 태어났던 곳에서 부모님과 영원히 살 줄 알았던 때 나는 그곳이 절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부모님이 자리를 잡은 그 터에서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내 모든 존재의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날마다 눈을 뜨면 보게되는 마당의 꽃들과 열려있는 대문, 학교가는 길, 내 이름이 불리고 우정을 쌓고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던 장소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개발바람에 밀려 우리 집이 반으로 갈라지고 방문 앞으로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이 생기게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절대공간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터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 사라지는 불행을 막기 위해 어머니는 필사적이었다. 반토막난 마당을 꿋꿋하게 지키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산과 강물이 흐르는 자연으로 터를 삼고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은 후에도 귀환할 수 있는 터가 없어 풍경이 될 수 없는 도시인들이다,

 

폐허 위에 반전을 설계한다. 빌딩과 자동차길이 논과 밭, 살림집마당을 부수었으니 이제 거꾸로 강남 거리에 삶의 풍경을 앉히는 것이다. 논농사와 추수 풍경을, 김장하는 풍경이 거리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농업과 건축이 융합하는 어그리텍쳐(Agritecture)시대가 온다는데 이런 빌딩은 어떨까? 모기파리 개구리 뱀, 새떼 등 자연풍경 생명들이 어울려 사는 피라미드신전에 인간이 죽음으로 안착하는 터를.........

stepany1218@hanmail.net

 

* Rum 터: 이종관의 《공간의 현상학,풍경 그리고 건축에서 》

 

권남희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당선. 현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165-8. 엘지 팰리스 1906호     전화: 011-412-4397

 

작품론 (2013년 수필과 비평 10월호 146페이지부터  )

 

<수필과비평문제작 10월>

크로노토프와 수필의 시공성

박양근수필가( 월간에세이 수필 등단. 부경대 영문과 교수 )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그동안 인간의 행동이 자유의지에서 비롯한다고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삶이란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기체이므로 누구나 지나가버린 시간과 떠나온 장소에 향수를 품는다. 문학이 다루는 상실감과 그리움이 여기에서 비롯한다. 헤어진 사람을 기억하는 감정조차 기본적으로 시간과 장소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문학에서 크로노토프라고 부른다.

크로노토프(chronotope)는 그리스어로 시간인 chromos(크로모스)와 장소인 topos(토포스)를 합친 시공간을 의미한다. 러시아 철학자이자 문학이론가인 미하일 바흐친은 시간과 공간이 상호 분리될 수 없다고 믿고 시간-공간(time-space)이라는 용어 대신에 크로노토프라는 합성용어를 만들었다. 시공간은 원래 지리학과 수학에서 사용되었지만 문학과 예술에 도입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연관성을 일컫는 용어로 발전하였다. 바흐친도 크로노토프는 장르를 규정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결합하는 비율에 맞추어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함으로써 크로노토프를 문학 속에 용해시켜 나갔다.

크로노토프가 문학 연구에서 지닌 의의는 ‘문학을 인식하는 독특한 방법론적 틀’이라고 하겠다. 방법론적 틀은 서사시에서 스토리의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사용된다. 등장인물과 액션이라는 요소가 끼어들고 시공성이라는 연관성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화자가 자신의 체험을 반추하는 장르에서는 시공성의 상관성으로서 크로노토프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미학적으로 체계화하는 패러다임이 서사산문이라는 점에서 시와 소설의 중간에 자리하는 수필에서 남다른 효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시공성에 대한 반응 중의 하나가 향수이다. 인간은 특정 시기의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을 기억할 때 그리움과 아쉬움을 품는다. 장소와 시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느낌을 초월하여 역사적, 문화적 감각마저 자각한다. 산업화‧도시화·개발화가 이루어질수록 공간에 대한 인식 체계에 변화가 일어나 향수라는 심리는 시공성과 관련을 맺는다. 문학작품에 기록되는 향수가 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재현하면서 크로노토프는 수필의 서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권남희의〈터〉

권남희는 ‘터’라는 시공성을 남다르게 인식한다. 그녀는 터의 공간성을 풀어낼 뿐 아니라 그것이 지닌 서정적이며 감성적인 이미지를 치열하게 추적하고 있다. 터는 대지와 구별된다. 터가 지니고 있는 원래의 의미는 사람이 살기위해 선택한 장소를 지칭한다. 터에는 공간성, 선택성, 존재성이라는 의미소가 끼어들고 토포필리아라는 장소애가 부각된다.

