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2 여성신문 수록 원고
정령의 말 그 씨를 뿌려주고 떠난 《혼불》최명희 소설가
권남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stepany1218@hanmail.net
전주 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에서 경기전 뒷담 중간은 최명희 길이 있고 그녀가 자부심을 갖고 사랑했던 화원동(현재 경원동) 작가의 생가터도 있는 곳이다. 그 옆길로 들어서면 최명희 문학관이 보인다.
비가 그친 문학관은 더욱 맑고 정갈하게 방문객을 기다렸다. 문학관 정원에는 아기자기한 조각품과 소품들이 놓여있어 마치 최명희 작가의 독자사랑을 보는 듯 하다.
전주 최명희 문학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작가의 육필원고가 쌓여있는 전시실이다.
국내 월간지 최장기록을 세우며 월간 신동아에 소설을 연재하는 7년 동안(1988-1995) 손으로 썼던 원고의 삼분의 일 정도가 통유리 안쪽에 원고 탑으로 세워져 있다. 그 앞에 서니 부끄럽다. 작가에게 질타를 받는 순간이다. 작가들의 육필원고가 전시되는 행사에 내 원고도 초청되었다는 사실에만 흥분되어 고향이지만 나는 자주 찾지 않았던 전주 한옥마을까지 온 것이다. 지하 비시동락지실(때를 정하지 않고 노소동락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대관가능)에는 손으로 쓰는 원고가 귀한 탓에 문학관에서 전국작가들에게 육필원고를 받아 작가별로 돌아가면서 전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시형 문학관인 이곳은 접근성이 높아 전주한옥마을을 찾는 방문객들과 학생들로 활력에 차 있다. 입구에는 지역문인들이 기증한 작품집들을 자유스럽게 빌려볼 수 있도록 한 책꽃이가 놓여 있고 전시실 입구 평상에는 원고지와 필기도구가 있어 언제라도 작가의 문장을 육필로 필사할 수 있도록 ‘필사의 탑’자리도 있다. 마침 남학생들이 문틈에 앉은 먼지들을 닦아내는 봉사를 하고 있어 내 일인듯 기쁜 마음이 들었다. 학생대상으로 한 참여프로그램도 많아 곳곳에 학생들이 쓴 원고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찾아오는 이들을 배려한 마음씀씀이가 돋보인다. 혼불문학상과 혼불학술상 등 크고 작은 행사와 콘텐츠는 건물만 요란하게 지어놓고 채울 게 없는 다른 문학관에 비하면 배울 점이 많은 문학명소라 생각한다.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모임결성을 태동으로 2006년 개관한 문학관은 전문민간인에게 위탁하여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문학관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작가의 뜻과 숨결까지 놓치지 않으려는듯 섬세하게 노력한 흔적이 보여 외국인들도 일부러 찾아올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는 게 가슴뿌듯하다. 전주는 예향이라더니 어휘하나에도 자기 몸을 녹여 담듯 정성을 들인 작가의 마음을 꿰뚫어 구석구석 혼불작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다.
제 작품의 한 부분을 따로 떼어내거나, 나아가 한 문장만을 읽어도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도록,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에도 머뭇거렸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우리 삶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번 쓰기 시작하자 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사로잡은 이 작품 때문에, 밤이면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했습니다. 신경림시인과의 대담 중 <최명희의 말 >
《혼불》의 작품무대는 남원이다. 남원시 사매면 매도리에는 청호저수지 옆 혼불문학관과 최명희 작가의 부친 생가인 혼불 마을이 있다.
작품무대는 1930=40년대 남원으로 매안 이씨와 그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거멍굴 사람들의 얽히고 설킨 삶의 모습이 소설 속에서 혼례식이나 장례식 등으로 고증되어 살아나고 있다. 《혼불》은 매안이씨 집안의 3대 종부(종가집 며느리)가 중심 축이다. 호남지방의 혼례와 상례의식, 절기의 풍습들이 남원지방의 사투리로 묘사되어 판소리의 흥을 느끼게하는데 마치 나의 이모나 고모들이 움직이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결혼 일년 만에 청상과부가 된 채 몰락해가는 이씨 집안을 힘겹게 일으켜 세운 1대 청암부인, 나약하고 무책임하여 방탕을 거듭하는 종손 강모를 낳은 1대 율촌댁, 종손 강모와 결혼한 3대 허효운이 그 주인공이다. 종손 강모가 사촌 강실과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고 상처를 준 채 다시 기생과 만주로 떠났는데 종부들은 전통을 지키고 양반가로서 부덕을 지켜내는 보루로 서 있다면 마을이라는 공동체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는 하층민의 "거멍굴 사람들"의 삶은 원색적이다. 특히 양반계층을 향해 서슴없이 대거리 하는 옹골네와 춘북이, 당골네인 백단이가 소설 속에서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실속없는 양반행세는 남자들이 하고 다니지만 양반가문이라는 상징을 붙잡고 일으켜세우는 그 뿌리는 여인들의 눈물과 희생이다.
《혼불》작품을 읽기가 쉽지않은 것은 사실이다. 민속학, 국어학, 역사학, 판소리 분야에서도 인정할만큼 고증이 치밀하고 토속어휘가 많아 속도가 붙지않고 지루한 점도 있다.
하지만 전주 최명희 문학관을 다녀오거나 남원 혼불문학관을 다녀온다면 자신도 모르게 소설을 꺼내들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최명희의 혼을 만나니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혼불》10권이 완간은 아니라는 말을 남겼던 작가가 살아있다면 그 이후 풀어나갈 역사의 소용돌이까지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었을 텐데 아쉽기도 하다.
독락재獨樂齋는 최명희소설가의 당호가 되었지만 독락은, 홀로 자신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높은 문학의 경지에 이르는 곳이란 의미로 결혼도 하지않고 홀로 글쓰기를 즐기며 자기세계를 다져나갔던 작가를 말한다.
스스로 성보암이라 부르며 마지막까지 소설을 썼던 서울 청담동 성보아파트는 작가의 獨樂齋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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