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용

허영자 시인은 약하면서 강하다

권남희 후정 2009. 7. 12. 10:50

뜨겁고도 위험한 가연성의   허영자 시인


허영자 시인은 그의 시처럼 인간관계에서도 형식을 따지지 않는다. 공정함을 잃지 않는 핵심이 있을 뿐이다.  2007년 월간 한국수필 월호에서 권두대담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접근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졌다. 혜화 전철역에서 샘터사로 출구를 나와 걷는데 선생님이 보인다. 아직  喪主의 차림이다.            



장소 : 헤화동 석정 

일시 : 2009년 5월 20일 수 오후 6시

대담: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진행/ 사진  : 권남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허영자 시인은 얼마 전 모시고 있던 어머니를 잃었다. 지난 여름인가, 원고청탁을 위해 전화를 드렸는데 ‘90 넘은 어머니를 칠십이 돼가는 이 노인이 보살피느라 원고쓰기 힘들다’고 하셨다. 그때 ‘노인‘이라는 시인의 말이 참 생소하게 들렸다. 선생은 언제나 내 머릿속에 가녀리고 단아한 시인의 모습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모습은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고운 자태 그대로였다.

“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연희 발행인이 진심어린 인사를 드린다.

“ 잡지 하기도 어려운데 이렇게 끌어나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합니까?”   

저작권협회회장을  얼마 전 퇴임한  허영자 시인의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씀은 여전하다.   “ 건강할 때 체크하세요.”

허영자 선생님은 일년 전에  시작한 목 디스크가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심해져 통증 클리닉을 다니신다고 한다. 2년 전의 대담 인터뷰를 말씀드리며 가능하면 다른 시각으로 선생을 비추어보겠다고 했다. 박목월 선생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했던 선생이 46년만에 다시 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2008년도 12월 제 1회 목월 문학상을 받으신 일을 뒤늦게 축하드렸다. 수상작품 ‘은의 무게만큼’은 어머니에 대한 시이다. 당시 어머니는 병중이어서 모르셨다고 답한다.  

선생님의 대부분 시들은 심사평에서처럼 압축되고 간결한 시풍이 목월의 시세계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시 <휘발유> 에 그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휘발유같은/ 여자이고싶다 / 무게를 느끼지 않게 / 가벼운 영혼 / 뜨겁고도 위험한 / 가연성의 가슴 / 한 올 찌꺼기 남지 않는 / 순연한 휘발 / 정녕 그런 액체같은

 

지연희 문파문학발행인 /오른쪽 허영자 시인

 

 

 허영자 시인 (흑백수정 )

 허영자 시인과 권남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저는 자꾸 산문시가 나오는데 어떡하지요. 지연희 발행인이 묻는다. 10년 넘게 시작법을 가르치면서도 시 앞에서 그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번번이 느낀다.

소재에 따라 길게도 쓰지 않겠어요? 물론 목적시들, 행사를 위한 시나 칭송하는 시의 경우는 길게 쓴다고 한다. 형식에 지나치게 구애 받지 말라는 의미이다.

선생을 보면 문학이 사랑 받았던 시대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김남조 시인의 제자인 김후란, 신달자, 허영자 모두 문단의 별이 되었다. 부러운 마음도 있어 당시 여성문학인들은 지금의 연예인처럼 인기스타급이었기에 영부인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에도 가지 않았느냐고 운을 떼었다.

인기라기보다 희소성이라고 한다. 1960년대 들어 여성작가들이 늘어났는데 그 때 서정주 시인이 추천한 동국대 학생 박정희, 이화여대 김혜숙, 서울대 국문과 김후란 모두 학생이면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사상계는 강계순 시인 , 구혜영 소설가를 배출하였다. 작품을 써도 실을 곳이 없던 때 신문 1면에 시를 한편씩 실어 주었고 여성들로도 동인활동이 충분할 만큼 인적구성이 이루어졌다.   

당시 결성된 <청미> 동인은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냐고 지연희 발행인이 묻는다.

