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

월간 한국수필 6월호 합평 권남희 편집주간 정리 2015년

권남희 후정 2015. 6. 19. 16:14

 

 

 

2015년 6월호 한국수필  발행인 지연희 이사장   정기구독  02-532-8702  -3  

 

수필 함께 읽기를 통한 이달의 수필 합평 월간 한국수필 5월호

 

월간 한국수필에서는 기존의 월평코너를 다른 형태로 시도한 결과 의외의 호평을 받고있습니다. 회원들의 동참이 높아진 점에 감사드리며 아울러 독창적인 의견이 있다면 뜻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3분(중진이상 .중진, 신인)의 각각 다른 관점과 감각을 기대하며 합평위원 한분이 맡은 매수는 200자원고지 10매 기준입니다. 추천된 세편의 작품 총평, 질문취지에 적합한 평과 함께 문학 안에서의 순기능, 역기능, 특징을 분석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합평에 선정된 원고는 보편적인 평판의 잘 쓴 글의 울타리를 벗어나 소재와 주제면에서 다양성을 고려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합평작품

1. 곽형두〈심회의 문턱에서〉

2, 정의륙 <은진이네>

3, 박종국 <지렁이가 죽었다>

 

합평위원

한동희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역임)

송복련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박기옥 (대구대학교 수필 주강 )

진행 권남희 편집주간

 

권남희: 〈심회의 문턱에서〉는 나이 들어가는 그 쓸쓸함과 어떤 각오를 다루고 있다. 장수사회는 나이에 대한 관념을 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력과 초월적 자세가 필요한 문학은 특히 그러지 않을까요.

한동희: 곽형두 작가의 <심회의 문턱에서>는 환갑을 맞아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삶의 무상함에 쓸쓸하지만 반면 앞으로의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글로, 보통 사람 누구나가 어느 선상에 이르러 한 번쯤 생각해보는 내용으로 공감이 갑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100세 시대이고 작가가 느끼듯 환갑은 또 다른 '시작'의 의미이기도 하지요. 작가는 아직 이루지 못한 희망이 있고, 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었다하여 회상조의 이야기나 문장에 탄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모든 일은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작가는 마음 밭을 잘 가꾸고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감동적인 수필을 생산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심회의 문턱에서>는 지난날에 대한 사유가 길어 지루하고, 서툰 문장이 눈에 띄고 거친 표현은 순화시켜야 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문이나 어려운 낱말은 쉽게 풀어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송복련: .곽형두〈심회의 문턱에서〉는 정서적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제목으로 회갑을 넘기며 겪게 되는 감정과 정신적 변화를 통해 정체성을 회복하는 글입니다. 장수시대에 접어든 현실에서 물리적인 나이의 벽을 넘어서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할 때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치유와 함께 삶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화자는 나이 들어 서글픈 감정을 덜어내며 깨달음과 함께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오랜 세월 가족과 사회를 위해 힘겹게 수레를 끌고 온 자신에게 열심히 살았다는 위로를 하고 싶다는 말에 박수를 보냅니다.

글이 나이 든 이의 서글픈 정서에만 머물렀다면 식상한 수필이 되었을 것이지만 오히려 원숙해진 삶의 가치를 담음으로써 깊이를 가졌습니다. 독자들은 노년의 삶에 대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숙된 한 인간의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박기옥 : 곽형두 작가의「심회의 문턱에서」는 회갑을 맞아 자신을 돌아보고 남은 생에 대한 의지를 술회한 글입니다. 글이 진솔하고 자신을 잘 드러내어 한 번 더 읽게 되는 작품입니다. 특히 이제부터는 명성과 부귀영화를 지양하고 나 자신을 위무하고 사랑해야겠다는 말에는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습니다. 아쉬운 것은 진부하고 어려운 낱말들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목부터가 그러하고 범부중생, 감가상각비 같은 말은 독자를 달아나게 할 소지가 있습니다. 수필은 쉬운 말로 감동을 주는 글이라 했습니다. 참신하고 편안한 말로 풀어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후반부의 여생에 대한 의지의 표현도 너무 교과서적으로 느껴져서 흡인력을 떨어뜨렸습니다. 수필은 설명이 아니라 표현이라고 합니다. 같은 얘기라도 설명은 피하고 독자로 하여금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덧붙인다면 현대는 백세시대라 합니다. 육십세면 수필 쓰기에 늦은 나이도 아닐텐데 작가 자신이 너무 나이를 의식하여 전체적으로 글이 늘어진 감이 있습니다. 수필의 매력 중 하나는 자기 나이만이 가질 수 있는 노하우가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작가의 입장에서도 자기 나이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때 더 좋은 수필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권남: <은진이네>는 다문화가정 관련의 가슴 뭉클한 글입니다. 하지만 모든 가정은 단란하고 따뜻해야한다는 하나의 틀도 관념이며 이혼가정의 개인 인생을 배려하지 않는 시대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일 수 있습니다. 결핍감을 안고 살아가는 개인의 삶은 왜 부정적으로 다루게 되는지요.

