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수필집

김광숙 수필집 <밥상위 몽당연필> 크레파스

권남희 후정 2015. 1. 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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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숙수필가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 졸업.  <문학예술>등단   2014년 리더스에세이문학상 수상

   

서평    

시간불멸의 횃불을 든 김광숙 수필가

권남희 수필가(사.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

작가의 작품을 말하려면 필수적으로 작품 한 권은 다 읽어야 하지만 작품 외적으로 선행조건처럼 챙겨두어야하는 것도 있다. 작가에 대한 환경적 이해와 당대의 사건과 관련된 배경을 먼저 알아야 다양하고 객관적인 작품 해석이 뒤따르게 된다는 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수필은 그럼 점에서 유리하다. 작품을 읽다보면 살아온 이력이 어떤 형태로든 파편처럼 이곳 저곳에서 떨어져나오기 때문이다. 작가는 6.25를 겪은 세대로 잠시 가족들과 떨어져 피난지 군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대학생 때 서울로 올라와 가족들과 합류하였고, 교사생활을 거쳐 스물 일곱 살 때 결혼한, 현대 한국의 전형적 엘리트 여성이다.

첫 수필집은 자전적 요소를 품고 태어난다. 자신의 뿌리를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누구인가 생각하고 자신을 알아야 타인도 제대로 보고 평가를 할 수 있다.

2009년 이 후부터 김광숙 수필가와 함께 해 온 시간은 적지않다. 그런데도 작가에게서는 그의 감정이 어느 순간 해체되는 그런 극적인 면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작가는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었고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는 이상 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있다. 타인의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대단한 내공의 소유자인 것이다.

김광숙 수필가의 작품은 독자를 반응하게 하는 묘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일상적인 이야를 편안하게 들려주기도 하고 때로 역사적인 정치를 슬쩍 끼워넣어 읽다보면 작가의 심연으로 끌려가 진솔함에 공감하고 그의 따뜻함과 겸손함에 저절로 젖어들고 만다.

문학작품이 신화를 피해 갈 수 없을 것처럼 작가들의 작품세계는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해도 ‘삶의 원형’에서 맴돌고 있다. 모성애, 부성애의 원형. 사랑의 순진성 원형이나 마크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처럼 아담의 원형 . 햄릿의 희생 원형 등이다.

김광숙 수필가의 작품세계는 의도적으로 원형적 이미저리를 차용하지는 않지만 작품 전체에서 자연스럽게 두드러지는 것은 ‘시간불멸의 원형‘이다. 잃어버린 시간의 단면을 놓치지 않고 횃불처럼 밝혀두고 있어서다. 그것은 마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한 가족을 위해 그곳을 떠나지않는, 기다리는 자의 숙명같은 것이다.

김광숙 수필가의 마음 한복판에는 준비도 없이 일찍 가족들 곁을 떠나버린 남편이 존재하고 있다. 심지가 굳은 작가는 굳이 사부곡을 쓰지 않아도 가슴 가장 밑바닥에는 그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불을 밝히고 있다. 차를 마셔도 길을 걸어도 , 여행을 떠나도 언제나 그를 느끼며 절절했던 마음을 다 말할 수는 없으리라. 보너스처럼 그 여름 바닷가 해수욕장에서 낭만과 행복을 주고 떠나버린 그의 마음씀을 평생 안고 가야하는 작가이다. 보이지 않는 응원이라 여기고 3남매를 잘 키워나가며 긍지를 잃지 않았던 것도 그런 힘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결속된 부부의 인연이 잔인하도록 잘려나가고 남은 사람은 형벌처럼 그리움을 가슴에 달고 살아 갈 뿐이다.

허스키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의 가수가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노래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여서 온 몸으로 들었다.......

집 가까운 곳의 호텔에 자리를 마련했으니 조금 늦더라도 집에 돌아오겠다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었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 도중 운명했다는 것이다. ... 그는 내게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했고, 나는 그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병원 마당에는 유령처럼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그와 함께 했던 세월보다 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오늘 나는 가뭇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의 갈피들을 조심스레 들추어 본다.-낭만을 위하여-

작가에게는 풀지못한 숙제가 있다. 황당함, 당혹감, 낭패감 그리고 억울함이 뒤범벅된 자신의 초라한 모습때문에 ,할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그와의 마지막 시간을 갖고 제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글처럼 그와의 삶에서 이유도 모른 채 도중하차 당한 낭패감을 평생안고 살아가는 작가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렇기에 남은 자에게 시간은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 타고 있는 횃불일 것이다.