토포필리아는 서술자가 특정 장소에 품는 애정과 그리움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김소월이 노래한 강변마을과 산 너머 남촌은 낭만적인 장소로 매김 되고 있다. 권남희에게는 그러한 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태어나 살았던 추억속의 강남거리는 ‘터를 빼앗긴 폐허의 얼굴’이 되어 버렸다. 이곳은 ‘돈, 환락, 수십 동의 유리건물, 불야성, 하룻밤 문화, 허무의 축제’의 언어로 변질하면서 마르셀 뒤상이 그려낸 변기 같은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산업화로 빚어진 강남거리를 걸을 때마다 그녀는 아프고 쓸쓸한 기분을 숨길 수 없다.

크로노토프의 가치를 복원시키고 향수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오늘의 강남거리를 허물고 심미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다. 비록 생각뿐일지라도 ―문학은 상상이니까― 도시 건물을 심미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다. 성형외과병원, 커피 체인점, 네일샵, 모텔, 유학원, 스마트폰 대리점, 패션상점을 허물어 버리고 예전처럼 ‘눈을 뒤집어 쓴 초가집’과 ‘모내기 끝난 논물에 별빛이 찰랑거리는’ 시간과 공간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 이러한 재현은 작가의 상상으로 구성되는 수필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때면 강남거리는 사람을 위한 ‘터’로 되살아 날 수 있다.

내가 태어났던 곳에서 부모님과 영원히 살 줄 알았던 때 나는 그곳이 절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부모님이 자리를 잡은 그 터에서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내 모든 존재의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날마다 눈을 뜨면 보게 되는 마당의 꽃들과 열려있는 대문, 학교 가는 길, 내 이름이 불리고 우정을 쌓고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던 장소였다.

권남희에게 터란 출생의 장소일 뿐 아니라 가족의 행복과 안전과 평화를 보장한다. 자연이 훼손되지 않은 전원주의를 구현하면서 공동사회의 가치를 지켜가는 점에서 보면 이상향에 가깝다.

하지만 터라는 이상공간을 지켜내는 일은 순탄하지 않다. 공간의식에서 터는 대지의 상징을 지닌 여성과 연관된다. 태어난 곳에 대하여 강렬한 향수를 품을수록 집터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어느 날 집 앞에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이 생기게 되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생존공간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일인시위를 벌였다. 집터는 가족의 행복과 미래를 보증하는 안식처이므로 대지의 딸로서 그녀는 전력을 다하여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터의 존립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 투사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기억하면 강남거리에 있었던 집터가 생각나고 집터를 회상하면 일인시위를 마다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일인시위는 시공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가족, 사랑, 가정, 행복이라는 언어에 일치하며 크로노토프라는 모티프를 지닌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그 터의 풍경이 바뀌어버렸다. 오늘날의 강남거리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밤낮없이 번쩍거리고 있지만 삶의 진면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딩과 자동차가 논밭과 집터를 점령해버림으로써 자연과 어울렸던 일상적 삶이 무너져버렸다. 그렇다고 권남희는 과거로의 회귀를 굳이 고집하지 않는다. 자신이 태어났던 터가 되돌아 올 수 없음을 알고 있으므로 실현성 있는 크로노토프를 선호한다. 그것은 인공 농업과 건축이 함께 하는 어그리택쳐(agritecture)시대를 상징하는 빌딩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건물이 건축될 때 강남거리는 진정한 시공성의 대상으로 이야기될 것이다.

