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경희 회장님과 둘째따님
유럽 문학기행 중
제주도 세미나( 홍성유 소설가.지연희 수필가, 장금생 수필가. 이숙 수필가. 이희자 시인 )
한국 최초 ‘현대 여성 문예원’을 세운 장금생 원장
주부들에게 문화를 배울 수 있던 마당이 불모지나 다름없던 1982년4월 낙원동에 사재를 털어 ‘여성문예원’을 설립하여 대한민국의 쟁쟁한 여성작가들을 배출한 여걸,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 ‘세계를 내 품안에’ 의 원대한 꿈을 안고 해외문학탐방단을 이끌어 선구자 역할을 해 온 장금생 수필가를 정목일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이 만났다.
대담 : 정목일 이사장
장소 : 중구 구민회관 내 여성문예원
일시 : 2010. 2.23. 오후 1시
정리: 권남희 편집주간
정목일 : 개인이 세운 한국 최초의 ‘현대여성문예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도전적 용기와 의지, 그 행로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장금생: 결혼 후에 잠시 손을 놓고 있던 문학과 접하게 된 기회가 1971년에 있었고 문학동인 활동을 10년간 할 때 그 당시 주부들의 모습에서 문학에 대한 열망과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내면을 느끼면서 배움의 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시도조차 하지 못 했던 여성문학의 장으로 한국여성문예원을 설립한 것은 결국 여성들의 욕구를 지나치지 못한 나의 개척정신이 힘이 되었고, 당시 주변의 훌륭한 문인 선생님들께서 여러 면으로 조언도 주셨기에 과감히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여성 문학을 위한 새로운 시도로,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개원하였던 것입니다. 오직 내면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가지 않는 길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정: 월당 故 조경희 선생과 각별했지 않습니까. 일화라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장: 조경희 선생님과는 한국여성문예원 개원 이전부터 인연이 되어 오랜 세월 함께하기에 잊을 수 없는 분입니다. 큰 문인으로, 선배로 이끌어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따뜻한 친정어머니처럼 맘 써주시기도 한 어른으로 존경과 더불어 친밀한 사이로 지냈지요. 해외를 다녀오시면 꼭 작은 손지갑이나 손수건을 사 오셨고 그대로 주시지 않고 지갑에는 지폐를 넣어 주시고 손수건은 동전이라도 받고 주시곤 하셨습니다. 지갑은 그래야 돈을 벌고, 손수건은 주고 받아야 헤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벌써 14~15년 전 일인데, 뉴욕에 오신 조회장과 나의 둘째 딸의 만남은 지금도 가끔 아이들과 말하곤 할 정도로 인상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비가 오는 평일로 간만에 뉴욕에 오신 조회장님을 점심 대접하고자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이미 계산을 하셨더랍니다. 조회장님의 모습에 둘째 딸이 놀라니 조회장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총은 천천히 빼고, 지갑은 빨리 열어야 한다’는 말을 실천했을 뿐이라고 하셔서 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분으로 남아있어요. 이제는 만날 수 없기에 두고두고 기억난다고 합니다. 평소 씩씩한 여장부 같은 기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 그날은 그 어떤 친정어머님 보다 따뜻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여행지에서 뮤지엄이나 미술관 안내를 부탁했고 그것도 미대를 나온 둘째 딸도 잘 모르는 강모씨의 전시를 보시겠다고 미리 알아 보시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강작가는 너무도 유명해진 분이신데 일찍이 조회장님은 강작가의 작품을 보시겠다고 했으니 미술을 전공한 딸애보다 더 조예가 깊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유학 중이던 장남에게도 뉴욕에서 가이드를 부탁하시더니 떠날 때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 마치 당신의 아들처럼 대해 주신 이야기도 가족들이 모일 때 추억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 장남도 뉴욕 뉴저지에서 혼자 사업을 잘 하고 있으니 조회장님의 안목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같은 여성으로 모든 분야에 성을 뛰어 넘어 앞서 살고자 노력 하신 분이시고, 쉽지 않은 나의 인생에 막역한 사이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신 분, 잊을 수 없는 조회장님이십니다.
정: 서울시 여성백일장, 문예지 발간사업, 문학강좌 등 여성 문예원을 이끌면서 보람을 느꼈던 일이라면 어떤 점을 들 수 있겠습니까?
장: ‘신동을 키우는 어머니의 역할’이 나의 운명이라 생각했습니다.
한 평생 창조하며 선구자로 개척해야 되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을 가끔 느낍니다. 앞서가며 광야를 달리는 고달픔과 외로움이 따르는 고고한 삶, 남을 위한 희생, 그 삶은 많은 신동을 키우는 데 전력을 쏟았고 앞서가는 창의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합니다. 곳곳에 피어나는 많은 신동들을 바라볼 때, 오랜 세월 속에 남 몰래 간직해 온 여정같은 시간들이 보람되고 값진 편린 같은 나날들이었습니다. 고행이나 다를 바 없는 문학의 길을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나의 숙명 같은 예술의 혼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 수필가이면서 미술, 음악, 무용. 영화 등 문화계 각 인사들과도 다양하게 교류를 하셨습니다. 주부 문학반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장: 여성문예원에 온 여성들은 잠재된 재능이 풍부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 예술과 관련된 인맥을 통해서 더 끌어내 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평범한 여성들에게 문화와 예술 작가와의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가이드의 역할 또한 그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정: 우리나라 여행문화가 정착하기 전부터 외국문화탐방을 주도했습니다. 이제 여행이 생활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선구자적 활동에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요.