나는 더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튼튼한 삶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가려던 목적지에 미처 도달하지 못한 채,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달리던 열차에서 생소한 간이역에 도중하차 당했다. 우리를 내려놓은 열차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를 태우고 레일 위를 계속 달리다가 꼬리를 감추었다. 아득하게 이어진 빈 레일을 바라보던 그 황당함, 당혹감, 낭패감 그리고 억울함이 뒤범벅된 내 초라한 모습도 거기 생생하게 그려 있었다.- 간이역에서 도중하차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깜짝 놀랄만큼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런 일들을 겪을 때 가슴 철렁하기도 하고 상처가 덧들린 채 아픔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심성이 섬세한 가족은 서로 말을 삼가며 조심하며 배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속에서라도 간절했던 기다림은 가장의 머리카락을 모자에서 발견하면서 돌발상황이 된다. ‘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듯’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얼마나 극적인 생각인가. 그 순간만큼은 그와 함께 했던 시간에 풍덩 뛰어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튀어나올까 접어서 넣으며 ‘돌덩이를 삼킨듯’이라 했다. 작가만이 아는 참담한 아픔이다.

“아빠 머리카락이다!”

마치 그가 살아오기라도 한 듯 우리의 시선은 모자로 모아졌다. 부드럽고 가는 그의 머리카락 몇 올이 털모자에 붙어 있었다. 나는 하얀 창호지에 그것을 한 올 한 올 사려서 곱게 접었다. 그리고 꼭 그래야 할 것처럼 그의 양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20년을 헤아리는 세월의 허무가 머리카락을 싼 종이에 스며있을 뿐….

그 뿐이었다. 정지되었던 것 같던 호흡이 분별없이 뛰기 시작했다. 돌덩이를 삼킨 듯한 가슴을 쓸어안으며 그것을 원상대로 다시 접어서 제자리에 넣고 장롱 문을 닫았다.-머리카락-

작가는 졸지에 배우자를 잃고 난항한 끝에 성장한 자녀들이 결혼하여 자손들이 탄생한다. 자라나는 손녀에게서 보상을 받으며 무한한 평화를 찾기 시작하는데 상실감은 다시 새 생명의 탄생으로 충분히 상쇄되는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가족이 결속되는 만족과 과거의 행복이 복원되는 기쁨을 누린다. 인생에서 신비의 명약같은 힘은 혈육의 탄생에서 온다. 아무리 주어도 사랑은 끝없이 샘 솟으니 생명의 탄생은 세상을 바꾸게도 한다.

“지연이 옷 아니야. 엄마, 아빠, 지연이는 가족이야. 우리 가족 옷이야. 할머니도 가족이고.” 세상에! 이 아이가 가족이라는 말을 안다니. 제대로 배웠구나. 나는 지연이를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 아이가 원하는 만큼 동화책을 읽어 주고, 정서가 다른 옛날 이야기를 재주껏 각색해서 들려주고 자장가도 불러 주었다. 그래 가족이라는 것이 이런 거지. 멀리 있어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어도 만나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가족인 거다. -한가족-

작가의 절제심은 평범함을 뛰어넘는다. 그런 품성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밤은 아침을 낳는다〉에서 결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미 초등학교 때 그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 잘못은 다른 학생이 저지르고 도망쳤는데 묻지도 않는 일본인 교사에게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뺨을 맞고도 소녀는 울지 않았을 뿐더러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심성은 자라서도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학교를 다니며 더 단련되었고 삶에서 큰 고난을 만났을 때 힘으로 작용한다. ‘집념의 성’ 이었던 전 재산을 지인에게 잃었을 때 견뎌내는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터널의 끝에서 보았던 빛처럼 어둠도 인내의 끝에서 빛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군산선 야간 열차에 몸을 실은 나는 이리역에서 서울행 호남선으로 갈아탔다. 날이 밝으면 서울역에 도착하리라는 안도감도 잠시 불과 한 시간 전 쯤, 군산역에서 나를 배웅해주신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떠오르며 외로움이 와락 밀려왔다. ..... 고비, 그건 큰 고비였다. 내가 ‘집념의 성’이라고 이름지었던 알뜰살뜰 모아 온 전 재산을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 송두리째 잃고, 모진 말 한마디 못한 채 절망해 있었다. 캄캄한 터널 안에서 타박타박 걷다가 지쳐 주저앉으려고 할 때 아주 먼 쪽에서 작은 빛이 보였다. 그건 터널 끝이었다....... 밝아오는 새벽을 바라볼 때면 나는 그 터널 끝에서 보았던 작은 빛과 새벽을 함께 생각하곤 한다. -밤은 아침을 낳는다-

작가는 책을 보며 보석이나 은행통장처럼 뿌듯하게 위로받는 시간을 갖는다. 출판사를 했던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은 늘 책속에서였으니 책만 보아도 든든하고 행복을 느끼는 심정은 당연한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두툼한 책을 썼던 마르셀 푸르스트처럼 책은 고통을 잊게하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을 ‘젊은 그대’로 만들어주는 힘을 갖고 있다. 꿈의 본향인 학창시절로, 교사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선물을 누가 마다할까. 특히나 독서력을 갖춘 작가로서는 책을 준다면 꿈속에서도 달려갈 것이다.

