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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에세이
수필가 박연구(朴演求)
鄭 木 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한국문협 부이사장)
결핵환자처럼 창백한 얼굴, 빼빼 마른 몸매, 죽도 한 그릇 못 먹은 듯 기운 없어 보였지만, ‘수필’이란 말만 나오면 정열이 펄펄 넘쳐나곤 하셨다. 순하면서도 깊은 눈동자를 지닌, ‘수필 미치광이’를 자처하던 분이셨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업 수필가라 할 수 있는 분이셨다. 그에게 있어서 ‘수필’은 삶을 떠받치는 힘이었고, 등대나 다름없었다. 일생을 수필과 함께 보낸 수필의 개척자이며 운동가였다.
1970년대에 문단에서 수필이 공인되어 종합문예지인 <월간문학>과 <현대문학>지에 공식적으로 수필가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1975년 <월간문학>4월호에 필자의 <방>이란 작품이 수필부문 처음으로 당선작으로 발표되었다. 심사위원은 조경희. 박연구 선생이셨다. 박연구 선생은 지방에 있는 필자에게 전화와 편지로 수필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려주시고, 수필의 장래에 대해서도 얘기하셨다.
등단 이후 서울에 가서 수필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은 박연구 선생 댁과 김진식 선생 댁뿐이다. 박연구 선생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오늘은 내 집에서 자고 가야한다.”
박연구 선생이 머뭇거리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어가셔서 어쩔 도리가 없어 댁에까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집일지라도, 한 번 자고 가야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 계셨음이 느껴졌다. 서대문구 진관외동 기자촌 산등성이에 자리한 조그만 집이었다. 서가를 겸한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여러 수필집을 꺼내 읽어보느라고 뜬눈으로 보낸 그날 밤, 늦잠이 들려는 새벽 무렵인데, 아침 산책을 가시자며 재촉하셔서 함께 산으로 갔다.
수필문학의 중흥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박연구 선생은 수필의 미치광이가 되어 수필 전도사로 혼신의 힘을 쏟았다. 자신이 발탁한 제자들에게 발표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셨고, 수필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선생의 수필에 대한 안목은 날카롭고도 적확했다. 수필시대가 올 것임을 예견하고 품격 높은 수필의 꽃을 피워야 함을 강조하셨다. 좋은 수필가의 발굴과 양성이 수필문학의 앞날을 좌우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질적인 향상을 위한 노력을 다하려고 하셨다.
평생 가난했지만 수필이 있어 외롭지 않았던 박연구 선생-. 수필의 등불을 치켜들고 고고하게 길을 찾아 나섰던 사람! 수필을 두고 아웃사이드문학, 비전문문학, 아마추어문학이란 편견에도 수필문학의 참된 위상과 정도(正道)를 보여주려고 애쓴 수필 선각자였다.
박연구 선생의 수필은 따스하고 온기가 있다. 가정의 평온과 미소가 있다. 원대하거나 화려하거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다. 선생의 수필은 정(情)의 미학과 체온을 느끼게 한다. 가장 즐겨 다루던 소재는 가정과 가족이다. 딸 자랑에 독자들은 흐뭇한 미소를 띠며 아들을 얻고 싶어 하는 미음에 애틋한 공감을 느끼게 한다. 몸이 약해 첫사랑 여인에게 외면을 당하였지만, 혹시나 내 글을 읽어줄까 싶어 수필을 쓴다는 속마음을 털어 놓을 때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변잡사의 형상화라 해도, 서민들의 일상 체취와 정감을 소박하고 따뜻하게 전하여, 위로와 휴식과 평화의 미소를 제공한다. 아쉽고 측은함 속에서 정감의 손길을 맞잡게 하고, 마음의 공감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박연구 선생의 수필세계이다.
언젠가 필자에게 “이름이 좋아서인지 <바보네 가게>(1973. 범우사)가 많이 팔려서 다행이다.”는 말씀을 하셨다. 집 근처 식료품 가게가 두 군데인데, <바보네 가게>로만 사람이 몰리는 것을 보고 쓴 글을 표제(表題)로 삼은 수필집이다. 수필엔 진정성이 생명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박연구 선생은 출판사와 잡지사의 교열직원으로 일을 하기도 하셨지만, 수필과 관련된 일이었고, 수필잡지 편집과 발행인으로서 한국수필의 발전과 중흥을 위해 일생을 바친 수필 개척자였다. 한국일보 문화센터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일반인들을 위한 수필교실을 열고 수필 강의를 하신 분이셨다.
박연구 선생은 2003년 백혈병으로 70 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연세의료원으로 병문안을 간 것이 타계하시기 1달 전쯤이었다. 내 손을 붙잡으시고 무려 4시간이나 수필 얘기를 하셨다. 대화 도중에 대상포진(帶狀疱疹)의 진통이 와서 내 팔을 붙들고 “으악악-” 외마디 신음을 토해내시며 있는 힘을 다해 부르르 떠는 바람에 함께 경악하며 공포에 떨었다. 대상포진이 지나가자 다시 편안한 얼굴을 되찾았고, 수필 얘기가 이어졌다. 절박한 고통의 순간에서도 필자와 마지막 수필 얘기를 나누고자 하셨다. 선생에게 있어서 수필얘기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는지 모른다.
오늘날 수필시대라 할 만큼 수필의 양적 질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수필가 박연구를 알지 못하는 수필가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보기엔 나약하고 창백한 모습이셨지만, ‘수필미치광이’였던 한 수필가, 그런 스승이 계셔서 수필의 길을 가는데 외롭지만은 않았던 것을 가슴에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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