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수필집

임금희 수필집 낙타가사는부엌 정은 출판

권남희 후정 2017. 6. 2. 12:37

 

낙타가 사는 부엌 -임금희 수필집 -

 

꿈 너머의 꿈, 그 여정의 기억 전달자

-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와 정체성 찾기에서 -

권남희 수필가(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어깨 너머

한 인간의 존재 너머에는 산이나 , 바다같은 깊고 넓은 근원들이 함께 딸려 나온다.

예술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서로 다른 개인의 독특한 취향인 듯 보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예술적 DNA는 하나의 뿌리였다고 짐작한다. 현재의 예술성향 활동이 있기까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 집안 누군가의 DNA를 물려받았으리라 . 태어났을 때부터 들었던 소리들, 자라면서 이어받은 집안과 그 지역의 내면정서들, 학교, 몰입해서 읽었던 책들까지 어지간한 언어와 일상은 모두 문학이었다.

취미와 특기 난에 거의 ‘독서’라고 써냈던 베이비부머세대들은 대가족형태와 그런 구조의 마을에서 어울려 자랐던 덕으로 ‘어깨 너머’로 터득하고 배우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니 독서의 종류는 당연히 문학작품들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당신 너머에서 오고 내가 사랑하는 국화도 국화너머에서 오듯...‘ 라고 이안 시인은 존재에 딸려오는 배경들을 간단히 시로 표현했지만 작가 한사람이 탄생한다는 것은 아무리 쉬워보여도 엄청난 인재가 배경으로 둘러져 있다.

프로 작가등단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언어의 장인집단이 함께 오는 일이다.

작가 입문은, 아이의 언어습득이 상징세계로 진입하듯 모든 대상들을 대신할 수 있는 상징체계의 힘을 얻어 주변에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임금희 수필가는

유순한 성품으로 보이지만 주관이 뚜렷한 면이 있다.

맛있는 생선이 자잘한 가시가 많듯 임금희 수필가는 여린 감성과 고운 성품의 소유자이면서 문득 문득 작은 가시를 내민다. 잠재 된 방어본능이 작용하는 것일까.

2011년 가을학기 수필교실에 예쁘장하면서 자그마한 여성이 찾아왔다. 작은 딸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시간을 위해 올인하고 싶다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직장여성에서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로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다기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바지런하고 모든 문학적 활동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돌적으로 참가하는 임금희 시인. 수필가와 함께 한지도 1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얼마나 맹렬히 읽고 생각하고 쓰기를 했는지 모아둔 수필작품이 100편이 넘었고 몇 년 전에는 시집도 출간하여 장녀 결혼식 때 선물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임금희수필가의 수필집 『낙타가 사는 부엌』에 실린 55편의 수필에는 모두 작가의 섬세하면서 다정한 정서들, 그리고 한 집안의 어머니로서 야무진 면모가 엿보이기도 한다.

 

 

매력적인 꿈쟁이

인간에게 꿈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않거나 꿈이 없는 사람은 무기력해지고 만다.

꿈을 꾸는 일은 어떤 것이라도 자신이 살아가면서 직간접으로 경험하거나 느꼈던 것들의 일부이다.

하지만 깨어있을 때는 몰랐던, 깨닫지 못했던 그런 기억이나 상상을 꿈속에서는 자유스럽게 찾아다니면서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세우고 그 가능성으로 행복을 느낀다.

임금희 수필가는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가족에 대한 자부심도 크기에 가족주의 쁘띠 몽상가라 할 수 있다. 모성과 함께 때로 친구나 동료같은, 가족애는 인류가 개발한 훌륭한 시스템이다. 부모를 탄생시키고 생명을 품어주는 가정은 인간을 완성시키는 최고의 명당이다.