세월에 따라 청계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 속에서도 헌책방은 늘 존재했고, 나를 불렀다. 결혼 후에도 아이들 동화책을 그곳에서 많이 사 주었다. 새 책도 50% 할인가로 구입할 수 있었으니 그만큼 더 많은 책을 읽힐 수 있어서 자주 이용했다. 즐비하게 늘어선 서점을 둘러보다 뜻밖에 괜찮은 책이라도 발견하면 그 기분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대형서점에서 새로운 정보와 새 책을 편리하게 고를 수 있다면, 헌책방에서는 다른 사람이 지나쳐버리고 간 보석을 주울 수도 있는 곳이다. ...거기 그 서점들이 있어서, 언제든지 책 몇 권 살 수 있을 만큼의 잔고가 남아 있는 금통장처럼 든든하고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거기 그 책이 있었다.-

교사이기도 했고 남편의 출판사 일을 도와 주었던 작가는 지적인 탐구정신이 강하고 실천적이다. 책은 친구이자 영혼의 생명수라고 할 수 있어 시중에서 구하지 못하는 전집을 찾느라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고 문학 강연을 참관하고 적극적으로 독후감을 써서 여러 차례

입상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박완서의 작품을 읽었다면 충분히 소설가를 꿈꾸었을 법도 하다. 주위 여건상 소설가는 마음 한켠으로 접어두고 독서를 하며 등장인물에 동화되고 카타르시스가 되었다면 그 일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독자로 남는 일도 때로 행복하다.

1987년, KBS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드라마로 방영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드라마 ‘토지’의 시청소감과 소설 ‘토지’의 독후감을 공모했다. 당시 ‘토지’는 전체 5부 중 3부까지 여섯 권이 발간되었다. 나는 그 여섯 권을 빌려다 읽고 독후감을 작성하여 방송사에 보냈다....... 나와 토지의 인연도 시작되었다. 상금으로 완간된 토지 한질을 장만하여 다시 한 번 독파했다. 소설 속에 묻혀서 지내는 동안 마치 나도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동화된 듯했다. 거슬리던 남도 사투리도 제법 익숙해지고 어느새 평사리는 어릴 때 떠나온 고향처럼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평사리에가다-

인간에게 고향은 언젠가 돌아가고싶다는 생각을 갖게한다. 김광숙 수필가의 글처럼 도시의 떠돌이같은 현대인들에게 고향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만든다.

한국인의 국민 시인처럼 <향수>로 재등극한 정지용 시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농촌이 고향은 아닐지언정 그 어딘가 그런 고향이 있을 것 같다는 착각도 든다. 이런 국민적 정서를 김광숙 수필가는‘ 영원한 내안의 고향’이라는 표현으로 멋지게 잡아냈다. 몇 년전 한국수필가협회에서 문학기행으로 방문했던 옥천의 정지용 생가를 보고 놀랍게도 정지용 시인의 가슴에 들어앉은 것처럼 묘사한 수필가의 역량도 뛰어나다. 돌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환상은 없겠지만 도시개발로 고향이 변하고 사라지는 현대사회는 마음속에 품은 그리움처럼 고향도 이미지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정지용의 시<향수>는 또 하나의 원형 ‘디지털시대의 유토피아’ 이기도 하다. 작가는 영민하여 돌아가지못하는 고향일 바에야 마음에 품어야겠다는 의지를 정지용의 시에 세웠다.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아내가 /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이 순박하고 사실적인 그림이야말로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기’를 능가하는 명화가 아닐까. 도시의 떠돌이 같은 나는 가슴에 고향을 지어 놓고 향수에 젖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개발이라는 명분으로도 훼손될 걱정이 없는 영원한 내 안의 고향인 것이다. 복원 된 시인의 생가에도 내 나름의 그림으로 빈 곳을 채워보기로 한다.- 시는 고향이 되어 -

문학작품 해석은 다양하다. 전통적인 패턴을 따르거나 페미니즘분석, 미학에의 접근, 융이나 프로이트의 심리학 등 분석 시각은 다양하지만 결국 맥락은 한가지로 귀결되지 않을까한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 작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려하나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 컴퓨터로 시작하여 스마트폰 발달로 이미 인간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전세계적으로 우울증약이 가장 많이 팔리는 현상 속에서 작가의 할 일은 더욱 많아졌다. 정신의 고향으로 남아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문학, 글로써 사랑을 주고 위안을 선물하고 안내자의 역할을 맡는 것이다.

.김광숙 수필가의 기질은 중용이다. 심신이 억압되었던 20세기 가치관에서 완전 물질주의 사회로 넘어온 21세기 극단의 가치관까지 살아오면서 혼란스러웠겠지만 비빔밥문화의 고수처럼 잘 버무려내고 있다. 여성이라고 여성을 확대해석하여 주장하지 않고 남성중심의 사회를 탓하지도, 종교적 색채도, 차별성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소재든 과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으로 조율하여 펼쳐나갈 뿐으로 넓은 바다의 잔잔한 풍경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다음 작품집에서 파도를 타고 넘는 무리수를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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