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용

에세이 플러스 2009.4월호 저자와 함께 '권남희 수필가 '

권남희 후정 2009. 3. 29. 14:34

 

 2008.8 제 1회 조경희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취재하다가 사진 한장 장

 2008.5. 오사까 세미나

 1987년 봄 어느 사진작가가 덕수궁에서  

  사진 아들과 함께 홍콩 2008.1

 

에세이 플러스  2009년 4월호 저자와 함께 104쪽부터 108쪽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작가  권남희 수필가


레스토랑 세실

 그곳에서 우리의 첫 만남이 있었다.

졸지에 나는 권남희수필가를 조망해보는 관찰자가 되었다. 세실도 사라졌고 우리 만남의 중심이었던 심영구 회장도 고인이 되었다. 망루에 올라앉은 느낌으로  혼자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언제였던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가 ....... 족히 십오 년은 넘었다.    

김혜숙 수필가 - 내가 수필가로 등단하기 전 초등학교 교사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첫 수필집 『미시족』을 건넸다. 책표지의 작은 타이틀 미시족(결혼했지만 처녀같은 주부-대충 이런 화두가 당시 유행했다 )처럼 그녀의 자태는 살짝 ‘처녀 같은 주부’였다. 당시로는 제목도 획기적이었는데 문장도 감각적이고 신선했다. 약력을 살피니 등단이 생각보다 빨랐다. 그 때 혼란스러웠던 점은, 심영구회장보다 권남희 수필가가 훨씬 먼저 등단한 문단 선배라는 사실이었다. 그 때 당시 삼십 초반이면 수필가로는 좀 이르다싶지 않았어요? 물었다.

권- 우연한 기회로 수필가로 등단했는데, 당연히 그 때 선배들이 왜 수필로 등단했냐고 소설로 또 하라고 한마디씩 했지요. 문학 동아리에서 문단 선배님들을 모시고 수필. 시, 소설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봄 학기 김동리 소설가에게 강의를 듣던 중 숙제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쓸까......궁리하다가  집에서 기르는 선인장을 보면서 ‘아버지와 선인장’을 써갔는데 진솔하다며 월간문학 수필로 응모해보라고 하셨어요. 친정아버지에게 손가락 마디만한 선인장을 얻어다 10년 넘게 기른 이야기인데 가작으로 뽑혔습니다. 근데 그렇게 좋은 일에  인사도 드릴 줄 몰랐으니 얼마나 한심했는지...... 오히려 ‘영원히 공경하라’는 의미의 붓글씨를 선생님께 선물로 받기만 했습니다. 그 일 년 뒤 지연희수필가(문파문학 발행인)의 채근으로 다시 응모를 하여 수필 신인상을 받고 나중에 청담동 김동리 선생님 댁으로 인사를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귀중한 인연이었어요. 잘 해드리지도 못해 후회가 됩니다. 그 뒤로도 현대문학 연구반에서 신동욱 교수에게 소설공부를 했지만  수필이 좋아 수필만 써 오고 있습니다.           

김- 말수도 적고 차분하며 온순해 보이는 외모에 비해 그녀는 엉뚱한 행동파이기에 늘 변화를 꿈꾸듯 움직인다. 게다가 그녀의 인생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삼십 후반이었을 때까지 내가 알고있는 그녀는 수필작가이며 살림만 아는 전업주부였다. 어느 날 오피스텔에 집필실을 열고 일을 벌였다. 논술 책을 쓰고 초등교사 직무 연수강의를 시작으로 독서논술지도와  수필 강좌를 해오고 있으며  현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천상 구르는 돌일 수 밖에 없는 그녀가 또 어떤 일을 벌이고 저돌적으로 밀고 나갈지  궁금하다.

- 공병호박사의 ‘명품인생을 위한 10년 주기’를 생각하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 나왔다고 가만히 있다가는 도태되고 마는 세상입니다. 10년 주기로 어떻게 노력 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20대까지는 순전히 부모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돌발 사태로 결혼까지 했으니 남편에게 여생을 의지하면 되겠다싶었는데 나의 계산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 깨달은 게 어떤 일이 있어도  ‘홀로 서야한다’는 각오였습니다. 남편이 열심히 여자들과 인생을 즐길 때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고독을 친구삼아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믿고 있지요. 