문학작품에서 남녀의 사랑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되풀이되는 주제 또한 ‘가족’이다. 가장 위대한 희곡작품으로 꼽히는 아서밀러의 1949년작<어느 세일즈맨의 죽음>도 주제는 가족이다. 1988년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 전 세계 40여개국에 번역되고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는데 그 소설도(해체된 가족이야기로 구조는 다르지만 ) 중심이야기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부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였다.

임금희 수필가도 ‘매여있다’고 표현한 부엌이지만 일상의 작업장이나 다를 바 없는 그곳에서 모든 일정을 관리하며 갖가지 꿈으로 기도한다. 두 딸이 잘되기를 , 남편의 건강과 직장생활의 평탄함, 그리고 자신의 꿈도 완성되기를 부엌 안에서 소망하는 것이다.

임금희 수필가의 부엌은, 개인이 세운 작은 정부이면서 늘 기도하는 성소나 다를 바 없다.

수필집 제목으로도 선정한 「낙타가 사는 부엌」은 작가 자신의 마음과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낙타가 붙어있다. 낙타를 보면서 저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는 상상을 한다.

이 작은 부엌에 낙타 여덟 마리를 들여놓고 나는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인족을 떠올리고 스타워즈의 외계행성 같은 사막을 그려본다. -생략- 황량한 사막과 낙타는 우리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짐을 잔뜩 싣고 이글거리는 태양 밑을 걷는 모습, 야자나무 아래서 풀을 뜯기도 하고 모래폭풍에 힘겹게 나아가기도 한다. 붙들려있는 낙타와도 같이 나는 부엌에 매어있다. 낙타 같이 가족 또한 짐을 지고 있다. 남편은 가정경제를 짊어지고 시외버스를 타고 직장을 오가며 집은 하숙집과도 같이 생활한다. -생략-아이들의 짐도 만만찮다. 큰애는 직장일로 야근에 자격증 시험공부에 불어를 잊어버릴까 학원도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고 작은애는 기말고사로 벌써 몇 번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가족들을 생각하니 그나마 부엌에 매어있는 내가 하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고 있으니 야자나무 그늘 아래다.-생략- .낙타를 보고 미지의 세상을 꿈꾸는 나를 기다리며 부엌은 늙어간다. 기운이 있는 한 평생 동반자로 살 것이다. -낙타가 사는 부엌-

가족은 누구인가 ? 가족은 같이 부대끼며 있을 때는 나무나 당연하여 귀한 줄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자신만을 위해 존재해야할 대상이 사라지면 한동안 적응을 하지 못해 우왕좌왕 하고 만다. 대부분 한 가정의 어머니는 그런 존재감으로 자신을 확인하며 위로를 받는다. 아무리 살림살이가 편해졌다 해도 구석구석 주부의 손길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

전업주부는 살림 전문가이지만 아직까지 직장생활을 하는 전문직 여성보다 배려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티 난다.’는 말처럼 어머니의 자리는 공기같아서

없을 때 비로소 갑갑해짐을 느낄 뿐이다.

 

우리 가족들은 방콕을 좋아한다. 집에서 뒹굴면서 게으름 피우는 것을 좋아한다. -생략- 그런 내가 가족과 한 달을 떨어져 여행 하고 돌아왔다. -생략-. 처음에는 집을 잊었다. 여행 다니기 바빴고 생소한 곳의 이국적인 것들이 나의 마음을 앗아갔다. -생략-

집은 그동안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작은 애가 아파서 병원을 다녔다. 결석의 고통에 견디지 못하고 초음파로 결석을 부셨고 집에 며칠을 혼자 누워서 피오줌을 쏟으며 견뎠나보다. 남편은 아픈 아이 일을 혼자 짊어지느라고 팍삭 늙어 버렸다. -생략-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때는 내게 여행이 필요했다. 나만의 휴가가 가족들에게는 불편한 일상이었겠지만…. 생략/ 떠날 때는 , 그렇게 말도 안 듣고 자기 맘대로 사니 한번 살아봐라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여러 가지 섭섭한 마음이 누적되어 응어리로 남을 지경이었다. -생략- 가족 모두가 나를 기다리며 그야말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방콕가족-

