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의 독서일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눈의 훈련과 내면적 수양쌓기 여행

권남희 후정 2007. 6. 29. 11:17
 

 

권남희 수필가정리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 푸른숲 -  박영구 옮김

괴테: 독일의 대문호 . 괴테가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1년 9개월에 걸친 여정 속에서 느낀 다영한 예술적 체험과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낡은 관습의 틀을 벗고 진정한 예술가로 변모해가는 내적 성숙의  과정을  전한다.   텅 빈 베로나의 원형극장에서 고대 로마 민중의 모습을 떠올리는 시인 괴테의 상상력과 이탈리아의 수려한 풍물을 정밀 스케치하듯 표현하는 세밀한 관찰력 , 고대 건축과 유적물,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에 대한 그의 지고한 관심과 뜨거운 열정이 이 글 속에 녹아들어 있다.


옮긴 이의 말 (박영구 )

여행의 참된 의미를 찾아 떠난 길

괴테’라는 이름에서 아스라한  고전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탈리아’ 라는 울림에서는 눈이 시릴 듯이 아름다운 영상미가 떠올랐다. 그리고 ‘여행’이라는 단어에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밀려왔다. 재작년 겨울, 이 세낱말이 어우러진 책 한권을 들고너 나는 무작정 길을 떠났다. 서울에서 로마를 꿈꾸며 , 동해에서 나폴리를 그리며 시작된 번역 여행은 한 해를 훨씬 넘긴 이제야  그 긴 여정을 마친다. 마침내 원점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 , 나는 괴테의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와 더불어 여행의 진정한 가치를 새삼 되새겨본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여행이라는 두 글자가 운치있게 라오새겨지던 때가 있었다. 길 떠나는 나그네의 발길마다 풍류가 넘쳐나고 , 먼 길에서 돌아온 자의 표정마다 한결 성숙하고 정겨운 삶의 내음이 물씬 풍겨나던 때가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선 그러한 정취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행의 참된 의미가 퇴색되고 변질되어버렸다. 이런 경향은 아마 해외 여행이 완전히 자유화 된 이 후에 만연된 풍조인 듯싶다.  과소비 호화 사치 외유가 판을 치고, 보신관광이니 섹스관광이니 하는 용어들이 난무하고 해외 연수를 빙자한 선거철의 선심관광이나 고관 나리들의 골프 외유도 별로 귀설지 않다. 해외 신혼 여행이나  베낭 여행의 경우에도 혹은 여행사의 횡포로 , 혹은 젊은 객기의 방종한 발산으로 인해 이런 저런  잡음이 끊이질 않아왔다. 모두 여행의 참뜻을 잃어버린 데서 나온 현상일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상당히 크다. (그가 이탈리아로 떠난 배경과 동기에 대해서는 ‘해설’에서 밝혀놓았다 ) 괴테는 새로운 세계의 자연과 예술과 사회에 폭넓은 관심을 쏟으며 자기 수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만한 명성과 부를 가진 인물이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을 신분상의 이점과 향락을 멀리하고 익명으로 다니면서 오직 ‘눈의 훈련’과 내면의 수양을 쌓기 위해 진력했던 것이다.

불후의 위대한 시인다운 섬세한  관찰력 및 상상력과 더불어 이 책에서 인상적인 점은 매사에 근면하고 탐구적인 그의 자세이다. 자동차도 없던 시대인지라 먼 거리는 마차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괴테는 수많은 유적지를 찾아 끝없이 걸어다니면서 관찰을 하고 스케치를 하였다. 이동 중에도 쉼없이