한동: 정의륙 작가의 <은진이네>는 다문화 가정의 성공 사례를 소개한 글입니다. 작가는 다문화 가정의 성공과 실패는 문화의 차이와 가족 간의 사랑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은진이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며 팝송을 즐겨 듣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한 시절 옛적 어머니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고 한 대목은 '한편으로는 옛적 가난한 시절에 우리의 동요를 불러주시던 어머니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로 고쳐 쓰면 좋겠습니다. 팝송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어릴 때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노래를 떠올리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문맥을 이어가면 자연스러울 것 같지요?. 역사상 최초로 다문화를 받아들인 당나라가 부흥한 것은 외국인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고, 타문화에 대한 관용과 포용, 법과 제도에 따른 합리적인 통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다문화 가정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우리도 배워야할 점이며 작가의 문화와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오히려 진부한 느낌이 듭니다. 문맥이 이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어 주제가 흐려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한 지붕이라 하지만, 같은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이혼 가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직도 '인내하며 사는 것이 미덕'이라는 우리의 정서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인격체의 충돌로 야기되는 '이혼'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송복:정의륙<은진이네>, 간결한 고유명사의 제목은 ‘은진이네’ 가족의 삶을 제시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합니다. 다문화 가정들이 문화적 충돌과 주변의 차가운 시선들로 갈등을 겪는 어려운 현실에서 은진이네를 바라보는 화자의 눈길이 따뜻하지요. 오늘의 사회 현상에 대해 현실 참여적인 문제를 시의 적절하게 들고 나온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은진이네는 다문화 가족이지만 가정을 잘 꾸려가고 있습니다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평범한 생활에서 기쁨을 찾는 일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고 은진이네처럼 성공한 가정을 보여줌으로써 다문화 사회에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달라진 현실과 문화의 개념은 글의 조화를 깨트리거나 추상화에 빠질 염려가 있으며 애매한 몇 개의 삽화들은 연결고리가 약해 긴밀함이 떨어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소외된 한 부모 가정이나 조손가정 또는 소년가장 등 결핍되거나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웃도 적지않습니다. 그들이 견디기 힘든 것은 똑 같은 잣대로 바라보며 편견을 부르는 고정관념의 틀입니다. 이들의 아픔과 고민에 대해 관심어린 시선과 배려가 담긴 수필가의 글도 기대해 봅니다.

박기: 정의륙 작가의「은진이네」는 베트남에서 이주한 은진이네를 중심으로 다문화 가정 문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한국말이 분명치 않은 엄마와 달리 세 살 난 은진이는 까만 눈이 똘망똘망하고 한국말도 곧잘 하며 엄마와 함께 작가의 약국에 와서는 회전의자에도 앉아보고 이것저것 만져도 보는 호기심 많은 아이입니다. 그런가하면 은진이 엄마는 한국말이 약간 불분명할뿐 스마트폰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은진이의 키가 조급만 더 컸으면 싶어 약국을 하는 작가에게 와서 비타민을 고르거나 비싼 홍삼을 사 가기도 합니다. 작가는 모녀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단일민족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도록 성숙한 국민의식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재일수록 혈통, 국수주의, 문화충돌 등, 관념적인 설명은 식상하기 쉬운 법입니다. 카메라를 더 가까이 가지고 가서 다문화가족 특유의 갈등이나 개인적 어려움, 혹은 우리민족의 권위의식이나 이기심 같은 것으로 빚어지는 그들의 상처를 내 비치면 독자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미처 못 본 어떤 것, 생각지 못한 어떤 것, 무심코 지나친 그 어떤 것을 작가의 체험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면 크게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중간쯤에서 등장하는 작가의 어머니나 부모, 자식 간, 부부 간의 언급은 오히려 주제를 흐려 놓았습니다. 은진이네로 대변하는 다문화가정이 우리 땅에서 뿌리를 내리는 문제로 주제를 모아가는 것이 좋을 뻔 했습니다.

 