  

 

공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산이 있고 강이 있는 곳 바다가 펼쳐진 동네, 농토들 어울려 살았던 골목집 등......... 고향동네를 그리워하고 살았던 집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평생 살아가는데 필요한 감수성과 정서들을 전부 그곳에서 채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다락방은,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옛날 집에 주로 있던 다락방은 , 온갖 잡동사니를 밀어 넣거나 중요한 것들을 보관하는 장소, 때로 방으로도 만들어졌다. 다락방을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기쁨을 느끼고 낭만적인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고 소유하는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다락을 준다면 대단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쁨을 느낀다.

작가 역시 아파트 베란다에 꾸민 다락에서 자기만의 작업실을 가꾸고 행복을 느낀다.

어릴 적 외가에서 추억을 쌓았던 다락방을 향한 애착이 현실로 나타나는 공간이다.

게다가 새로 이사 온 소년과 그 형에 대한 에피소드는 한편의 예쁜 동화이다.

갑갑한 도시인으로 살다가 다락방에서 자신의 꿈이 안주할 곳을 찾아낸 것이다.

외가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그곳은 우리의 놀이터고 보물을 감추는 방이었고 잠자는 곳이었다. 언니와 나는 늦게까지 종이인형을 오리고 공기를 했다. 어느 날 그곳에 한 가족이 들어왔다. 엄마와 아들만 셋인 가족이다. -생략- ‘인수오빠 숙제하자!’ 그러면 인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숙제를 가지고 쏜살같이 다락을 내려왔다. 가끔 다락방에서 기타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작은 오빠 노래 부르는 거 보러가자’ 하면서 뛰어올라갔다. -생략-

처음 아파트로 이사 와서 14층이라는 것이 두려웠다. 어느 날 갑자기 과감하게 베란다 공사를 시작했다. -생략-베란다 바닥이 올라오니 바깥창이 위험하게 느껴져서 방범창을 달고 커튼을 치니 작은 다락방이 되었다. -생략- 큰애가 너무 좋아서 거기서 자겠다고 했다. 무척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막무가내로 잔다고 하기에 돔같이 이불 집을 만들어서 재웠다. 아이만 행복했던 것이 아니다. 다락방을 만들어 놓고 처음 그곳에 섰을 때의 기분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생략-

잠이 안 오는 날은 쟈스민차를 뜨겁게 타서 그리로 올라간다.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밖을 보기도 하고 옛날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아이와 꼭 붙어서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나는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이루기 힘든 꿈을 이루었다. 그 곳에서 기억 저 멀리 달아나는 사람들을 붙잡아 내 곁으로 끌어당기고 또 한바탕 꿈을 꾸기도 한다. -인수와 다락방-

 

심연의 목소리 무의식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절대 이성보다 본능을 부활시키는데 주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교육이나 , 훈련, 사회적 억압으로 잘 나타나지 않던 자신안의 생각들과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삶에 대한 본능적 욕망들이 잠을 잘 때 꿈으로 나타나거나 의식하지 않을 때 툭 튀어나온다.

‘마당안의 아이’작품은 유년기에 맞닥뜨렸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 애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몸이 약한 작가는 막연하게 자신을 둘러싸는 두려움을 참고 있지만 잠들 무렵이면 무서운 모습으로 괴롭히는 괴물과 자주 맞닥뜨린다. 안간힘을 다해 살아야한다는 본능으로 맞서고 그 두려움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어느 날 자녀를 키우다 아이에게서 비슷한 상황을 감지하면서 생각에 빠져든다.

아이라고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는다.