35년 활동하고 35주년 때 해체식을 갖고 지금은 교류만 하고 있다. 돌아보니<청미>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동인회이며 동인지라고 해야 옳다. 남성들이 문학사를 쓰다보니  큰 가지를 잘라냈다고 본다. 그 이전 세대들의 청록파나 문학사에서 다루어주지만  여성동인지는 그렇게 평가받지 못한 점이 늘 아쉽다. 지금 재조명 사업으로 ‘문학의집.서울’에서나 한국여성문학인회에서 작고 여성문인을 다루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청미동인은 처음 김후란. 김혜숙. 김숙자. 추영수. 허영자. 김선영 시인이 우정으로 만나다가 시집을 같이 내면서 활동했다. 그런데 나중에 박영숙 .김숙자 두 분 선생이 미국을 가고 뒤를 이어 입회하신 분이 김여정. 임성숙.이경희 선생이었다. 주 활동은 시화전, 독자와의 대화, 시판화전이었고 신세계 백화점에서 시판화전을 할 때 그림을 맡은 화가들이 천경자. 박노수, 박수근, 김기창, 서세욱. 박래현으로 판매도 이루어졌다. 시화는 시와 그림에 걸맞게 해야 한다.  당시 기억이 남는 에피소드는 김숙자 시인의 ‘나목 ’시에 박수근 그림을 받았는데 후에 박완서 소설가가  ‘나목’을 발표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요즈음 다시 동인지 시대가 돌아온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다. 이제 꼭 신춘문예나 특정 잡지를 고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시대이다. 잡지가 문제가 아니라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문열,  김주영 모두 월간문학 출신이고 박완서 소설가도 늦게 나와 얼마나 왕성하게 활동했는가.

시 앞에서는 주눅이드는 나는 ‘어떤 시를 읽어야 좋을까요’ 그런 뻔한 질문을 하고만다.     

시인이라고 시만 읽는 것은 아니다. 고전시가 ,예를 들면 ‘정철시가 ’ 등도 많이 읽어야 한다. 물론 나는 학생 때   헤세의 시, 라이너마리아 릴케, 영버틀러. 영미시인 등 을 주로 읽었지만 소설도 즐겨 읽었다. 도스또예프스키, 마르셀 푸르스트, 아우렐리우수의 ‘명상록’ 나도향의 ‘그믐달’ 김진섭의 ‘청춘’ 이런 작품도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소양을 길러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시를 향한 애정은 다른 나라에 비해 각별한 이유를 다시 묻는다.   

요즈음은 산문시대라 하지만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심성이 시를 사랑하게 되어있다. 최초의 문자로 남아있는 ‘공무도하가’ 는 문화유산 최초의 시다. 우리나라 국민의 시적 정서를 알 수 있는 예가 MBC 기획으로 국민 대상  시조를 모은 적이 있었는데 그 엄청난 양의 시조에 무척 놀랐다. 그 때 시조가 우리 국민의 노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히 지도받지 않아도 국민 정서에 녹아있는 게 시정신이다.     


지연희 발행인은 ‘ 시를 쓰는데 있어 언어문제와 짧은 언어호흡과 긴 호흡에 대해 궁금한 점’을 확인한다.   

 문학의 장르를 구분 할 때 시, 소설, 희곡 등이 일단 길이와 형식에 의존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내용과 형식은 필연적 관계지만 .형식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시만 보더라도 과거는 운문 시대였지만 지금 향가를 쓰는 사람은 없다.  정형시에서 자유시가 되고 산문시가 나오고 있다. 재미난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시의 형태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 어렵다. 행만 바꾸었다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언어는 같지만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 축약과 행간의 비유가 있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런 경계허물기지만 시는 그래서 더욱 어려워졌고. 다양하게 물고 물리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라디오만 있다가 TV 분야가 나오고 다시 공중파, 케이블 등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새로운 형태가 나오고 하는 세상이다. 백남준이 왜 유명해졌는가. 미술과 접목시킨 비디오 아트를 아주 일찍 창조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정서에 따라 사람들의 정서가 시에 반영되는 것을 본다. 외형적으로 산문시라 하더라도 전달력과 사회비판 등이 있어야 한다.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 은 좋은 시이다.   

