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 30초 전쟁 - 추천[0]
글 쓴 이 김학
날 짜 2005년 05월 07일 13시 47분 06초
본 문
수필, 그 30초 전쟁
김학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게 수필이다.”라는 이야기는 이제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란 가르침 때문에 용기를 얻어 원고지 앞에 앉곤 했던 초심자 시절엔 그리 어려운 줄 몰랐었다. 무엇이나 그저 끄적거리면 수필인 줄 알았으니까. 그러다가 봉사 문고리 잡듯 등단(登壇)을 하고 몇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고 나니, 수필이 두려운 상대라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러 권의 수필 이론서를 섭렵하고 보니, 그러한 느낌은 더욱 나의 무딘 펜을 옥죄여 왔다. 그 결과 다작(多作)이 과작(寡作)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많은 작품을 발표했느냐가 주요 관심사였던 게 초창기의 내 사고였다면, 어떤 수준의 작품을 발표하느냐가 지금의 내 관심사다.
내가 맨 처음 발표했던 작품은 ‘아웃사이더의 사랑이야기’였다. 대학교 2학년 때 그 작품을 대학신문에 발표했었는데 무척 반응이 좋았었다. 거기에서 용기와 자신을 얻은 나는 틈만 나면 원고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학신문은 나의 주요 발표 무대였다. 군대시절에는 「전우신문」과 월간「육군」이란 잡지가 나에게 아낌없이 지면을 나누어 주었다. 제대 후 방송인이 되고 나서는 지방신문의 문화면이 나의 단골 작품 발표장 구실을 맡아 주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변에서는 점차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음을 인식해 주기에 이르렀다.
70년대 초 나에게 ‘밤의 여로’란 프로그램이 맡겨졌다. 15분 길이의 프로그램인데 수필 한 편에 곁들여 감미로운 음악 세 곡 정도 섞어 들려주면 되었다. 날마다 원고지 열 장 안팎의 수필 한 편씩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책을 한 권 출판해야겠다는 욕심이 있어서 그 프로그램을 맡았고, 나의 뜻대로 2년 반 동안 발표했던 작품 중에서 골라내어「밤의 여로」란 이름의 방송수필집 두 권을 펴내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내일은 어떤 주제로 쓸 것인가를 생각하곤 했다. 술을 마시면서도, 식사를 하거나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 머리 속에는 주제를 잡는 일이 계속되어야 했었다. 다행히 그 프로그램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었다. 라디오 전성시대인 데다 황금시간대에 방송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밤의 여로’ 원고를 썼던 그 시절이 나에게는 수필 수업과정의 좋은 훈련기였던 셈이다. 주제 찾기나 문장 수련면에서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독자가 활자화된 작품을 읽다가 의문이 가는 단어나 구절이 나타나면 사전을 찾아보거나 다시 읽으면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방송은 그럴 짬이 없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취자가 방송을 듣다가 이 단어가 무슨 뜻일까 의아해 하더라도 청취자의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아나운서는 일정한 속도로 계속 읽어내려 가기 마련이다. 청취자의 궁금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단어 하나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보면 청취자는 그 작품 전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러한 경험 탓으로 나는 수필을 쓸 때 난해한 표현보다는 쉬운 어휘를 즐겨 사용한다. 문장의 길이도 간결하고 짧은 것이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방송에서는 ‘30초 전쟁’이란 말이 있다. 어떤 프로그램이 방송을 시작하여 30초 내에 시청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시청자는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린다는 뜻이다. 요새처럼 리모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시작한 지 30초 내에 시청자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지 않으면 안 된다. 수필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요즘처럼 수필집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읽을 거리가 넘치는 세상에 어떤 독자가 고지식하게 한 편의 수필을 끝까지 읽어 줄 것인가. 그러니 방송과 마찬가지로 수필의 경우도 30초 내에 독자를 사로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방송에서 프로그램의 ‘제목’이 중요하듯 수필의 ‘제목’도 마찬가지다. 독자의 호기심을 끌 수 있는 ‘제목’이어야 한다. ‘제목’이 독자를 부여잡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해도 독자는 내용을 읽지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 것이다. 여기에서 ‘제목’의 중요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방송에서의 오프닝 멘트(Opening Ment)는 수필의 ‘서두’와 같다. 제목에 끌려 독자가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순간적으로 결심을 하게 되면 수필의 ‘서두’를 만나게 된다. 이 ‘서두’에서 산뜻한 표현 새로운 언어로 독자를 붙잡고 놓아주지 말아야 한다. 진부한 표현은 절대 삼가야 한다. 독자는 언제라도 시선을 거둬버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대임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나운서가 정상적인 속도로 2백 자 원고지 한 장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30초다. 따라서 수필에서는 ‘서두’의 원고지 한 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독자도 원고지 한 장 정도 읽고 나면 이 작품을 더 읽어야 할 것인가 포기해야 할 것인가를 판가름하기 마련이다. 읽을 거리가 없던 시절이라면 모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독자의 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방송과 마찬가지로 수필도 30초 전쟁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방송의 내용은 수필의 ‘본문’과 같다. ‘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두’까지는 독자의 재미와 호기심을 자극하여 끌고 왔다 하여도 ‘본문’에서 독자가 시선을 거둬 버리면 작가의 노고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본문’에는 사실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메시지가 농축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마치 제약회사가 약을 제조할 때 질병치료에 도움이 되는 약을 색깔과 맛이 좋은 당의정으로 감싸놓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는가. 