모두 자기 그림자만큼의 공포를 달고 살며 견뎌내야 하는 일은 아이라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마당 밖을 못나가는 허약한 아이였다. 그때 나는 대문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하는 개미와도 같이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고 마당은 한없이 크고 눈부시게 빛났다. 그 마당 안이 나의 세상이었다. 볕을 쬐느라 쪼그려 앉거나 툇마루에서 동생이 떨어지지 않도록 돌보면서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마당 담벼락 양지바른 곳에 서 있으면 누군가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리쬐는 햇볕을 타고 내려오듯이 까마득히 부르다가 여운을 남기며 멀어져갔다. -생략-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마음 속 소리 같기도 하고 하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생략-매일 주사를 맞았다. 폐에 문제가 있었다.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빨리 발견하여 살았을 것이다. -생략- 두려움에 떨면서 잠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무섭다. 발치에 어떤 시꺼먼 짐승이 누워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무서워서 눈을 제대로 뜨질 못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에 떨었다. 아직도 그 시꺼먼 물체의 발이 생각난다. -생략-

그렇게 아이도 어렸을 때부터 말 못하는 사연을 가슴에 안은 채 생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더러는 잊고 더러는 아픈 상처를 치유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마당안의 아이-

 

 

라캉은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했다. 인간은 의식세계에서 억압 받았던 것들이 무의식에 축적되고 그 시간들이 쌓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무심코’라는 언어는, 무의식과 연결된 것으로 얼마나 다양한 뜻이 함의 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평소에는 긴장한 채 꼭 묶여 나오지 않았던 , 그 경계를 풀고 터지는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무심코 한 말실수도 무의식이라 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 모든 예술형식은 저자나 독자 안에서 , 또는 사회 전체 안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적 동력의 산물이라 한다.

임금희 수필가는 놀랍게도 앞날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해 곤란 할 때, 무의식의 힘을 빌린듯하다. 이십대 미래를 결정해야하는 갈등을 무의식의 세계에서 신비롭게 풀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마인드컨트롤 같은 심리학 강의였다. 사람의 정신 중에서 가장 깊숙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끌어내어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느껴보는 그런 거라고 했다.-생략- 언제였던가. 나에게도 고민이 생겼다. 강사님께 배운 대로 몇날 며칠을 시도하다가 드디어 그 문제에 대한 꿈을 꾸었다. -생략-

서울역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보듯이 내가 바라본다. -생략-그 안에서 새파란 조끼를 입은 청년이 두리번거리면서 누군가를 찾아 다녔다. 그는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내 손을 꼭 잡고 인파를 헤치며 나아가더니 기차를 탔다. 우리는 복잡한 도시를 떠나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간이역에 내렸다. -생략- 한 남자가 서 있는 오두막을 지날 때 그는 우리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다. 이 먼 곳까지 온 우리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바다를 향하여 끝도 없는 길을 가듯이 걸어서 다다른 바닷가는 적막하고 파도도 잠잠했다. -생략- 우리는 그늘진 바위에 앉아서 밀려왔다가 나가는 바닷물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었다. -생략-

결혼 후 첫아이가 태어나고 백일이 지났을 무렵 남편이 경북 감포로 발령이 났다.-생략-그곳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삼년을 살았다. -생략- 꿈은 나에게 이곳까지 보여주었다. 나의 꿈은 영화 같았고 몽환적이었으며 강렬한 햇빛과 숲과 어둠이 공존했다.-생략- 애플사의 창업주 스티브잡스도 명상에서 창의력과 통찰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신비로운 체험 -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여성주의와 여성적 글쓰기

『제 2의 성』을 쓴 프랑스 여성학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바람대로 남편과 자녀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는데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여성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가가 넘어 이제 21세기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곳곳에서 여성들은 심정적으로 , 경제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는 모순을 느끼며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중심적 인물로 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남성에 비해 부수적이고 보조적일 뿐. 자기 권리를 찾지 않는 존재로 비춰지는 것이다. 스스로 해방 될 필요성을 느끼는 여성들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하면서 대부분 무리를 하지 않는다.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모성을 근원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자기 안에서 에너지를 찾아내고 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행동하고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알제리태생으로 파리 8대학 교수인 엘렌식수는 여성의 해방을 끊임없이 찬앙하며 ‘여성, 그 삶의 원천은 스스로 힘의 원천이자 생기의 원천이 되는데 있다.

