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가의 작품세계 육감@하이테크 수필집을 읽고
숭고한 삶의 실증적 채본
慧雲 오 양 수시인.수필가
수필은 퇴적층을 빠져나온 물과 같다. 중첩된 일상의 퇴적층에서 새어나오는 결과물이 곧 수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낱말은 ‘퇴적층’이다. 퇴적층은 조성물의 입자의 크기, 배열, 구조에 따라 층리가 나타나는데 각각의 층은 성분이나 모양이 다르다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즉 퇴적층은 오랜 세월 동안 반복과 변화를 거처 형성된다는 점이 인간의 ‘의식’과 닮아 있다. ‘퇴적층은 곧 인간의 의식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우리네 일생동안 어떤 변화의 자극과 반응을 되풀이하며 물결처럼 흐르고 다져지고 수축팽창을 거듭하면서 절리가 생기고 뒤틀리거나 휘어져서 여러 가지의 형상을 이루게 된다는 점이다. 미루어 짐작 해보면 우리네 의식 역시 타고난 유전인자에 후천적 환경요인에 따라 시시각각 그 층리의 성분이나 모양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층리에 따라 생각이 탄생하고 생활의 에너지가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설정해 볼만하다. 개개인은 하루하루 한살이를 통해 그 성분이 다른 의식의 퇴적층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가설설정이 가능해 진다. 수필은 곧 인간이나 사물의 진면목을 흡수 통찰하여 작가의 의식층(퇴적층)으로 거르고 쳐서 걸러낸 ‘의도된 언술’이라고 단언한다. 수많은 이론들을 살펴보자면 작가의 의식을 배제해야 한다거나 작가의 의식을 토대로 작품은 탄생한다는 說 등 다양하지만 필자는 작가의 체험과 가치관 곧 의식의 층리에 비춰지고 걸러진 결과물을 그려내는 것이 일반적인 수필 쓰기의 원류라는 견해를 유지하고 자한다. 따라서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의도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은 새로운 가치로 그려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의 퇴적층을 통과하여 나온 결과물에 비추어 세상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그것이 수필일 것이다. 퇴적층이라는 변수(x)와 그리고 그 층리를 빠져나온 결과물(y)과의 함수관계로 그 대상을 풀어 낸 방식이 곧 권남희 수필가의 작품세계라면 어떨까.
권남희 수필가의 수필은 전북 부안 격포나 제주 해변의 퇴적암을 연상케 한다. 마치 수 만권의 책을 쌓아올린 듯 신기하고 기이한 경관을 보는듯하여 놀랍다. 이만한 자연의 ‘숭고한 실증적 채본’이 어디 있으랴. 퇴적암의 층리 하나하나 들춰 읽다보면 세상사나 인생사가 한 눈에 보이지 않을까 싶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라는 지질시대를 지나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까지의 격변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과장일까?
권남희 수필가의 글은 객관(사실)과 객관(사실)을 모아 자신의 의식(퇴적층) 속에 흡수하여 하나의 개념을 육화시켜 주관의 원본을 주조해 낸 것이다. 흔히 줏대를 지니라고들 한다. 즉 주관을 뚜렷하게 정립하여 살라는 뜻일 게다. 논술지도를 수년 동안 해 온 필력이고 보면 권 작가의 수필은 논리정연하다. 주관이 뚜렷하다. 아름답다고 하기보다는 틀림이 없는 정확한 言辯이다. 이것이 바로 수필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수식어가 없는 간결한 문장이 권 작가의 문체요 정석이며 특징이다.
다음 세 가지 명제로 권 작가의 작품세계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 확실한 주관은 정확한 객관에 의해서 형성될 것이라는 명제다
수필은 생활 속의 이야기다. 상상이 아닌 몸소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그려낸 글 그림이다. 상상이나 추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주체의 시공(時空) 속에서 실현된 객관의 육화(肉化)다. 그 육화된 사실들을 모아 공유할 수 있는 공통점을 일반화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정립하고 그 개념은 우리의 의식으로 퇴적층의 한 층리로 체화될 때 수필의 가치는 인증을 받게 된다.
