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커피를 사랑하는 이유-
낭만 비타민 커피
권남희 수필가
맥스웰향기 2009. 9.10월호 수록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는 광고카피가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성격의 나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다시 짚어보니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요즘 사람들 기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 가도 몇 사람 빼고는 거의 커피를 주문한다. 나 역시 뭐가 있느냐 묻지도 않고 맛이 어떤지 따지지도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 커피를 말한다. 커피향이 퍼져오면 五感은 벌써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도 시시각각 다르다. 이른 아침, 정신을 맑게 한다는 이유로 마신다. 무료함을 달래느라 새참 커피를 마시고 점심 식사 후에 입가심으로 한 잔을 마신다. 사무실을 방문한 손님과 한 잔 , 늦은 오후 또 한 잔, 자기 전에도 커피를 마시고 잠에 곯아떨어져버리니 커피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무엇이라 해야 할지.
가끔 내가 나에게 묻는다. 싫증도 잘 내고 변덕도 많이 부리면서 음료는 커피만 고집할까. 다른 마실 거리에 정을 붙이면 안 될까. 녹차에, 둥글레차, 인삼차에 대추차, 오미자, 구기자도 있는데 오로지 커피다.
술을 배울 때, 평생 가는 음주매너 때문에 처음 누구와 배우느냐가가 중요하다고 들었다. 커피를 배우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호기심 충만하던 나는 카페에서 처음 커피를 배웠을 때 이미 그 보헤미안 분위기에 반하고 말았다. 아슬아슬한 일탈의 향기마저 매력적이었다.
커피는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처음 얻은 자유와 함께 만난 첫 번째 신천지다. 사이다나 홀짝대던 여고생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성인문화는 모두 처음이었으니 단체 미팅으로 가본 카페부터 황홀경이었다. 프림과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는 태어나서 처음 마셔본 것으로 초보자로서는 최고의 맛이었다. 술보다 커피를 먼저 배웠으니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 후 수업이 휴강되거나 시간이 나면 과 친구들과 학교 앞 다방으로 몰려가 수다를 떨었다.
커피는 나의 외로움을 치유하고 혼자 지내는 나의 친구가 되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난 후의 정적,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다방에 앉아 커피를 시켰다. 하숙생활로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자유까지 덤으로 따라붙었지만 어쩌지 못하는 시간들과 싸우는데 커피가 최고였다. 알코올보다 편하고 안전하고 담배에 비할 수 없는 향기와 분위기를 지닌 커피와 시간을 보내다보니 축제로 다방이 붐빌 때는 남학생과 합석을 하는 일까지 있었다. 때로 운치 있는 카페를 찾아다니며 숙제를 하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 한 잔을 시켜도 오래 앉아있을 수 있어 고향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책을 읽었다.
일찍이 프랑스 파리에서 카페는 커피 판매가 시작되면서 작가와 화가, 음악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방랑기질이 있는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카페에 커피향은 최고 선물이었을 것이다.
커피는 자유스러움과 낭만이 따라다닌다. 카페에서 「악의 꽃」을 탄생시켰다는 시인 보들레르도 커피를 사랑했을 것 같다.
커피 한 잔 두고, 빈센트 반 고흐가 드나들며 그렸던 밤의 카페는 어떠했을까 상상하는 일도 행복한 일이지 않은가. 헤밍웨이는 파리의 카페에서 ‘파리는 축제 중’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는데 나는 기껏 고독을 죽이는 편지나 쓰고 있었다. 더욱이 시 한 줄 제대로 못쓰니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도 시인랭보처럼 ‘카페의 시’를 읊을 수도 없었다.
커피에 예술가들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외국 여행 중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유명 작가가 자주 들러 커피를 마셨다는 설명에 감동을 하며 의미를 확대했던 적도 있다.
커피를 마시며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 커피 대용으로 무언가 찾아내려하지만
다른 무엇으로도 커피의 매력을 대체할 수는 없어 보인다.
몇 가지의 비타민을 알약으로 보충하는 것처럼 낭만이 부족한 도시의 일상에서 커피를 마시며 내 몸에 부족한 낭만을 채워 넣는다.
오늘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잠자리에 든다. 아침 식사는 걸러도 멀쩡한데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미진함, 오전 내내 머리가 몽롱하고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산만함이 계속된다.
삶의 멀미가 날 때 커피 한잔을 마시며 체증을 날려 보낸다.
나의 커피 사랑은 멈추지 않으니 이보다 더 영원한 사랑은 없을 것 같다.
권남희 약력
1987년 월간문학 수필등단. 現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작품집『미시족』『어머니의 남자』『시간의 방 혼자 남다』『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외 . 제 24회 한국수필문학상 . MBC아카데미롯데잠실. 덕성여대평생교육원 수필. 분당 홈 플러스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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