삶의 원천으로서의 여성적 글쓰기는 적합하고 주부들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기도 한다.

과거에도 여성들은, 힘과 생기의 근원인 어머니와 오랜 유대를 바탕으로 여성적 글쓰기에 관한한 특권적 위치를 누려왔다. 여성적 글쓰기는 해방을 구현하는 어떤 실천이 되었는데 글쓰기에서 자기를 찾고 상상 속에서 유토피아를 이루어 낸 모델들은 많다.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뒤라스, 토니모리슨, 제임스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 , 장 주네 등 -로이스타이슨『 비평 이론의 모든 것』중 프랑스 여성주의 -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임금희수필가의 작품에서 ‘고래와 낮달’은 심리적 여성주의 글쓰기로 긴장 구조를 가장 많이 내포하고 있다. 영화를 보다가 비슷한 상황을 느낀 작가는 직장생활 중 자신이 겪은 어이없는 상황을 기억한다. 작가의 내면은 대립 성향이 보이지만 가부장제의 사회에서 아무리 잘나가는 직장 여성이라 해도 여성의 역할은 한계에 부딪히는 상황을 만나면서 역부족임을 알아차리고 좌절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이 지적인 성향을 드러내면 ‘그렇게 많이 알아서 뭐에 쓸건데?’ 이런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한 인간으로 홀로서기보다

부모에게 적당히 순종하고 드세지 않은 소녀기에서 착한 아내, 따뜻하고 지혜로운 어머니의 세계로 넘어와야 했던 것이다.

 

그 시절 그 누구도 고래를 못 보았을 것이다. 해적이었던 철봉(유해진)은 다르니 산적들에게 그의 지식을 전달해준다. 고래는 엄청나게 크다고 말하면서 그 크기를 설명하는데 사람 몇 명 있는 곳에 동그라미로 그려 넣으면서 이정도가 고래의 눈이라고 말한다. 산적들은 그를 비웃으며 그러다가 너는 이 물고기가 새끼도 낳고 젖도 먹인다고 하겠다고 그런다. 그렇다고 하니 얻어맞는다. -생략-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인 80년대 직장생활을 하던 때였다. 서로 어울려서 차를 마시는 중 창밖으로 희미하니 낮달이 떠있는 것이 보였다. -생략- 누군가가 옛날 추석에 본 달은 쟁반같이 컸었는데 지금은 좀 작아진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생략- 별과 은하에 관한 이야기로 번지면서 서로가 알고 있는 작은 지식을 주고받으면서 열띤 토론으로 번졌다. 듣고 있던 나도 아직도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략-누군가 ‘그건 아니다.’ 하면서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허블이 주장한 이론으로 과학의 발달로 밝혀졌다고 말했는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무시했다. 이구동성으로 웃으면서 내가 오버한다고 말했고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생략- 나는 설득력 있게 말하는 재주도 없었고 직장에서는 가장 만만한 위치였다. -생략-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단은 그저 조용히 들어주다가 윗사람의 말에 맞장구나 쳐주면 되는데 괜히 끼어들었던가.-생략- 예나 지금이나 나는 지식에 목말라한다. 별과 하늘이 막연히 나를 끌어당긴다. 푸른 하늘과 낮달, 고래가 그 옛날처럼 나를 설레게 하고 있다.-고래와 낮달-

 

사과! 순수소녀 마음을 훔치다

 

임금희 수필가는 산속 깊은 곳 옹달샘처럼 순수하고 상큼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 속 무한순수의 소녀를 대하면 읽는 이의 가슴은 뭉클해지고 장면마다에 동화되어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만다. 어렸던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무공해 사과같은, 작가의 성품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사과는 한결같이 과수원집 오빠가 대체된 대상이며 향기를 맡으면 툭 튀어나오는 마법 상자이다. 향기로 추억을 열고 맛으로 감동을 부르니 오빠의 사과는 작가의 가슴속에서 수시로 열려 알싸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이 세상에 사과가 아무리 많이 열려도 그 이름은 늘 한 사람이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목마름을 풀어준 사과는 오빠를 향한 소녀의 심연이다.