권남: <지렁이가 죽었다>는 환경을 생각하는 작품으로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자연보호운운...’은 자칫 계도적일 수 있는데 환경관련글쓰기에 대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한동: 박종국 작가의 <지렁이가 죽었다>는 자연 보호에 관한 글로. 이런 소재는 자칫 선도적이거나 교훈적일 수 있겠으나, 작가는 지렁이의 죽음을 통해 자연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흙이 죽으면 동식물이 죽고 인간 또한 생명에 위협을 느낄 수 있다는 주제의식이 살아납니다. 자연보호에 대해 쓴 글이 많지만 지렁이를 소재로 한 수필은 드물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렁이도 동물이니 울음소리를 낼 수 있겠지만 지렁이의 울음에 집중한 작가의 관찰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문장의 흐름이나 문단 바꾸기에 무리가 없어 읽는데 편했습니다. 글의 성향에 따라 독자층도 달라지겠지만, 작가는 어렵게 썼지만 독자는 쉽게 읽을 수 있어야 좋은 수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송복:.박종국<지렁이가 죽었다>는 사물을 소재로 삼은 서술형의 제목이 흡인력이 있습니다. 낯선 세상에 뛰쳐나와 속수무책으로 말라가지만 사람들로부터 외면되어 쓸쓸한 시신이 되어가는 지렁이를 세밀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잠시 지렁이에 감정 이입이 되어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네요. 지렁이는 토양과 식물의 성장 등 여러 모로 유용한 동물이라는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태에 대한 글이 계도적이거나 지적인 부분을 강화하다보면 자칫 관념적으로 흐르기 쉽지요. 화자는 한밤에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만큼 섬세한 감성과 유년시절에 감자를 캐거나 텃밭에서 만났던 체험을 통해 그런 염려를 덜어내었습니다. 농약 때문에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지렁이가 있다는 것은 흙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세계와 자아를 되새김질한 환경관련 수필이 더 많이 창작되었으면 하고. 달맞이꽃 뒷부분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박기: 박종국 작가의「지렁이가 죽었다」는 빛과 진동에 예민한 지렁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수분이 증발하여 죽은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행간마다 내비치는 유머가 독자의 눈길을 끌어당깁니다. 습기찬 흙속에서 부패한 생물체를 섭취하고 사는 지렁이가 햇볕이 내리쬐는 길바닥에서 죽은 문제를 두고 작가는‘누군가가 납치해 가혹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뺑소니 자동차가 치고 나 몰라라 도망친 것도 아니며 저희들끼리 따돌림이나 패싸움을 한 것도 아니다’고 능청을 떱니다. 특히 지렁이의 울음소리에 이르러서는‘들릴 듯 말 듯 아주 연약하여 귀를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뿐 아니라 어딘가 애절함 같은 것이 묻어나는 것이 은밀스런 세레나데 같기도 하고 기구한 팔자타령으로 들리기도 한다’고 표현하여 작가의 섬세한 감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작가는 농촌생활의 유년 시절 텃밭이나 뒤꼍, 혹은 수채에서 나오는지렁이를 보고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했던 일을 추억하면서 흙속에 지렁이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 흙에 아직은 죽지 않은 생명력이 깃들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아울러 작가는 지렁이의 혐오스러운 외양에 반하여 인간에게 끼치는 순기능을 보여주면서 생태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음도 지적합니다. 자칫 계도적일 수 있는 소재를 거부감 없이 잘 끌고 간 수작이라 생각되나 문단을 너무 잘게 나누어 중복되거나 산만한 부분이 있었음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권남: 제목은 강렬한 주제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수필작품제목이 평이하지요. 제목잡기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한동:제목은 그 글의 얼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여 제목만으로 글의 성패가 좌우될 수도 있는데 주의 할 점은 제목만 보고도 글의 내용을 짐작하게 되면 읽고 싶은 충동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 제목은 설명적이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반어법으로 독자의 흥미를 끌어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송복: 독서 인구는 줄고 읽을거리가 넘치는 현실은 제목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케 합니다. 문학은 이름 짓기라는 이론이 있지만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무척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글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권유합니다. 제목이 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제목이 독자를 붙잡지 못하면 외면당합니다. 그렇다고 책 내용과는 동떨어진 선정적이거나 표어 같은 제목은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 됩니다. 진정한 제목은 수필의 내용을 한마디의 말로 표현하고 주제를 집약시킨 것이이죠. 거기에 독자의 관심을 끄는 선명하고 매력 있는 제목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박기: 수필 강의를 하다 보면 제목은 언제 정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제목은 독자를 작품 속으로 유인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주제를 잘 나타내되 참신하고 매력적이면 좋습니다. 작가들 중에는 글을 다 써 놓고 제목을 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 전개가 산만하고 주제가 흐려질 우려가 있습니다. 주제를 정할 때 제목도 같이 잡는 것이 주제를 향해 몰입하기에 좋습니다.

 

 

권남: 세 작품을 읽고 난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한동: <심회의 문턱에서>와 <은진이네>는 평범한 소재이지만 <지렁이가 죽었다>는 특이한 점이 있어 <지렁이가 죽었다>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작가는 남이 쓰지 않은 소재를 부단히 발굴해야 하고, 같은 소재라 해도 자기만의 기법을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송복: 세편의 작품은 소재의 다양성을 보여준 작품들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 글이다. 곽형두〈심회의 문턱에서>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으며 자신의 일차적인 정서적 반응에 그치지 않고 두루 끌어안는 성숙된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박종국<지렁이가 죽었다>와 정의륙<은진이네>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제기와 문화가 다른 사람끼리 가정을 이룬 오늘의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과 바람직한 관계를 생각하는 글이다. 외면했던 것들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갈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 있다.

박기: 세 작품 모두 남성작가의 작품임에도 장르가 달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곽형두 작가의「심회의 문턱에서」는 글이 진솔하여 공감이 갔고, 정의륙 작가의「은진이네」는 주변 이야기라 따뜻했습니다. 박종국 작가의 「지렁이가 죽었다」는 편하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유머러스하게 독자를 잘 설득하는, 만만치 않은 작가의 역량이 느껴지는 수작이었습니다.

 

* 한동희.송복련. 박기옥 세분의 내공이 느껴지는 평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