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고흐를 따라잡고싶었던 날들

권남희 후정 2007. 4. 13. 17:20

 

 2008년 2월 서울역 김중만 사진작가 전시회에서 (네거티브 효과 )

 

자살을 꿈꾸던  청춘과 고흐

                             권남희


고흐의 그림에서는  예술적 호소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강렬한 색채나 쉴새없이 움직이는 선들에서 ‘괴로움이란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죽기 직전 말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에 빠진다 .  

고흐처럼 작품 전체로 자기를 호소한  화가도 드물다. 어떤 비평가는 고흐의 모든 작품이 그의 자화상이라고 평했다.  물론 피카소의 그림도 대부분 자전적이고  샤갈 역시 피카소로부터 ‘염소와 닭좀 제발 그리지말라’는 핀잔을 들만큼 그림마다 고향을 연상시키는 염소와 닭, 소 , 말 들을 그려댔다. 하지만 스물 일곱부터 서른 일곱살까지  불과 10년 동안  그림을 그린 고흐는  하나의 선과 하나의 색까지도 그의 생애를 담는데 몰두했다.  고흐의 그림  중에서도 사춘기의 나를 사로잡은 그림은 ‘귀를 자른 자화상’이었다. 귀를 잘라낸 소동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고흐는 귀자른 자화상을 두점 그렸다. 모델을 돈주고 살 수 없었던 화가들은 거울을 보고 자신을 그리곤 했는데 고흐 역시 거을을 보고 그렸기 때문에 잘린 귀는 왼쪽 귀인데  그림에서는 오른쪽처럼 보인다.

‘드라크르와와 바그너, 베를리오즈 속에도 광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 ’ 라고 반문한 고흐의 말처럼 예술가에게 광기는 숙명일 수도 있다.          

귀를 자른 고흐의 자화상은  반항심이 또아리를 튼  청춘들에게 씨알이 먹히는 멋진 초상이었다. 게다가 권총자살을 시도했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미술반 활동을 하던 내게 그림그리는 고흐의    고뇌와  귀자른 자화상은 우상으로 삼을 만했다.  

공부가 뜻대로 안되고  ‘콱 죽어버릴까나’ 하는 감상적 자살병이 발작을 일으킬 때 ‘귀자른 자화상’을  책상앞에 놓고 들여다보았다. 순종형의 맏딸이었던  나는 부모님과 동생들의 앞날에  대해 쓸데없이 고민을 하는 편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다른  부모들보다 왜  부부싸움을 많이 할까 ,   부모님  앞에서 싸움을 멈추게 하는 일은 내가 죽어버리는 일이지않을까 그런  고민을 했다.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나의 이른 죽음을 알리고싶은 허영기가 발동하거나 중학생 때 자살해버린 같은 반 친구를 생각하면 빨리  죽어야 할 것 같았다. 나만이 가장 슬픈 일을 겪는 것처럼 심각해하면서 한탄을 하고  쉽게 죽을 용기도 없는 비겁함 때문에 괴롭고 우울하지 않았던가.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녔던 사춘기를  지나 이제 100살까지 살아가야하는 숙명을 안고 다시 고흐의 귀자른 자화상을 본다. 자살시도자란 이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의 간절한 삶의 희망이 색깔로 드러나있다.  자기를 보기 위해 그림마다 자기를 투영시킨  고흐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      

고흐의 그림에 공통적으로 깔린 색상은 초록이다. 1889년에 그린 ‘귀를 자른 자화상’에는 코트에도 초록색을 섞어 그었고 배경으로 있는 벽도 연둣빛이다. 검은 눈동자를 더 돋보이도록  흰자위 대신 넣은 초록색깔은 그의 다른 자화상에도 있다.  그가 그린  ‘프로방스의 늙은 농부’나 ‘병사’ ‘’지누부인‘ ’젊은 농부‘ ’탕부랭의 여인‘ 등의 초상화에서  눈자위는 평범한 흰색이다.  오직 자신을 그릴 때 독특하게  눈자위에 녹색을 넣었다.   고흐가 색채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가 1886년 동생 테오에 의해 모네. 시슬리, 피사로, 드가 등의 작품을 배우면서부터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며 피사로에게 배운 고흐는 인상주의의 기본에 열중한다.  생활에 지친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르에서 2년동안 살았는데 190점이나 되는 유채를 완성시키면서 황색과 오랜지색에 대한 열정을 , 청색에 대한  집착으로 밤하늘을 그렸다. 원색의 대비를 사용하면서 고흐는 ‘나는 빨간색과 녹색에 의해서 인간의 무서운 정열을 표현하려 한 것입니다’  라고 했다.   단순한 정열을 담고싶었다면 빨간색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눈자위의 초록은 숲이나 나무에서 느끼는  , 생명력에  대한 애착이라고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볼 뿐이다. 

사춘기의 나는 울일도 많았는지  울다가 잠이 든 날이 많았다. 그런 아침의  빨간 내 눈자위를 보면 다시 화가 나기도 하고  친구들 대하기도  부끄러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밤사이 겪은 고통의 빛을 감추기위해  애 쓰면서 하루를 소진했다.  



고흐 역시 그것을 늘 생각했기에 역설적으로 초록빛깔로 대치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물감이 없어서 애를 태우고 그림이 팔리지않아 동생 테오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으며 그림을 그렸던 고흐의 고통과 내 고통의 무게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허영심으로   고흐의 고뇌를 사서 치장하려한 나의 십대가 그리워진다.  더없이 순수해서  유치찬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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