둘째 : 객관은 긍정의 체적(體積)이 클수록 주관의 층위를 높일 것이라는 명제다.
어떤 사실을 그렇다고 믿고 공감하는 비중이 클수록 흡수율을 높이는 객관이요 주관으로 활성화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여 자신들의 생활에 산소나 원기소로 활용되기까지는 수집한 자료의 양과 질이 많이 사람들의 공유된 사실과 걸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 주관은 공감과 공유의 체화를 통하여 실현될 것이라는 명제다.
수필은 일상의 이야기지만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주관은 육화되어 다시 객관적으로 공감되고 공유되어 실제 생활로 체화 됐을 때 비로소 수필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명제다. 권남희 수필가의 글에서는 공감과 공유의 체화를 위하여 치열한 작가정신이 읽힌다. 명징한 사실과 해박한 지성으로 일상의 실제상황을 모아 엮어낸다. 하여 필자는 권 작가의 수필을 수필계의 ‘채본’이라고 한다.
확실한 주관은 정확한 객관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명제다
권 수필가는 자신의 글에 일반화된 예화(例話)나 실제 예(例)를 반드시 제시한다. 정확한 객관을 끌어내기 위한 방편이다. 요즘 사회는 왜곡 되고 훼손 된 기사나 글들이 난무하다. 미국 전 부통령 엘고어는 이렇게 말했다. “뉴스는 50%만이 믿을만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사실이라고 믿어진다. 어떤 직함으로 어떤 상황에서 말했으며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진 자료인지에 따라 그 진실이 날조되거나 변질되기 때문에 논술뿐만 아니라 수필 역시 확언(確言)이나 확증 그리고 실화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권 작가는 이러한 관점에 충실한 수필가이다.
@ 디지털 기기의 개발로 대단절의 시대를 맞은 현실의 문제를 꿰뚫어 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무던히도 고민한 흔적이 읽힌다. 온갖 디지털 기기들을 조사하여 할머니세대의 육감능력과 비교하며 객관적인 자료와 확언으로 그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끝내는 자아의 주관으로 돌아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진심이 통하여 모두 행복한 통신세상을 꿈꾼다고 하였다. <육감이 하이테크로 살아나는 세상>
@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페, 블로그 등을 통하여 혹은 군중을 동원한 시위를 통하여 어떤 사안에 대하여 말들을 쏟아내는 세상이다. 정치권이 말하는 세몰이다. 언론플레이며 여론몰이 등등 끔찍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폭언이 울을 넘고 도를 넘어 시끄러운 세상이다. 권 수필가는 이런 현상을 동물들의 객관적인 현상을 증거로 사화참여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즉 덩달아 짖어대는 동네 개들의 상황을 소상하게 그려 내 뚜렷한 근거와 이유도 없이 무작정 시류에 동참하여 댓글을 달고 비방하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으로 몰아가는 작금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객관을 증거로 확실한 주관을 제시한 수필이라 하겠다. <개 짖는 시간>