사과에 덤처럼 얹은 ‘이름을 불러준 사건’은 소녀에게 보물창고 한 칸을 선물한 일이었다. 사과는 그러기에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말하게 하는 심령술사다.

소녀기를 관통한 사과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알듯 모를 듯 가졌던 설레는 감정을 맛있게 표현하고 있다.

 

수십 년 전 그 오빠가 내게 건네준 사과가 생각났다.

머릿속 작은 서랍이 툭하고 열리듯이 기억이 빠져나오면서 그리움이 밀려왔다. 사과만 또렷이 기억나고 오빠의 모습은 말랐다는 것 밖에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생략- 오빠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을 어떻게 기억할까’하는 생각을 하며 다가갔다. 오빠가 건네준 몇 알의 사과는 능금같이 작은 풋사과였다. 두 손에 받아든 사과는 푸른데 내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생략-

“오빠, 어디가?” “읍내 가지.”

오빠는 살짝 웃었던 것 같고 나는 좋아서 입이 벙싯거렸다. 나는 집에 오면서 사과를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순식간에 사라졌다.-생략- 오빠는 십리나 되는 읍내 길을 가면서 먹으려고 사과 몇 알을 챙겼다가 나를 보고 주었을 것이다. 갸름하고 햇볕에 그을리고 반짝였던 얼굴의 마른 모습만이 희미하다. -생략- 사과를 받아든 순간 너무나 좋았는데 그걸 표현하지 못했다. -생략- 과수원집 사람들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사과 꽃은 세월 따라 수도 없이 피고 졌겠지. 그들은 과수원에서 놀던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 능금같은 그리움-

 

 

문학비평도 창작이다. 각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주된 철학적 명제나 사회 가치관에 따라 진화를 거듭한다.

 

19세기 말에는 저자가 작품을 쓰게 된 심리상태와 동기를 분석하는 이드심리학이 주를 이루었고 20세기는 자아가 어떻게 스스로를 상황속에 적응시켜가는지를 보는 에고심리학이 당시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며 발달했다. _자크 라캉 ‘욕망이론 중’ -

문학 작품 평은 작가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야 좋은 해석이 나온다.

단 하나의 최고의 해석을 위해 19세기 20세기 비평가들은 작가의 전기적 고찰부터 했다. 그들의 일기, 편지, 에세이 등을 꼼꼼히 읽고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 일상들을 파악하고 나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작품이 발표되면 작가의 의도보다 독자의 의도대로 읽히는 경우가 더 많고 감정의 오류도 벌어지게 된다. 어떤 대상이나 지역, 사물에 대해 좋지 않은 경험을 했다면 독자는 그 기분으로 작품의 의미를 해석한다.

문학은 언어를 기호로 사용하지 않고 상징체계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형상을 만든다. 그러기에 작품 읽기는 , 작가와 작품과 독자의 삼각관계라 할 수 있다.

계간 리더스에세이 편집장이기도 한 임금희 수필가는 리더스에세이 영화감상 코너를 맡아 소개하고 있는데 상상력을 가미시켜 영화감상평을 쓰는 필력과 감수성이 대단하여 주목 받고있다.

 

『낙타가 사는 부엌』첫수필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2017년 5월

임금희 수필가  2012년 월간 <한국수필 >등단 .  2012년 지필문학 시등단

시집<숨어우는 작은새>   수필집 < 낙타가 사는 부엌 >   계간 리더스에세이 편집장 .스페이스에세이문학회 부회장

이메일 : r-keumh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