착상을 하고 글을 썼으며, 광석과 예술품을  수집하고 틈만 나면 그림을 배우거나 식물학 연구를 해 나갔던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탐구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한 편 이 책은 본격적인 여행 안내서나 예술 개론서가 아니면도, 이탈리아 풍물과 예술로 우리를 인도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미 이탈리아를 알고 있거나 언젠가 그곳으로  떠날 사람이라면 , 괴테 시대의 로마와 오늘의 로마를 한번 세세히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어렵게나마  이 번역서가 나오게 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의 가치를 일찍이 인식하고 번역 기회를 주신 푸른숲 기획진 여러분, 독일에서 다양한 자료와 원서를 부쳐주신 푸랑크푸르트 대학의 이호경 박사님, 텍스트 속의 이탈리아어 문장을 해독하는 대 도움을 주신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태리어과 이현경 선생님, 그 밖에도 이런 저런 자문을 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차례

1. 칼스바트에서 로마까지 ( 1786 9월 - 1787년 2월 )

2. 나폴리와 시칠리아 ( 1787년 2월 - 1787년 6월 )

3. 두번째 로마 체류기 ( 1787년 6월 - 1788년 4월 )


해설 

위대한 시인의 섬세한  눈길로 본 자연, 예술, 그리고 삶


이탈리아의 로마는 그리스와 더불어 유럽 문명의 발상지로서 오래 전부터 세계인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특히 알프스 이북 지역의 유럽인들은 그들의 음울한 잿빛 하늘을 벗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광의 이탈리아로 떠나고픈 갈망을 항상 마음 속에 품고산다. 그러나 여행자의 발깅을 이탈리아로 유혹하는 것은 단지 그 땅의 스려한 경관 분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럽인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 함양과 자기 수양을 위해서 그들 문명의 고향, 그 영원한 수도 로마를 찾는 것이다.

 유럽인의 이탈리아 여행 조류가  본격적으로 물꼬를 트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반이었고 , 18세기 들어서 그 규모가 더욱 확산됐다. 특히 고대 예술에 심취한 미학자 빙켈만(1747년- 1768) 은 1755년부터 13년 동안이나 로마에 머물면서 연구하는 가운데 로마를 ‘ 온 세계를 위한 위대한 학교’라고 까지 규정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 예술에 대한 빙켈만의 여러 저술은 독일의 작가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고대 예술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 1749- 1832) 의 이탈리아 여행도 그 같은 시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괴테는 37세 때인 1786년 9월 3일 독일 땅을 떠난 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눈과 마음을 열고 새로운 세계를 마음껏 호흡하였다.  이 여행은 괴테 자신의 인간적 성숙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 문학의 발전 과정에서도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괴테가 조화와 균형의 고전미에 눈을 돌리게 된 이탈리아 여행 이후의 시기를 우리는 ‘독일 고전주의’시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괴테의 유년 시절부터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동경의 땅이었다.  괴테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 온 아버지는 소년 괴테에게 이탈리아 여행담을 자주 들려주곤 했다. 또한 거실에 걸려있는 로마의 전경도 , 아버지의 여정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이탈리아 지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곤돌라 모형, 그리고 현지에서 수집해온 작은 대리석상과 박물 표본 등은 이탈리아에 대한 소년 괴테의 상상력을 지속적으로 자극한 요소였다.

 그 뒤 20대 중반의 청년 괴테가 ‘질풍노도’ 시대에 격정적인 감정의 조류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괴테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탈리아 여행을 떠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괴츠>의 작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26세의 괴테는 이탈리아 대신 , 칼 아우구수트 공의 초빙을 받아 바이마르로 옮겨가 정차권에 몸을 담게 되었다.