@ “여성 수필가들의 글은 너무 내숭일색이어서 아예 읽지를 않는다.” 그 한 문장은 권 수필가로 하여금 ‘국가 전복죄나 저질러 볼까’ 하는 엄청난 생각을 갖도록 자극하고 말았다. 그럴 만도 하다. 그러한 편견에 대하여 논술문체를 차용한 수필 한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편견의 반향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예증하는 수작의 수필이다. 그 엄연한 예증으로 2001년 미국 부시대통령의 빈 라덴 제거를 위한 전쟁과 이슬람을 공격한 일화, 1959년 구동독의 노선을 비판했다가 국가 전복죄로 체포되어 악명 높은 바우첸 정보부 정치범, 감옥에서 7년 동안 옥살이한 독일 소설가 에리히뢰스트의 예라든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타이타닉> <쉰들러리스트> 혹은 황석영의 소설 <손님>, 헤세의 소설<수레바퀴 아래서>, 소설 <북회귀선>섬머 셋이 쓴 <인간의 굴레>, 1990년 백악관 앞 라페엣 공원에서 만난 ‘반핵 아줌마’ ‘콘셉션 피시노트’와 사진도 찍었던 실화를 예로 들어 체험적 사실을 토대로 쓴 글은 현실참여도가 높고 또한 신뢰도도 높다는 것을 강한 톤으로 지적하고 있다. 누구보다 체험적 사실주의와 현실참여의 글을 써왔던 권 수필가는 어느 평론가의 편견으로 오히려 자신을 다잡는 좋은 게기로 삼고 있다. “겉멋과 열등감과 제 잘난 멋으로 뭉쳐진 나는 초라함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일탈의 한 방법으로 에리히뢰스트처럼 국가전복죄나 저질러 볼까 한다.” 라고 수필 말미에 적고 있다. 그 외 대부분의 수필에서도 권 수필가는 例나 反例를 들어 자신의 글에 공감이나 공유의 흡수율을 높이고 있다. <국가 전복죄나 저질러 볼까> 중에서
객관은 긍정의 체적(體積)이 클수록 주관의 층위를 높일 수 있다.
권남희 수필가의 수필을 읽다보면 긍정의 체적을 느낀다. 자신의 주변이나 세상 이야기가 체험적 혹은 신뢰도 높은 객관적 자료들을 모아 긍정의 체적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영역에 전문 지식을 쌓는 것은 물론 통섭형 궤적을 확장하여 쓰는 수필가이고 보면 권 작가의 주관 또한 그 층위가 높다 하겠다. 아마도 지질시대부터 인간세(?)까지의 퇴적층을 한눈에 조명해 보는 듯하다. 필자는 길거리에 나부끼는 풍선인간 앞에서 오뚝 섰던 기억에 섬뜩해진다. 밀려오는 폭풍 저 너머를 바라보는 포만감을 주기도 한다. 비록 눈(眼) 속에 넣을 법 한 크기지만 빛으로 온 누리를 점유한 태양이거나 달을 연상케 한다. 수필로 세상을 향한 큰 그림을 그리려는 권남희 수필가의 수필은 그렇게 침투율과 흡수율이 높은 에센스나 영양크림이라 하겠다. 그만큼 작가의 글은 반향이 크다는 이야기다. 삶의 멀리를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긍정의 체적이 커서 개개인의 줏대를 세워 올곧게 사는 촉진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확언하고 싶다. 이는 곧 긍정의 체적이 클수록 주관의 층위를 높일 수 있음이 권 작가의 작품에서 읽힌다.
@ 마음으로 큰 사랑을 주면서 이웃들과 하나가 되는 일은 더 소중하다며 <나눔의 달인> 제목 하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 권남희 수필가. 아마 이번 수필 작품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이 ‘정 나눔’일 것이다. 디지털시대, 로그인시대,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제 예술의 주제를 ‘단절의 미학’ 에 집중되리라고 짐작 해 본다. 이에 쐐기를 치고자하는 작가라면 필자는 권남희 수필가를 손꼽는다. 나눔의 달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긍정의 체적을 높이는 방편 중의 하나가 바로 먹거리 아닐까 싶다. 금연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 담배 한가치는 말을 트고 길을 여는 데 손쉬운 나눔의 하나였다. 