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용

정명숙 수필가 문파문학 2009년 가을호 대담

권남희 후정 2009. 10. 11. 21:01

  문학의 소금밭에 쏟아지는 한여름 햇볕   

  정명숙 수필가

 

 

 30도가 넘는 한낮에 선생님을 만났다.

평소에도 준비성이 철저하신 선생님은 처절할 만큼 아픔을 겪었던 이십대 초반의 시작노트와 기록물을 가지고 나오셔서 깜짝 놀라게 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일도 역사입니다. 국가에만 역사가 있는 게 아닙니다.’하시는 선생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시간이다.


일시 : 2009년 8월 5일 수

장소 :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2층 커피숍

대담 :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

정리 : 권남희 한국수필 편집주간


선생님의 삶을 향한 투지와 성실함과 노력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70세 넘어  허리 수술을 하고 난 후 우울증 극복을 위해 수영. 그림 . 중국어 배우기 등 자신을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  그림 전시회에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수술후유증으로 오른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글도 쓸 수 없어 손 운동을 위해 가까운 주민센터 그림교실을 찾아갔었다. 선생님께  말씀 드리니 세모, 동그라미 그리기를 하며 필력을 기르라고 하여 젊은 사람들은 갖가지 색깔로 그림을 그릴 때 선생님은 세모, 네모 그리기를 6개월 동안 하며 손목의 힘을 길렀다. 이제 거의 원래대로 돌아와서 일을 할 수 있으니 기쁘다고 한다.   

선생님은 가방에서 비닐에 싼 갈색 낡은 노트 한권을 꺼내신다. 사실은 책이다. 자칫 잘못 손대면 부서질 만큼  낡아있다. 오빠가 길에서 사다 준 책을 읽어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내내 울면서 번역을 했다. 출판사에서 기특했는지 고시공부 하는 수험생들이 많이 읽는 『고시계』에 실어주었다. 이제  고인이 된 장영희 교수 아버지와 번역팀으로 같이 일하기도 했던 선생님이지만  당시는 무명이니 조흔파 선생과 같이 번역한 걸로 하자고 해서 그렇게 했던 거라고 한다. 나중에 피천득 선생이 조흔파를 만나서‘ 번역이 잘 되었다’고 칭찬을 했다는데 억울하지만 한편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흐뭇했다.   선생님을 보니 ‘화가의 아내’책이 생각났다.

주로 유럽 인상파 화가들을 빛나게 한 아내들에 대한 글이다. 재능이 있어도 남편의 그늘에 묻히거나 뒷바라지 때문에 아예 포기했던 아내들 이야기다. 작가로, 방송 드라마로 워낙 유명하신 분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면서 글쓰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물론 처음에는 힘들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이 많으면 하소연이 긴 편지를 남편에게 쓰기도 했는데 읽지도 않고 쓰레기 통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선생의 글쓰기 시발점이다. 1967년부터 여성동아에 남편 모르게 남편 흉 보는 글을 써서 발표했는데 몇몇 문인들에게 ‘남편이 써 주었을 것이다’라는 오해를 받았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남편이 대신 써주면서 자기 바람피운 이야기를 밝히겠느냐고 묻는다. 60년대 초만 해도 여성들은 희생하고 내조하는 게 전부라고 신문칼럼에도 써대는 무서운 시절이었다. 어느 날 최일남 씨가 물었다.

“ 이런 글 써도 괜찮아요?”

선생님의 글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그 뒤부터 패러디를 한 여성시리즈 글들이 80년대. 90년대까지 쏟아져 나왔다.

어쨌든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근원은 무능한 친정 오빠 셋과 아주 유능한 남편에서였다.

이북에서 부잣집 막내딸로 자랄 때는 서울과 동경에서 유학하며 가끔 집에 들르던 오빠들의 존재는 멋있는 남자였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 부산 제 3부두에 피난을 와 부두노동으로 살아가면서 보니 오빠들의 생활능력은 0점에, 너무 무능했다. 부잣집 아들의 주변머리에 분개 하면서 선생님은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다시 13년 차이의 남자, 전실 자식과 10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조흔파와 결혼을 할 때 오빠들은 반대하여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유는  ‘3.8선이 뚫리면 어머니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러느냐, 는 우려였다. 오로지 한복입고 집에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는데 26년 밖에 못 살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시기 전 조흔파 선생이 <대한 100년> 책 앞에 빨간 매직으로 ‘그동안 당신의 수고와 고생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교대로 살자’ 이렇게 써주었는데  마지막처럼 되었다.       