그후 10년 동안 정치인으로 변신해 있던 괴테는 고위 관직을 맡아 행정 능력을 발휘하면서 뭇 사람들의 찬탄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산적한 국사에 몰두하느라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점점 무뎌져갔고 작가로서의 명성도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이 기간에 괴테는 과학 분야의 연구에서도 탁월한 결과를 남겼고 그러한 과학 지식은 그가 쓰고자 하는 시문학에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 바이마르에 남아있는  한  두 부문도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 때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 주었던 바이마르가 이제 구속감만 강요하는 감옥과 같아졌다. 그런 상태에서 괴테는 자신의 37세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모여든 지인들, 곁을 살며시 빠져나와 별다른 점도 없이 역마차에 몸을 싣고 훌쩍 이탈리아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을 옥죄고 있던 숨막히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한 괴테는 로마를 향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베네치아 들이 첫번째 경유지들이었고 피렌체, 페루자, 아시시를 거쳐서 1786년 10월 29일 , 괴테는 그렇게도 동경하던 로마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마침내 ‘세계의 수고’에 도착한 괴테는 “어찌할 수 없는 욕구이 이끌려” 로마를 찾게 되었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 정말이지, 지난 몇년 동안은 마치 병이 든 것 같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길을 오로지 이곳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며 이곳에서 지내는 것 뿐이었다. 이제와서 고백하건데 , 그 때는 정말       라틴어로 쓰여진 책 한 권 , 이탈리아 지방의 그림 한 점조차 바라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

         본서 160- 161쪽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로마였고, 로마를 향한 갈망이 하고 커서 그 동안  이탈리아와 관련된 책이나 그림조차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 그래서 괴테는 로마에 도착한 이날을  자신의 ‘제 2의 탄생일’이자 ‘진정한 삶이 다시 시작된 날’ 이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로마에 와서야 괴테는 진정으로 평온하고 명랑한 심적 상태가 되어 3개월 이상을 지내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한 뒤 , 애초에 마지막 여정으로 생각했던 나폴리를 찾았다. 그러나 “나폴리를 보고 죽으라” 는 말에서도 상상할 수 있듯이 나폴리 지방의 그 풍부한 색채와 눈부신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이탈리아 체류 기간을 연장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괴테는 시칠리아 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나폴리를 거쳐서 3개월 만에 로마로 되돌아왔다.

1년 가깝게 계속 되었던 두번째 로마 체류 기간 동안 괴테는 이전에 방;마르에선 누리지 못햇던 익명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지냈다. 저명한 작가이자 바이마르 고위 공직자인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다닌 그가 로마에서 가깝게 지낸 사람들 가운데는 시인이나 정치가는 없었고 그 대부분은 화가나 조각가들이었다. 괴테는 이 ‘위대한 학교’에서 자신의 눈을 훈련시키며 예술지식을 늘리고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미술가들과 친교를 맺었던 것이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 중에 커다란 관심을 쏟으며 몰두한 대산은 자연과 인간 사회, 그리고 예술이었다. 독문학자 헤르베르트 폰 아이넴은 만연의 괴테가 <나의 식물학 연구사>에서 스스로 술회한 내용을 토대로 , 이 세분야에서의 관찰 결과를 이탈리아 여행 시기의 중요한 사상적 수확이라고 보았다. (715-716 상단 생략)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보고듣고 체험한 내용을 다양한 형식의 글로 남겼다. 여행기간 동안 거으ㅏㅣ 날마다 쓴 일기, 연상의 연인 샤를 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의 헤르더에게 주로 띄운 편지, 그리고 만년의 괴테가 이 시절을 회상하며 추가로 써넣은 보고 형식의 글, 논술 성격의 글이 그것들이다. 이 기록들이 책으로 묶여져 처음으로 출간 된것은 1816년과 1817년의 일이었다. 이 판본의 제목은 <나의 삶에서 제 2편 제 1,2부 >였는데 제 1편이란 <시와 진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뒤로부터 제 3부까지 포함해서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비로소 완간 된 해는 1829년이었다.

 제 1부와 제 2부의 내용은 대부분 일기를 토대로 한 반면 , ‘두 번째 로마 체류기’라는 부제의 제 3부는 앞서 말한 다양한 형식의 글에다 다른 사람의 편지와 논문까지 수록하는 색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객관적 여행정보를 전해주는 여행 안내서가 아니며, 괴테 자신의 예술관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지침서도 아니다.  그보다 이 책은  그 시기 괴테의 삶과 자기 수양과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는 자서전의 한 단면이다. - 이후 마지막까지 두단락 생략-                    -옮긴 이 박영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