김춘자의 〈철부지〉

김춘자는 살아온 일생을 계절이라는 ‘철’로 표현한다. 가을철에는 코스모스, 가을바람, 노란 벼, 고개 숙인 수수 등의 자연물로 계절이 제때임을 표현해준다. 코스모스가 피지 않으면 그해 가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철을 가리지 않고 과일을 거두고 꽃구경을 할 수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시간 순환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김춘자는 ‘철’에 ‘부지(不知)’라는 말을 붙여 사람의 나이에도 철이 없다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나이가 꽃과 음식뿐만 아니라 계절 옷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철을 잊고 사는 건 지, 철을 거스르고 사는 건 지”라는 의문에 빠져든다. 철부지에는 바흐친이 말한 크로노토프라는 시간 개념이 발견된다. ‘철’과 자연과 인생을 함께 상호 대입시키는 것이다.

철이 난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자기 인생에 도리를 다해야함을 의식해야한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힘들어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람 노릇하는 것이다. 이건 철이 들었다는 말이다. 철을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답게 살아야하는 책임이기도 하다.

김춘자는 어린 시절부터 철이 들어야 한다는 가족의 요구에 억눌려왔다. 당시의 철이 지닌 조건은 타지향적이다. 사회적 자아로 성숙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동네에서 착한 며느리라는 칭찬을 받는 것이다. 작가는 그 외양에 길들여지며 살아왔다. 이것을 철이 들었다고 믿고 무엇보다 그 당위성에 충실하였다. 이것이 일 단계 ‘철듦’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철듦’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자기를 버리고 스스로 희생당하는 것이 철듦이 아니라는 자각이다. 철모르쟁이로 살아온 과거의 시간에 아쉬운 눈물을 흘리는 김춘자가 재인식한 ‘철’은 순종의 세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진짜 철이 든 때는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시기라고 말한다. “철이란, 계절이나 절기를 의미한다. 또한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힘, 곧 지혜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정의한다.

김춘자가 인식한 인생의 시간은 공자의 지천명에 접근한다. 24절기를 외우고 가을바람을 바라보며 철이 바뀐다는 것을 자각할지라도 세상 바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하면 또한 철이 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러한 ‘철든 시간’이 삶이 펼쳐지는 시공에 해당한다. 시간이 세월이 되고 세월이 나이가 될 때 비로소 나잇값이라는 시간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현대란 어느 의미에서 제철이 사라지는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춘자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세상살이는 세상바람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명제이다. 나이를 먹으면 죽음에 다다른다는 생사의 법칙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은유로 표현한다. 이것이야말로 시공성의 질서와 원칙을 따르는 순리의 삶이라고 하겠다.

김춘자는 인생의 전환점에 이를 때마다 철이라는 관념을 수정한 끝에 철이 무엇인가를 자성하는 단계에 다다랐다. 그에게 철이란 자연의 사리를 헤아려 순종하는 크로노토프라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이향아의 〈어머니의 시간〉

이향아의 수필에서는 시간이 강물처럼 흐른다. 시간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이향아라는 삼대에 걸쳐 이어지는 여인들의 삶을 잰다. 당연히 <어머니의 시간>에서는 나이, 세월, 삶이라는 언어가 어떤 모습으로 여인에게 투영되는 가를 밝히고 있다. 달리 말하면 딸에서 아내로, 어머니에서 할머니로 신원이 옮겨지는 동안 시간에 갇힌 여성의 존재성이 변화하는 것이다.

