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 2014. 8월호 수록
털신을 사던 날 소녀의 운명은
권남희 수필가
이어령의〈겨울에 잃어버린 것들 2〉를 읽는 순간 나는 내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하고 말았다. 꼭 내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해도 돈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엉뚱한 짓을 벌여온 나로서는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나’ 위로를 제대로 받으며 그간 내가 살아온 행로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 길에는 털신을 사들고 그것이 전부인양 털신에 자기인생을 건 열두살 소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당시 학교에서는 적금을 넣었던 백원짜리 종이돈 몇장?을 학생에게 직접 돌려주었다. 3- 4년 정도 부었을테니 영악한 친구들은 부모님께 드려 다시 정기예금에 넣거나 중학교 입학금에 보태면서 그 돈을 가치있게 쓰는 일에 투자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 돈을 받아서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의 털신을 사고 친구에게 선물을 사주는 일에 써 버렸다. ‘사치한 옷차림에 집안 살림 무너진다’는 포스터가 벽보로 붙을만큼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이었는데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어 보일만큼 경제쪽 더듬이가 거의 없는 소녀였다. 물론 이미 오래전, 소녀가 서너 살 때부터 한쪽 더듬이만 발달해나가고 있는 것을 부모님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돈하고는 거리가 먼 소녀의 행각은 이미 시작되고 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참고서도 귀한 때 여학생 잡지를 사고 LP판 사 모으는 일, 친구들은 부모님 소원대로 교사 직업을 갖기위해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합격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영어.수학 학원도 간신히 다니는데 미술학원 등록하고 미술도구 들고 폼이나 잡던 소녀가 학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학교 성적은 신통치 않으면서 잡학 책들을 사들였는데 부모님은 소녀가 무엇을 사든지 학교생활이나 공부에 관련된 것이려니 하면서 견뎌주었던 것같다, 특히 소녀의 아버지는 런닝셔츠와 삼베 바지 두어개로 여름 농삿일에 몰두하면서 소녀가 무언가 사야한다고 돈을 요구하면 아예 묻지 않고 돈을 주었다. 언제든 철이 나려니....... 기다려주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소녀는 생활감각 부분에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독감으로 더 침잠되어 요절한 천재예술가들 생활이나 염탐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른 도시에서 유학 온 친구들은 보내주는 하숙비와 용돈을 쪼개어 적금을 붓거나 장학금을 타기위해 노력하고, 과에서 성적좋은 친구들은 학교에 조교로 남거나 졸업 후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에 몰입 했지만 소녀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공부가 신통치 않았으니 교사는 꿈도 못꾸고 하숙을 하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학교 도서관에 나가 잡지책이나 읽고 친구들 사진 찍어서 인화해주는 일을 취미생활로 삼았다. 그렇게 그런대로 부모 그늘에서는 부족함을 책잡히지 않으며 ‘자라지않는 소녀’로 살 수 있었다.
문제는 결혼을 하자 소녀의 생활력없는 태도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주부라기보다 자라지않은 소녀처럼 학생 때와 똑같은 행동이 이어졌다. 사업실패로 살던 집도 처분하고 세를 살고 있는 시집 환경이 어떤지 의식을 하지 못했다. 복학생 남편 뒷바라지는 관심도 없고 시를 쓰고 소설공부를 한다며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오로지 읽고 싶은 문학책 사는 일과 책꽃이에 책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니 시부모님은 한눈에 자라지않는 소녀의 정체성을 간파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은 의논 끝에 경제권을 맡기지 않았고 소녀는 경계대상 1호가 되었다. 살림은 시부모님이 맡고 가재도구를 사거나 심지어 집을 살 때도 자라지않는 소녀는 당연하게 의논대상이 되지 않았다.
집안행사 때마다 사촌에 팔촌까지 동서들은 모여 앉아 주식투자와 부동산 투자 이야기로 설전을 벌이고 남편에게 자문을 구하고 투자한다며 돈을 맡겨도 소녀는 끼어들지 못했다. 서로는 먼 나라 이웃나라 사람들이었다.
열 두 살 소녀의 털신을 사던, 그 과감했던 만행같은 행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자라지않는 소녀는 여전히 딴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 퇴직나이가 되자 친구들이나 친척들은 꿈꾸던 전원생활을 하러 젊은 날 투자해두었던 한적한 산촌이나 제주도 한 귀퉁이로 내려가 버렸다. 그들이 떠난 도시 모퉁이에서 소녀는 아직도 정기적으로 서점에 나가 책을 뒤적이다 수십만원어치 책을 사들이느라 카드를 긋고 있다.
폐쇄된 기착역 하나 얻어들여 영국의 외곽 안위크역에 자리한 바터북스 서점처럼 세상에서가장 아름다운 서점 만들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메일 : stepany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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