 1972년 한국수필로 등단하셨으면 故 조경희 회장님이 1971년에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그 해 수필지를 창간했으니 거의 등단 1호나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늦은 나이에 이화여대와 상명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런 학구열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여쭈었다.

남편 조흔파란 존재는 지금 와 생각하니 고마운 사람이다. 늘 공부하라고 몰아 붙였다. 물론 그 전에도 역경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공부를 하였다. 미쳐버릴 것 같았던 6.25가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피난 시절은 쌀 한가마면 여자들을 얻었던 그런 어려운 시대였다. 나 때문에 오빠들이 군인들에게  죽을 뻔 하기 몇번이던가. 숙대를 가기 위해 등록금을 모았다가  올케에게 들켜서 미움받고 오빠 집에서 쫒겨나기도 했다.

선생님은 평소에도 책과 가까이 하시지만 위안으로 독서를 하신다고 들었다. 문학인으로서 필요한 독서활동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독서량이 쌓이면 필력으로 연결된다. 글쓰기의 기본바탕이 절로 갖춰지는 것이다. 요즘도 나는 책을 많이 읽고 있는데 일본 가면 책을 사기 위해 들르는 곳이  동경의 헌책방이다. 책은 나에게 위안처요 무한한 지식을 주었다.       

선생님은 5살 때부터 책과 가까이 했다.  고향엔  두 곳에 서점이 있었는데 책방에를 혼자 못가 셋째 오빠 손을 잡고 가곤 했다. 오빠는 서점에 있는 지구의를 돌리면서 여기는 어디고,  어느 나라고 설명해줄 때 너무 수줍어서 손가락으로 지구의를 못 돌려본 일이 오랫동안 한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몸이 약해 엄마 품을 모르고 자라 아버지가 막내딸을 위해 애를 쓰느라 동화책, 그림책들을 사다주었다. 당시 동경과 서울에 유학하던 오빠 셋도 방학 때마다 책을 사다 주었다. 학교를 일찍 입학 하며 몸이 약했던 선생님은 폐결핵에 걸려 당시 누구와도 어울릴 수가 없었고 오로지 고양이 한 마리와 요강. 그리고 책이 친구였다. 다음은 무엇을  또 읽을까 그것을 걱정하며 지냈다. 아프다는 것은 손해 본 것 같지만 책이라는 친구를  알게했다.

책은 선생의 구원자다. 피난 시절 안동에서 주워 읽었던 겉표지 다 떨어진 ‘안나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책이 아니었다면 견뎌 낼 수  없었을 거라고 회고 한다.

지금도 자라나는 손자 때문에 긴장하면서 산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할머니 방’이라며 구경을 시켜주었는데 자기 눈에는 책읽고 글쓰고 벽에는 매모지가 잔뜩 붙여있는 할머니 방이 신기했던 것이다. 화장실에도 책을 두고 메모지와 펜을 두고 있다.    

일본에 가서 강연도 많이 하셨던 선생님께 일본작가들은 주로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그리고 일본수필작가들도 한국처럼 문학성을 따지며 주변문학으로 치부하는지 물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국민성으로 볼 때 모두가 시인이고 수필가다. 일본은 지금 세계무대로 발돋움을 하고 있다. 순수문학이냐 대중문학이냐 대립이 심했던 일본은 이미 60년 전 그 벽을 무너뜨렸다.  일본 작품은 아주 소프트하며 심각하지 않다. 무라까미하루끼의 작품을 보라. 부드럽고 쉬운 언어로 세계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올해 그가 발표한 IQ84는 조지오웰 <1984년>소설 종말론에 대한 해답이고 일본인 대상이 아닌 서구취향의 소설이다. 80개국 이상의 나라로 번역되었는데 사상과 종교를 초월하고 있으며 읽기 쉽게 되어 있다.     