커피, 알사탕, 껌 뭐 이러한 것 역시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한 편의 수필은 탁한 영혼을 맑게 하는 큰 나눔이다. ‘정말 묘한 것이여,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 색깔도 없고 냄새도 안 나는 디 그것이 들면 화끈해지고 그것이 나가면 오싹해지고 그것이 붙으면 엿처럼 끈적이니…,’ 호남지방의 정타령을 그 예로 긍정의 체적을 늘려가고 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셸리 테일러의 저서 <보살핌>에서 발췌한 글 ‘태어나서 몇 년 동안 아이가 다른 사람과 따뜻하고 민감한 접촉을 갖지 못한다면 그 손실은 평생 동안 완전히 복구되지 못할 수 도 있다’ 는 문장을 그 예로 들었다. 그 외에도 마당 쓸이 이야기, 인정시계와 모금운동 이야기, 다이어트 이야기 등 나눔의 르네상스시대를 갈망하는 권 작가의 긍정의 체적은 넓고 크다. 띠라서 독자들의 주관의 층위를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내 운명이랑게> 수필에서는 먹거리 이야기 여섯 편이 나온다. ‘감자, 커피, 개고기, 닭백숙, 김밥과 햄버거, 양푼 비빔밥’ 이 상재 되었는데 어느 가정에서 고장으로, 고장에서 지역사회로, 세계로 확장하여 그 사례를 수집하여 분석하고 정리하여 식문화를 비판하거나 공유의 관점을 찾아 끝내는 나눔의 미학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한 폭의 그림이 아닌 수백의 화첩으로 확장 팽창하고 있는 권 수필가의 인생관 가치관을 담아내고 있다. 이 또한 긍정의 체적으로 주관의 층위를 높이는 예라 하겠다. 그 외 <끈>, <문턱>, <거시기 암호풀이 사건>의 세 수필에서도 사전이나, 영화 <황산벌> 나폴레옹 신체의 거시기, 어머니의 심부름 이야기, 명색이 엄마가 작가라는데… 등등 일상 중에서 벌어지는 실화를 토대로 엮어 가는 권 작가의 수필은 객관을 모아모아 긍정의 체적을 만들어 개개인에게 줏대를 갖고 반듯하게 살라고 채근해 댄다.
주관은 공감과 공유의 육화(肉化) 내지는 체화(體化)를 통하여 실존한다.
글은 무릇 침투율이나 흡수율이 높은 에센스나 영양 크림이어야 한다, 산소나 원기소라면 또 어떨까? 우리네 수필이나 시가 배앓이 꾀병에 어머니 손길이라면 필자도 얼른 옷섶을 걷어 올리고 눕겠다. 우리 사는 동안에 주관과 줏대는 아침나절에 햇살 내려오면 어둠의 그림자가 스르르 바닥으로 내려앉아 세상을 송두리째 내어 주려 마치 옷을 내리듯이 그렇게 안듯 모른 듯 물들고 탈색되며 다시 물들며 실존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게 되는 원초적 감각의 반응이라고 본다. 글 또한 마찬가지다. 일단은 달달해야한다. 공감이 가야 공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몸에 좋다’ 한 구절의 채근담으로 반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달면 단대로 쓰면 쓴 대로 체감온도는 우리네 일상을 좌우할 테니까.
권남희 작가의 수필을 읽다보면 고개 끄덕임이 잦다. 무릎을 치거나 국기에 경례를 하듯 가슴으로 손이 간다. 입에 옥침이 고이고 커피 향이 그리워진다. 울컥 읽던 책을 놓고 외진 길을 나서보기도 한다. 묵은 앨범을 꺼내 추억의 뒤안길로 은신하고도 싶어진다.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고도 싶은 충동에 2모작 3모작할 씨앗을 떠올려도 본다. 이는 곳 권 수필가의 객관이 필자의 주관으로 바뀌어 체화된 징후일 것이다. 권 수필가의 작품을 읽는 내내 그랬다. 생수를 입에 머금어 내면의 나 자신을 비워낸다. 필자의 퇴적층을 비워 권 작가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들여놓아도 본다.