딸아이일 때는 나이를 두어 살 씩 앞당겨 올린다. 시집갈 나이가 되면 동갑내기보다 더 철이 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서른 살이 되면 제 나이보다 줄여서 말하기 시작한다. 60살이 넘으면 빨리 늙으면 좋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더 나이를 먹으면 시간의 흐름에 무심해진다. 이것이 대부분의 여성들이 시간을 셈하는 방식이지만 이향아 어머니가 나이를 통해 셈하는 시간의식은 아이러니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다. 어머니에게 시간이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홀로 들어야할 태산 같은 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는 가부장적 가정이 여성에게 부과하는 시간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보여준다. 내용은 독립적인 인격체를 포기하고 가문의 대를 잇는 여인으로 실아라는 것이다

나이를 자각해야만 언행을 가지런히 할 수 있고, 그래야만 진지한 삶의 자세도 갖출 수 있다고 어머니는 믿었던 것 같다.... 덕분에 일찍 철이 들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분명 동갑내기들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한 번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내 나이를 누려본 적 없었던 것 같다.

이향아도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일찍 철이 들기를 요구받는다. 당시 철이 든다는 것은 꿈과 청춘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소녀기와 청년시절을 일찍이 포기하는 것과 같다. 제약된 시공에 갇힌 작가도 인간다운 여유를 갖지 못하였고 눈물과 울음과 웃음을 마음 놓고 표현할 수 없었다.

어머니 산소를 방문하러 갔던 어느 해 한식날,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거라”하는 당부의 말을 듣는다. “오늘부터”는 희로애락의 반응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나이의 분깃점이다. 그 지점에서 사회규범을 지배하는 크로노토프가 나타난다. 그때 입은 옷이 ‘하얀’ 옷이다. 하얀 옷 정결과 순결을 요구하는 사회적 억압을 상징한다. ‘흰 옷’을 입게 된 것을 “의식을 치른다.”고 말하는 이향아는 자신의 희망과 반대로 방관자의 세월을 물려받는다. 그래서 “나는 세월을 억울하게 빼앗겼다”는 부정적인 개념을 실토하는 것이다.

어느 날 이향아는 새로운 인식에 눈뜬다. “빛나는 내 나이 이제 마흔 둘!”이라고 친구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친구는 중년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즐기면서 긍정적인 자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향아는 “한 번도 빛나는 나이를 소유해 본 적이 없었음”을 인정하듯 시간과 공간에서 주체적인 자아를 갖지 못하였다. 아니,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육신이 거처하는 장소를 가졌지만 정신적 시공성을 갖지 못하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의 의식에 따라야 했다ᆞ. 그녀는 삼십대 중반부터 홀로 살아온 어머니가 “어서 늙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뼛속 깊이 절망감에 빠져든다.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한 어머니와 시간의식에 눈뜨지 못한 자신을 동일시한 결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배신에 가까운 불효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 어머니가 마침내 시간 개념을 잊어버렸다. 하루도, 일주일도, 한해도 느끼지 못하는 치매에 걸린 것이다. 어머니는 치매의 시간을 분, 초가 아니라 자연의 변화로 계산한다.

“어머니, 분꽃이 피는 시간이여요.”

“새들이 둥지 속으로 자러가는 시간이어요, 어머니.”

모녀가 주고받는 시간에 숫자가 들어가지 않는다. 분꽃과 새가 자고 깨는 것으로 시간과 전후를 셈한다. 그러나 작가는 ‘치매’는 의학적으로 시간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로 일컫는다. 제대로 살았던 사람만이 자연과 우주의 시공으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이향아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 버린다. 그래서 <어머니의 시간>은 인간의 삶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사람은 바흐친이 말한 크로노토프라는 영역 안에서 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시간과 공간의 포로가 되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주인공이 되는가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시공성과 자아를 재정립하는 자만이 후자의 길로 나설 수 있다. 수필은 삶을 기록하는 전(傳)이므로 시공성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면 제대로 서사구도를 잡을 수 없다. 과거의 체험에 묶여버리면 더더욱 크로노토프를 피동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오늘의 한국수필이 당면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회의적인 반추에 머물고 크로노토프에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필은 과거의 행위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제시하는 글이다. 이 점에서 앞으로 한국수필은 크로노토프에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나중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