 한국에서 수필문학의 붐은 문학인구의 저변확대에 영향을 주었고 지식인들의 정신활동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사회의 수필문학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수필인을 양산하는 이 현상이 어느 정도 지속 될 것으로 생각한다. 가장 기본적인 문장의 문제라든지 작가로서의 자질을 위해 닦달하고 연마시켜 대학원 졸업처럼 뽑는 일을 어렵게 해야 한다. 한국수필문학의 숙제는 아픈 자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필이 지나치게 정통성을 찾으며 이유없이 무겁게 가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수필은 또 개인사의 자랑거리가 아니다. 은퇴한 지식인들의 치적같은 지랑거리를 수용하는 장르로 전락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학력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학력의 일본작가 마쯔모토세이죠오는 성공한 작가로 주목받으며 아쿠다가와 상을 탄 후 또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는데 그 상을 거부하면서 ‘일본문단에 고함’으로 포고문을 열었다.‘ 독자없는 글은 부럽지 않다.재미있어 독자가 많아 잘 팔려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문학은 내 삶의 지팡이’이라고 하셨고 자기의 결점을 가지고 글을 써야 호소력있는 글이 된다고 했다. 자기 도취에 빠져 자랑 일색인 수필쓰기를 경계하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출전이 있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자기를 미화하면 글이 아니기에 자기 결점을 들여다보고 성찰해야 한다. 문학은 많은 이에게 기여하는 활자예술이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어떤 가난한 자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작가 가와바다야스나리의  ‘16살의 일기’는 육친을 모두 잃어가는 과정을 쓴 소설인데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다. 어린 날의 모태상실감은 그의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어 작가를 늘 깨어있게 한다.  

지금도 잘 팔리는 ‘초야’는 당시 21살이었던 조선에서 태어 난 문둥이 작가 호죠타미오가 쓴 소설로 일본 나병 수용소로 들어가 첫날밤을 치른 이야기다. 수용소에서 26살에 죽는데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그에게 가와바다야스나리가 장례식에 가서 시신을 수습해 주었다.그에게 문학상도 주었는데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바치는 사랑은 종교를 초월하여 숭고하기까지 한 인간애라 할 수 있다. 

수필문학의 20-30대 젊은 작가발굴도 앞으로 중요하지 않느냐고 했다 .

 선생은 ‘’키친‘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세계적 작가로 뜬 일본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를 아느냐고 묻는다. 아버지가 시인이고 평론가인데 그 젊은 여성작가는 필명을 대담하게 남성성기를  상징하는 바나나로 했다. 명품이나 사고 생산적이지 못한 여자들의 질투와 수다에 맞서는 담대함을 말한다.  젊음은 자기시험적인 창의력을 보여주려고 많이 공부(독서)하며 도전해야한다.       

 헤어지면서 교보문고에 들리신다는 선생님은 젊은 층에게 100만부를 돌파한 재일작가 강상중의 베스트셀러  ‘고뇌하는 힘’을 권하고 싶다고 하신다. 또한  ‘이 세상에 한권의 책을 남긴다면 ’논어‘라고 말씀하신다. 조흔파 선생이 돌아가신 후 어느 날 그의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앞으로 써야 할  계획이 80세까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속에 ‘소설 논어’가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논어를 다시 읽어보았다. 외식이 흔하지 않던 때 미도파 백화점 레스토랑으로 불러내 저녁을 먹다가 옆자리의 노부부를 보며 ’우리도 이 다음에 저렇게 살자‘고 했던 때가 엊그제 같다고 회상한다.        

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문학의 소금밭에 내리 쏟아지는 한여름 볕이다.  

정명숙 약력

전 상명대 교수. 일본번역가협회 회원. 일본문화연구회 회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한국번역가 협회 고문. 한국수필가협회 고문. 저서 『바늘없는 시계탑』『행복사전』『순수의 기쁨』 한가닥 바람이 되어 외 4권 대학교재및 번역서등

한국수필문학상. 수필문학대상. 숙대문학상 등

수상. 시대문학 등 수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