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집무실 에서 김년균 이사장
김년균 이사장
지연희 문피문힉 발행인 / 김년균 시인
김년균 시인
숙명적 시인 김년균
제임스조이스의 날개를 달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김년균 시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과 함께
사진.글 권남희 한국수필 편집주간
2010년 2월 27일 12시 동숭동 문협 집무실
토요일 혜화역은 색색으로 늘어선 꽃묶음 다발, 사람들의 기다림과 만남으로 출렁인다. 문득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외롭고 힘든 곳에 머물러 있더라도 오는 길이 같고 가는 길이 같으면 그게 더욱 중요하다’ - 김년균 시인 『숙명』시집 중 ‘동행’ 첫 구절을 떠올린다.
‘첫 직장이 한국문인협회였는데, 그 때 나는 월간문학 기자였지요. 돌고 돌아 마지막 직장인 한국문인협회로 되돌아왔어요. 이사장으로 마침표를 찍고 있으니, 숙명이지 않습니까?’서라벌 예대에 입학하여 스승 김동리 선생을 만난 일부터 범상치 않은데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있는 시인을 직장으로 불러올린 일, 주례를 선 일 모두 인간미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왜 김년균 시인을 ‘뜨거운 열정의 승부사’라 부를까 생각하며 동숭동 예총회관을 올라간다. 편집실, 사무실, 이사장실이 한 공간 안에서 복닥거리는 모습은 컴퓨터만 새로 갖추었을 뿐 80년대나 지금이나 집기까지 변함없다. 좀 멋있는 사진을 찍고 싶은데 적체된 살림살이로 구도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문학사상, 한국문학, 월간문학 등 굵직한 문학지의 간부로 계셨고 단체장을 맡은 일들을 의식해서인지, ‘오늘은 시인으로만 대해 달라’는 선생에게 대뜸 문학지 이야기부터 꺼냈다. 한국문학에서 무려 11년간이나 편집장을 지냈고, 문학사상에서는 편집인과 전무이사를 맡았으며, 월간문학에선 편집국장으로 일했는데, 지금과 그 당시 문학지의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그에 대해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도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라고 여겼던지 ‘어떻게 해야 독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문학지의 운영이 예전과 달리 걱정스러워졌다는 뜻이 담겨 있다.
문학지 편집과 운영 경험이 풍부한 시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치고 이야기에 막힘이 없다. 좋은 작품을 싣는 것이 최우선이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편집으로 독자의 관심을 이끄는 문학지를 만들어야 한다. 문학이 삶의 질을 높여주고, 인간의 마음을 아름답게 다듬어주는 위대한 예술이라는 점에서, 문학지의 성장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강조한다.
50-60대 작가들이 늘고 젊은 작가들의 유입이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 궁금했다. 시인은 젊은 작가들이 줄었다기보다, 늦게 시작한 문학 인구가 늘었다는 말로 대신했다. 등단의 연령대가 예전 같지 않게 넓어졌다는 것이다.
젊은말 시인의 초상
시인은 신앙시집 ‘나는 예수가 좋다’ 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종교에 몰두하면 문학성이 약화되지 않을까 궁금하여 대뜸 모태신앙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시인은, 1962년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심이 깊지 못해 부끄럽다며, 문학이 ‘선’을 추구하는 것이니만큼 종교의 목적과도 상통한다며, 시인으로 사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자위했다.
시인의 문학적 소양은 유년기에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무엇에 의해 잉태되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인은 시골집에서 자랄 때의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에게 있어서 문학은 ‘숙명’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간이 쌓여 이루는 만남은 얼마나 중요한가....... 집안에는 어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인정 많은 어머니는 밤중에도 새참과 막걸리를 만들어 대접했는데, 겨울 농한기에는 할 일이 없으니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을 노랫가락으로 맞추어서 읽곤 했다. 어린아이 머릿속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각인되었고, 문학이 이렇게 감동적일까 하고, 가슴 깊이 향수로 심어졌다.
시인의 손위 누님이 독서를 많이 했는데, 입담 또한 좋아서 그가 읽어주던 박계주의 ‘순애보’ 김래성의 ‘애인’ 이광수의 ‘흙’ 등은 눈 감고도 줄줄 외울 정도였다. 그러한 탓인지, 문학에 대한 열정이 커져 고등학교 때 이미 시집 한 권 분량을 책으로 내기 위해 인쇄소에 알아보기도 했으나 비싼 비용 때문에 출간은 하지 못했다. 고3 때는 지리산 탑전(암자)에 들어가 16일 동안에 1천 매가 넘는 소설을 썼다. 몇달쯤 머물 계획이었는데, 지독한 빈대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쫓겨나왔다. 대학은 글쓰기와 거리가 먼 ‘상대’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등록금을 마련해주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집안이 걱정되어 등록금을 그대로 서랍에 넣어두고 군에 입대하였다. 그런데 문학은 그에게 숙명이었던가, 군에 입대해서도 문학과의 인연은 게속되었다.