장: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사회 분위기에서 유럽여행은 개인적으로도 모험이자 경이로웠던 경험이다. 여권 발급조차 까다롭고 어려운 시대에 ‘여류문인’이란 신분이 또한 특혜처럼 받아들여진 때라 다른 사람들 보다 일찍 여행을 꿈꿀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실제로 여권 발급 문제로 직접 외교부를 찾아가서 받아내었던 기억이 새롭다. 1981년 화가1인 홍대 교수 1인 그리고 나로 구성된 최초의 여행은 엄청난 문화적인 쇼크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젊은 예술인들과의 여행에서 그들과 떨어져 거의 혼자서 여행한 파리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대단한 충격이고 그런 문화적인 체험으로 타국에서 잠시 앓기도 하였으나 저서『난의 향기를 꿈꾸는 여인』에 실린 ‘파리는 비가 내린다’ -글처럼 그때의 열정과 도전의식이 다음 여행의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사실입니다.
정: 장금생 문학상은 어떤 성격이며 어떻게 운영을 하고 있습니까
장: 2009년에 ‘제1회 서울문학 축제’에서 제1회 장금생 문학상을 시행했고 1회 수상자로 수필가 조현숙, 수필가 류영애 이사님을 시상하였습니다.
우선 ‘장금생 문학상’의 취지는 정신적인 지주로 보통 사람에게 영향이나 영감을 줄 수 있고 그 에너지가 행동력이 있어 파워를 가지는 작품이나 작가에게 수여하고자 합니다. 또한 한국여성문예원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거나, 공을 세운 업적, 혹은 봉사로 기여하신 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은 재정이 부족하지만 차차 목적에 부합하는 분들의 모임을 구성하여 ‘장금생 문학상’을 수상하는 분들에게는 큰 힘이 되는 상이 되고자 기획하고 있습니다.
정: 현재 활동하고 있는 여성문예원 출신 작가들은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장: 1982년에 개원하여 문학에 뜻을 두고 개인의 자질을 발휘할 기회를 찾고자한 여성들은 거의 한국여성문예원을 통과의례처럼 지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누구라 호명을 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이유는 연령이 60이 지나는 여류 작가의 대부분이 그 시대에 유일한 ‘문학의 장’인 이 곳에 강의를 하기 위해 강의를 듣기 위해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문단에 확실히 자리 잡은 몇 작가는 수필가이며 소설가인 황인경, 시인 김현숙, 이외 다 아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몇몇의 유명 여류작가의 배출도 중요하나, 그 당시 여성 자신도 모르던 여성의 잠재 능력 기회를 누구에게나 줄 수 있었고, 여성 개인에게 문학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점이 한국여성문예원의 큰 역할이라고 봅니다.
그 영향이 지금의 문인들 속에 여류작가를 많이 배출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한국여성문예원의 이런 실적은 우리시대 문화사의 한 페이지에 남겨지길 바랄 분입니다.
정: 낙원동에서 30기까지 수료생을 배출하고 중구구민회관에서 여성문예원을
다시 개소하였습니다. 여성문예원을 남성에게 개방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장: 2010년이니 개원 초기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그 시절 보다 여성들의 위치가 상당히 많이 달라졌고, 능력도 대단해지고 있습니다. 문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나 인지도가 여성작가기 때문에 더 관심을 보이기도 하는 시대인만큼 요새는 여성들의 작품이 대세가 아닌가 할 정도이니 구태여 남성, 여성의 한계를 구분하는 것이 발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대의 변화에 한국여성문예원의 ‘정체성’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가 연구해야 될 과제입니다.
정; 선생님의 수필작품경향을 말한다면 어떤 것이며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장: 바쁜 일상에서 자기를 되돌아보고, 고백하는 내용은 나 자신의 소중함과 일상에서 간과하기 쉬운 정서를 찾게 하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글을 통해서 평소에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글 속에 표현된 모습은 새로운 모습인 것이다. 진정한 맘을 알 수 있는 것이 문학이고 장르 중에서는 수필입니다. 소탈하고 진솔하게 자신을 볼 수 있게 쓴다는 것이 수필의 매력이지요. 제2의 내재된 내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수필이고,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새롭고 다양한 문화와 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작업은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나’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건강이 여의치 않은데도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주신 점 잊지 않겠습니다. 초심의 그 뜻대로 21세기에도 작가들의 요람으로 건재하기를 빌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현재 장금생선생의 건강상 이유로 큰 따님 김도경시인이 여성문예원 원장을 맡고 있다.
장금생 약력 : 숙명여대 국문과졸업. 중등교사 퇴직. 생활문학인 협회장( 전국주부백일장 당선자 모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1984년 이후 유럽문학 기행 주관. 1989년 문인, 예술인, 교수연합 미국연수 1,2,3차 총괄(300여명) . 한국여성문예원 원장. 명동축제, 월드컵성공기원 낭송행사, 올림픽공원 행사 등 유치.
작품집 『난의 향기를 꿈꾸는 여인』외 다수 .『생활』1집-15집『불어라 봄바람』『일어나는 숲』『대춘부』외 다수
<한국수필> 등단 . 한국수필문학상(19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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