당의정은 수필의 ‘서두’나 진배없다고 하겠다. 독자를 ‘본문’까지 읽도록 유도했으면 그 작품은 일단 거의 성공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방송의 클로징 멘트(Closing Ment)는 수필에 있어서 ‘결구’나 같다. ‘결구’에서는 촌철살인의 함축성과 맛깔스러운 어휘로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야 한다. 독자가 다 읽고 나서 머리를 끄덕이거나,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해야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작가와 독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이신동체(異身同體)의 경지에 이른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수필 한 편 한 편을 쓸 때 늘 염두에 두는 내 나름의 작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얼굴이 다르듯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듯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도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자기에게 걸맞는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도 좋을 줄 안다. 방송이라고 하면 뉴스·드라마·쇼를 먼저 떠올리기 쉽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다큐멘터리가 시청자의 시선을 끌고 있다. 실크로드니 지리산의 사계(四季) 또는 독도 365일, KBS일요 스페셜,환경 스페셜 따위가 익히 알려진 다큐멘터리다. 나는 방송에 있어서의 다큐멘터리가 형태상 수필과 너무 유사하다고 여기고 있다. 신문에서의 사진이나 방송 다큐멘터리에서의 관계자 인터뷰는 수필에서의 예화(例話)처럼 시청자나 독자에게 생생한 현장감과 사실감을 인식케 하여 공감대를 넓혀주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고 믿는다. 좋은 예화를 많이 발굴 수집해 두는 것도 좋은 작품을 생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문학적 저축이 아닐까 싶다.
방송에서는 편집이 대단히 중요하다. 라디오의 녹음구성이나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영상구성(影像構成)에서도 편집은 꼭 필요하다. 녹음구성의 녹음 취재물이나 영상구성의 그림은 필요량의 작게는 서너 배에서 많게는 열 배 이상까지 확보해야 한다. 그 많은 양(量) 가운데서 꼭 필요한 에센스만 빼내는 것이 이른바 편집의 묘미이다. 한 편의 수필을 창작하는 데도 그러한 노력과 정성이 담겨야 할 줄 안다. 녹음이나 영상 취재물은 곧 수필의 소재라고 바꿔 생각하면 된다. 주제에 맞는 많은 소재를 확보한 다음 그 가운데서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수집된 소재 중에서 꼭 필요한 것만을 남기고 버리는 일, 그것이 바로 방송에서 말하는 편집이나 뭐가 다르겠는가. 그것은 곧 수필의 퇴고나 다를 바 없다.
글은 곧 사람이라고 했다. 글씨도 마찬가지다. 글이나 글씨에는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가 나타난다고 보기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특히 수필은 자기 반성의 문학이 아니던가. 수필은 ‘내 탓’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 탓은 없이 남의 탓만 하는 글은 수필일 수가 없다. 그런 작품은 독자의 거부감만 살 뿐이다. 문장은 부드럽고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이 흐르듯, 쟁반 위에서 옥구슬이 구르듯, 막힘이나 걸림이 없었으면 한다. 성깔 있는 과격한 어휘나 야한 표현은 삼가야 하리라고 본다. 문학수필을 지향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요구가 아니랴. 흔히들 수필이란 무형식의 글이라고 한다. 일정한 틀이 없다는 이야기다. 뒤집어 생각하면 고정된 틀이 없으니 형식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작가 나름대로 독창적인 형식을 개발할 여지가 많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주제에 따라 소재에 따라 작가의 취향에 따라 나름대로의 형식을 창안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초창기에는 자기가 흠모하는 선배를 본받다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자기 입맛에 맞는 요리법을 개발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 될 것이다. 어릴 때 형의 옷을 물려받아 입다가 나중에는 자기 몸에 맞춰 옷을 지어 입듯이······.
나는 좋은 소재나 예화가 눈에 띄면 스크랩을 하거나 노트에 메모를 하여 저장해 둔다. 마치 여유 있을 때 돈을 은행에 저금하여 두 듯이. 그래야 유사시에 손쉽게 꺼내 쓸 수 있을 게 아닌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수필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는다. 그러한 독서를 통해 창작기법을 받아들인다. 거기에다 내 나름의 아이디어를 보태면 나의 특성을 세울 수가 있어 좋다.
나의 수필은 청자나 백자가 아니라 질그릇에 가깝다고 여긴다.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체취가 배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 때문일 것이다. 나의 수필은 고소한 숭늉 맛이었으면 한다. 톡 쏘는 콜라나 사이다도 아니고 무색 무취한 맹물도 아닌 누룽지 맛이 담긴 숭늉 같았으면 한다.
나의 수필은 비빔밥 같기를 바란다. 갖가지 채소와 고기와 밥에 고추장을 넣어 비빈 비빔밥. 색깔로 보아도 먹음직스럽고, 영양 면에서도 모자란 점이 없는 게 비빔밥인 까닭이다. 나는 지금까지 8권의 수필집을 선보인 바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미흡하기 이를 데 없다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부끄러움은 나로 하여금 더 좋은 수필을 빚으라는 채찍이 된다. 신기록에 도전하는 마라토너처럼 나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길만이 내가 추구하는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닫고 있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세월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나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수필의 외길을 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