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의 독서일기

천재예술가 만 레이가 파리로 간 이유

권남희 후정 2012. 5. 3. 11:47

 

 

 

나는 다다다. 만레이 Man Ray 자서전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 고등학교 때까지 건축학에 관심을 보이다가 장학금을 받고 대학의 건축학과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포기하고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며 그림에몰두했다. 세잔과 피카소의 그림, 브란쿠시의 조각등을 접하며 유럽 현대미술에 매혹되었다. 1913년 아머리 근대 미술전에서 유럽의 첨단 회화유파들의 그림을 보고 결정적으로 유럽예술의 선진성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회화작품들을 주로 발표하다가 마르셀 뒤상과 프랑시스 피카비아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다다이즘에 접근했다. 1921년 파리로 옮겨간뒤 본격적으로 다다이즘운동에 참여했고 1924년경부터는 앙드레 브루통이 이끌던 초현실주의 운덩에 참가하였다. 파리체류 초창기부터 사진작업을 주로 했으며 유럽의 문화계 인사들과 각계 명사들의 사진을 무수히 찍었다. 사진의 표현영역을 넓히는 여러가지 혁신적 기법을 발명했는데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 직접 피사체를 배치하여 거기다가 빛을 비추어 나타나는 레이오 그래프, 솔라리제이션 기법등으로 병성을 얻었다. 영상에 대한 관심에 더해 다다이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만든 아방가르드 영화의 걸작 <에마크 바키아> <불가사리> < 이성으로의 회귀> 는 유럽 전역에서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 만 레이는 할리우드로부터 연출제안까지 받기도 했다. 2차 대전 발발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1951년까지 할리우드에서 살았지만 미국의 척박한 문화풍토와 자신의 예술에 대한 몰이해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그 후로는 주로 회화 작업을 했다. 프랑스 정부는 만 레이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주려했으나 부조리와 기존 가치의 파괴를 신조로 하는 다다이즘 운동의 순수성과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며 수상을 거절했다. 하지만 죽기 얼마전 마지막 생일날 , 주위사람들이 훈장증으로 메달과 리본을 교환해 달아주었다. 그는 가슴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달고 머리에는 오래된 가발을 쓰고 시가를 피우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1976년에 사망해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 이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