그리고 강의를 시작할 때도 10년을 채운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수강생이 두 명이든, 이십 명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했습니다. 새 학기가 되면 프로그램 짜는 재미로,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쓰는 즐거움으로 하다 보니 그야말로 아무 연고도 없는 이철호 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이 전화를 걸어와 한국수필 편집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의외라고 생각하여 당황했었습니다. 아끼는 제자들도 많았을텐데....... 그 때는 주변에서  염려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학연도, 지연도 없는 나를 깜짝 발탁해준 점에는 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수필은 때로 ‘그녀의 일을 정말 쓴 것일까?’ 할 정도로 다른 여성 작가들에 비해 수필 내용이 너무 솔직하고 때로 파격일 때가 있다. 두 번째 수필집 ‘어머니의 남자’ 제목도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고 어떤 점에서는 불이익도 겪었다. 그 꾸밈없음이 오히려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손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나의 솔직함으로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반전효과이지요. 문학의 뿌리는 결국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야기구조에 있는 것  아닐까요? 가식을 벗고 내면 깊숙한 곳에 도달하여 내 삶을 보여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 내 안의 주홍글씨’라는 수필을 쓸 때도 사실 나를 벗기면서 이 세상의 수많은 또 다른 나에게 그렇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지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 아이를 낳고 동거생활부터 시작한 나에게 격려보다 돌 던지는 사람이 더 많았던 순결지상주의 사회 분위기에서 나는 오래도록 죄책감과 수치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더하면서 적당히 감추고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는 혐오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는 없고 남 이야기로 일관하는 공허한 글만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요. 저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자연예찬이나 여행기같이 일정한 패턴을 따르며 안정권에 자리잡는 것도 좋겠지만 저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외딴 집에서 살았던 호기심 넘치는 아이였기에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 화가가 꿈이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네 번째 수필집에서 확실해진다.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그녀의 수필에 끌어들여 그림 잔치를 벌였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상파 화가들에 주목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인상파 화가들은 확실히 역사화나 종교적 그림이 대세였던 시기에 큰 획을 그었고 그림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도 만들었잖아요.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일으켰지만. 우리나라 김승옥 소설가가 전쟁문학이 대세인 그 때 <서울, 1964.겨울 >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그렇지요. 이제 수필도 획기적인 무언가가 나올 시기가 아닌가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표현주의. 인상파.......등 재미있지 않을까요.

*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색다른 일을 찾아내는 그녀, 결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닌 그녀의 10년 후가 몹시 궁금하여  물었다. 왜냐하면 지난 해 초여름 그녀의  네 번째 수필집 사인회 행사장에서 고향집에 독서건물을 짓고 싶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 세계적인 작가들과 교류를 하며 우리 문학의 소비시장도 넓혀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한 세기를 넘게  우리는 주로 외국문학을 소비해주는 입장이었지만  우리도 뛰어난 작가가 많지 않나요?  영화나 음악만 한류가 아닌, 문학도 한류 바람이 불었으면 합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고향에 돌아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을 헐고 일본의 다치바나 다까시처럼  독서건물도 짓고 싶고 영국의 헤이온와이 같은 헌책방 왕국을 건설하는 꿈도 꿉니다.    

권남희 ( 1987년 월간문학 수필등단. 현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 교보문고 잠실점  낭독행사 주관. MBC아카데미 잠실롯데 목요수필 강의. 수필집『미시족』『어머니의 남자』 『시간의 방 혼자 남다』『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 』 외 공저 다수. 제 22회 한국수필문학상. 새천년 문학상  독서논술 사이트 119STUDY.COM 공동창업.

 논술자료집 『실전 논술 쓰기 33』 『초등 창의력 그림 자료집 』외

 

글 김혜숙 수필가. 에세이 플러스 운영위원 .한국수필가협회 공영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