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2

2010. 월간 한국수필 2월호

권남희 후정 2010. 2. 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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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백(乳白)

                                  鄭 木 日수필가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 ) 


 유백의 문 안에 편안한 의자가 있다.

 마음을 온유하게 해주는 눈빛이 있다.

 어머니 무릎에 앉아 보는 달처럼 부드럽고 환하다.  

 나는 조선 달 항아리 빛깔을 사랑한다. 달 항아리 빛깔은 반사하는 빛이 아니라 꽃이 되고 향기로 남은 빛깔이다. 엄동(嚴冬)의 땅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백매(白梅)와 뒤이어 피는 흰 목련꽃, 아카시아 꽃과 찔레꽃을 좋아한다. 그 꽃들의 빛깔이 유백색이다. 유백색은 안으로 깊은 고요를 지니고 있다.  

 흰 빛이라도 유백(乳白)이 있는가 하면, 설백(雪白)과 청백(淸白)이 있다. 우리 민족은 어째서 흰 빛을 유달리 좋아했을까. 흰 옷을 즐겨 입었을까. 흰 창호지 방문을 보고 새벽을 맞았으며 백자를 사랑하였던 것일까.

 조선시대엔 무명옷 차림의 도공들이 5백 년 동안이나 백자를 만들어내는 데 정신을 쏟았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모양 좋고 빛깔이 선명한 도자기를 빚어내는 데 열중하는 동안, 왜 화려한 색감을 다 버리고 오로지 백색 탐구에만 정성을 기울여 왔던 것일까. 

 조선이 유학을 통치철학으로 삼아서 절제, 수양을 생활 덕목으로 삼았다고 해도, 5백 년간 백색에 대한 추구와 미의식은 다른 민족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인의 미의식 속에는 유독 백색에 대한 애착과 선호감이 있는 것일까.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이란 말을 들었다. 태어날 때와 죽었을 때의 옷은 흰 옷이었다. 흰 빛은 깨끗하고 정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롭고 성스러우며 때 묻지 않은 결백성을 드러낸다.

 어렸을 적에 산과 들판에서 곧잘 백자 파편들을 보곤 했다. 나는 백자 사금파리에서 조선시대의 하늘을 보았다. 백자 사금파리에 담긴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조선인의 영혼이 담겨 있었다. 애써 백자 빛깔을 빚고자 한 것은 영원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영원에 닿으려면 한없이 맑고 깨끗해야 한다.

 백색의 오묘한 깊이에 닿으려면 쉼없는 연마와 노력 끝에 깨달음의 하늘을 만나야 한다. 인간의 영혼을 영원으로 인도하는 빛이 있다면 백색이 아닐까. 백색의 끝없는 탐구, 탐닉, 도취 속에 반 천년이 흘러갔다.

 유백색은 아기를 먹이기 위한 어머니의 젖빛을 말한다. 우유 빛깔과 굴 빛깔도 흡사하다. 달빛에 젖은 백목련 빛이 유백색이며, 짙은 향기를 풍기는 찔레꽃이나 아카시아 꽃이 유백색이다.

 또 민들레 줄기나 엉컹퀴 줄기에서 나오는 흰 액체의 빛깔이 유백색이다. 젖빛은 곧 생명의 빛이다. 불순물이라곤 섞이지 않은 순수한 빛깔이면서, 모성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듯한 성스러움과 정결함을 지녔다. 유백색은 상처나 아픔이 있으면 아물게 하고 말끔히 치유하게 할 듯한 모성의 빛깔이다.

 달 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백자 빛이 광택으로 눈부시지 않고, 마음으로 감싸 품어주는 것을 느낀다. 유백색은 갓난아기처럼 순하게 만들고, 편안하고 깨끗하게 해주는 자비로운 빛깔이다. 조금도 자극하거나 현혹하지 않고  영혼을 감싸주는 빛깔이다. 유백색을 보면 평화와 부드러움과 사랑을 느낀다. 울긋불긋하고 화려한 색에서 느끼는 들뜬 감정과는 다르다.

 인간에게 가장 편안하고 만족감을 주는 광경은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아기의 옷과 기저귀는 흰 옷이 가장 좋아 보인다. 아기와 엄마의 눈이 서로를 바라보고, 숨결과 심장 박동이 닿아 있다.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평화와 사랑이 넘쳐흐른다.  유백색은 순수의 빛, 모성의 빛이다. 더 이상 욕심이 없는 마음 빛깔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 텅 빈 허공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선조들이 왜 흰 빛깔에 깊은 관심과 애착을 보였을까. 티끌 하나 묻지 않고 먼지 하나 없는 청결하고 순수한 인생을 원하였던 것일까.  마음속에 매화를 피워내고 보름달을 품고 싶었던가보다. 

 살다보면 탐욕의 빛깔, 성냄과 어리석음의 색깔이 얽혀서 알록달록 울긋불긋해져가는 제 모습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유백색을 보면, 탐욕으로 생긴 근심의 색깔을 씻어내고 싶어진다. 마음에 묻은 온갖 색깔들, 욕망의 상처들을 지우고 무욕의 빛깔로 돌아가고 싶다. 마음을 비워내 자유를 얻는 것, 막혔던 마음의 샘을 솟구치게 함으로써 정화의 세계를 얻고 싶다.

 유백색은 비어있고 탐하지 않는다. 색깔이되 비어있는 영원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