어쨌든 시인은 에스프리(시정신)가 있어야 한다.

소설 ‘어머니’를 쓴 고리끼의 시에 당시 귀족과 천민의 빈부차이에 대해 시를 썼는데

부잣집에서 일하는 여자의  아들이 똑똑하니까 마나님이 칭찬을 하곤 했는데  죽었어요.

마나님이 조문을 가서 보니 그 여인은 엉엉 울면서 국을 떠 먹고 또 울다가 국을 떠 먹고 있는 모습에  얄미운 마음이 든 마나님은 ‘ 국이 입으로 들어가냐? 도대체 주검을 앞에 두고 ..’ 야단을 치자 여자는 ‘마나님 나는 아들이 죽어서 땅이 꺼지는 슬픔을 느끼지만 이 국에는 소금이 들어 있습니다.’이렇게 작품은 당시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  전매품목에 소금이 들어  있어  그 값이 얼마나 비쌌는가. 착취 당하는 천민을 

 문태준 시‘ 가재미’ ‘수평’ 은 시 형상성이 얼마나 명료합니까. 피천득의 수필은 시처럼 응축이 되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시를 쓰겠다’고  목월문학상 시상식소감에서 말씀하셨는데  문학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본다.   

 타고난 재능은 있어도 천재성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기에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알고 하나를 경험하면 열 개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재능 위에 노력이다. 결국 글로 사람을 느낄 수 있고 글은 인간의 반영이다. 자기를 투시하면서 잘 닦으면 글도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교양을 쌓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전문가로서 , 문필가로서 전문의식, 프로의식을 가져야한다. 자기 업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경주시키고 전인적 몰두와 전심전력의 쏟아 부음이 필요한 게 작가의 길이다. 치열한 창작정신이 있어야 한다. 문학애호가로 남아도 좋겠지만 창작으로 끝장을 내야한다는 정신도 필요하다.

창작의 고통을 필생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작가의 길을 안 버리고 끝까지 쓰는 사람을 전문작가라고 하겠다. 물론 김광균시인은 30대까지 이미지즘(모더니즘을 시각적으로 쓴 ) 시를 써 이름을 날렸지만 문필업을 접고 다른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까운 시인이다.    

 시에 대한 이야기라면 밤이라도 세울 것 같은 두 선생 사이에서 슬쩍 화제를 돌린다.

나태주 시인이 쓴 <허영자 시인> 보셨나요. 지연희님이 낭송을 한다.  

무릇 훤칠한 여자란/ 그가 가진 가슴 속의  살향기와 따스함과 지혜로써 / 살맞은 산짐승인양  무잡한 사내들을 길들이나니,/ 천천히 천천히 길들이나니/ 호령보다는 낮은 속삭임으로 /교태보다는 맑은 눈빛으로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홀리나니/ 홀리나니...

시인이시여 / 신라의 한낮 찬란한 함바꽃이었던 / 선덕여왕의 후신인 허영자 시인이시여

내 당신 앞에 지귀되어 무릎 꿇으리까! / 당신의 황금팔찌를 탐하리까! / 오로지 영롱하고 맑은 시로써 당신은 / 세상의 모든 사내들의 연인이 됩소서/ 술취해 계집질하고 나오는 / 부끄러운 사내들의 이마 위에도 / 새벽별 뜹소서


선생은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아쉽지만 무남독녀로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여 살얼음 강을 조심스럽게 건너듯 관리 하시는  선생을 보내드려야 했다. 여기 저기 카페와 상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동숭동, 학림다방이 건너다보이는  거리에서 수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허영자(許英子 1938년 8월 31일 - )는 시인.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으며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2년 《현대문학》에 박목월 추천〈도정연가〉 〈사모곡〉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은의 무게만큼』 소장본 『허영자 시집 얼음과 불꽃』외 다수 

 2004년 제20대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수상 2003년 제9회 숙명문학상. 2008년 제1회 목월 문학상 . 한국저작권 협회 회장 역임. 시인협회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