논산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김해의 특수학교에서 6주간인가 교육을 또 받았다. 마지막 주에 교육생들을 모아 어느 대도시로 견학을 갔는데, 보급관리단이란 곳이었다. 미고문단과 장교, 타이피스트 등이 줄줄이 앉아 일했다. 군대에 이런 곳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비로운 부대였다. 형식이었겠지만, 견학에서 돌아오자 사령부에서 지원부대를 적으라고 하기에 시인의 생각으로, 전방 부대를 지원하면 작품 소재를 많이 얻을 것 같아 일선부대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데 왠일일까. 놀랍게도 얼마 전에 견학 갔던 그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엔 신기하게도 아늑한 창고가 있어, 글을 쓰고 책도 많이 읽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상사인 장교는 시나리오를 쓰는 분이었으므로 인간적으로도 마음이 통했다.
시인이 제대특명을 받아놓고서도 휴가를 내어 대학 입시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복을 입고 서울에 올라와 서라벌예대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그 때 김동리 선생이 면접장에서 ‘왜 문학을 하려 하는가’고 묻자, ‘선생님 앞으로 추천작품을 보냈는데 안 읽어보셨나요?’고 당돌하게 물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자 선생께서 오히려 당황하시며 ‘나가봐!’라고 했다.
작가 개인으로 살아갈 때는 자신의 문학성을 위해 치열하게 단련하면 되지만, 한국문단의 수장을 맡고나서는 자신의 일보다는 한국문학이 세계적으로 도약해야 된다는 과제랄까, 그런 공적인 일에 마음이 많이 쓰일 텐데, 그러한 한국문학의 입지에 대해 궁금했다.
시인은 민족적인 작품성을 내세운다. 한국문학이 세계적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우리 고유의 민족문학을 살려야 한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우리 작품이 세계적으로 비상하려면 더욱 한국적이어야 한다. 한국적인 것은 우리 한국인만이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다. 그것이 문학작품으로 승화되었을 때 세계적인 작품으로 완성된다. 물론 번역에도 문제는 있지만, 그런 당면문제는 정부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인에게는 우리나라의 내노라고 하는 작가들과의 드라마 같은 만남들이 많다. 시인이 시민회관에서 결혼식(1972)을 올렸을 때 김동리 선생이 주례를 맡고, 이문구 작가가 접수를 하고, 백시종 작가가 사회를 보고, 정종명 작가가 진행을 맡았다. 시인의 첫시집『장마』(1974)를 보면, 김동리 선생이 글씨(題字)와 서문을 쓰고, 이문구 작가가 장정을 맡고, 조태일 시인이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문학사에 두 번도 있기 힘든 경우가 아닐까.
구상 시인과 가까이 지냈던 일화는 더욱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아버지를 닮았기에 아버지같이 느껴졌던 시인은 어느 날(1979), 구상 선생에게 ‘선생님이 저의 아버지와 닮았습니다’ 하고 토로한다. 그러자 구상 시인은 두말없이 ‘그럼 우리 부자지간으로 지내자’고 한다. 그 뒤로 구상 선생은 시인의 집에도 자주 들르고, 외국에 나가면 선물도 사다주고, 아주 각별하게 지낸다. 또한 이문구 소설가와 맺었던 아름다운 우정은 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남과 남이 서로 만나 이처럼 아름답게 지내는 일은, 겉으론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79년 10.26 사태가 났을 때, 사는 일이 걱정스러워 신문에 한편의 시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사람’이란 시였다. 그 후로 줄곧 ‘사람’을 써온 시인. 사람이 사람에 대해 시를 쓰는데 특별할 것이 없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란 제목을 내걸고 이만큼 많은 작품을 쓴 과연 얼마나 될까.
‘‘릴케를 좋아하세요?’
시인의 책상 위에 릴케 시집이 있다. 릴케의 작품 세계가 인간적이고 서정적이며, 형이상학적이어서 좋다고 한다. 외국 소설가로는 헤밍웨이, 도스또예프스키를 좋아한다.
시인의 시 한편이 족자로 만들어져 벽에 걸려 있다. (사진찍은 족자를 넣을 것임)
작가는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소명의식을 갖고, 좋은 작품을 쓰기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60년 전통의 한국문인협회를 이끌고 있지만, 시인은 개인적으로 시 쓰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단체장이라고 해서 창작활동을 게을리 한다면, 어쩐지 속빈 강정 같은 허전함이 느껴진다.
창작활동도 열심히 하는 시인에게서 작가의 투철한 작가정신과 자존심을 엿보았다. 전통적이면서도 실험적이고 낭만적인 예술론이 풍성한 시대에, 시인의 문학을 향한 열정에서 우리 시대 마지막일 것만 같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본다.
김년균 시인
권남희 수필가 (편집주간 )/ 김년균 이사장 .시인
김년균 시인 약력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 1972년 이동주 선생 추천으로 등단.
한국문학 편집장, 지학사 월간부 편집국장. 문학사상 편집인 겸 전무이사, 월간문학 편집국장 및 사무국장 등을 역임.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김동리 기념사업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
제20회 한국현대시인상. 제1회 들소리 문학상. 제19회 예총예술문화상 대상, 제2회 윤병로 문학상 등을 수상.
‘사람’ 연작시집 『아이에서 어른까지』『사람의 마을』『하루』『오래된 습관』<숙명> 등.
시집 『장마』『갈매기』『바다와 이아들』<사람> <풀잎은 자라나라> <그리운 사람>『나는 예수가 좋다』등.
수필집 『날으는 것이 나는 두렵다』『사람에 관한 명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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