@ ‘감자’ 로 20대주부의 일상을 풀어낸 사연은 곧 지구촌 인류의 이야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주관을 다시 객관으로 돌려놓는 개념의 확장인 것이다. 이것은 공감을 전제로 한다. 공감이 가야 공유할 수 있고 그것은 객관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희망’ 이거나 ‘아침’이라는 낱말 하나로 고난을 풀어가려 한다. 권 작가의 20대 시절, 섬기고 살아야하는 주부의 일상은 어쩌면 희망의 입맛에 간을 맞추며 살아내는 우리네 지구촌 사람들과 공유된 인생사가 아닐까 싶다. 누가 여성의 수필은 내숭일색이라 읽을 것이 없다고 했는가. 돈과 명예, 권력과 영화라는 낱말에 충성하며 실존하는 인물들 보다 가족을 위해 감자요리를 하는 주부의 손길은 얼마나 숭고한가.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며 감자 요리 준비를 하는 우리네 세상의 주부요, 큰 언니며 친정 엄니인 여성을 그려본다. 이만한 공감을 주는 수필도 드물 것 같다. ‘감자처럼 나의 20대는 일상의 땅속에 묻혀 잘 영글어 주었다.’ 고 수필을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잘 영글어 준 권 작가의 20대는 먼 훗날 지금 여기서 큰 그림을 그리며 큰 바위 얼굴로 우리 곁에 있다.
@ ‘그대를 처음 본 순간’ 그 뉘앙스가 늦가을 장미를 코앞에 들이 민다. 예술가의 집한 채, 시인 화가들이 드나들었던 장 콕토의 집, 헤르만 헤세의 스위스 멋진 성을 연상했던 젊은 날의 거시기. 사막의 여행길에서, 서른 시간정도 타고 가야하는 비행기에서, 몇 년의 무인도 생활자로 묶여진 그런 만남이고 싶은 안타까움 그것이 사랑의 거시기라고, 새의 깃털처럼 하늘하늘 사라지는 그 거시기를 상상하는 중년의 회상, 우리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고 확언하게 만드는 수필 여럿을 대면하게 된다. <사랑에 안식처를 삼지 말라>, <결혼 뒤에 오는 것들>, <너와 나의 뒷모습>, <간격으로 아름답고 슬픈>,
특히 <간격으로 아름답고 슬픈> 제목하의 글은 인생살이 참 아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남을 빌어 나를 보는 것만큼 어렴풋한 초상도 없을 것이다. K시인의 주관(편지)에 얼비친 스테파니아의 초상, 어쩌면 그만큼 객관인 사실도 없을 듯하다. K시인의 퇴적층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숙성된 스테파니아의 거시기, 매끄럽게 목을 휘감는 바람, 바람처럼 달콤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감촉의 바람, 생애 다시없을 그런 바람, 영원히 잊지 못할 바람,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누긋하고 흐뭇한 대상, 마음을 녹이며 감미롭게 목을 간질이는 대기(大氣),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미풍, 세상에 처음 태어난 오리새끼, 흔흔하고 아름다운 공기, 삶이 퍽 팍팍하고 스산할 때 마음 한 켠에 고였던 살가운 바람, 동네 콩나물 국밥 같은 흔한 음식,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유일한 여성, 아무런 걱정도 없이 마음의 무장을 풀고 행복해할 오로지 그 한 사람, 혼자 속을 태우며 밤잠 이루지 못하는 짝사랑의 상대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듯 K시인의 편지를 수필집에 그대로 올린 까닭을 알만도 하다. 영원히 먼발치에서 뿐인 그 한사람, 그 간격으로 아름답고 슬픈 관계와 관계 속의 대상일 거라는 주관이지만 철저히 객관으로 비쳐질만한 예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끈, 띠, 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끈> 중에서
참으로 그렇다. 우리네 사는 동안 상대를 다그쳐대는 일이 잦아졌다. 잠시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본론부터 말하란다. 꼭 짚어서 꼭지만 듣고 싶은, 진액만 끌꺽 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과 사물은 모두가 의도를 지니고 산다. 텍스트 속에 갇혀 제 값하고 살기를 원한다. 온갖 사람과 사물은 객관 보다는 주관이라는 퇴적층의 층리를 이루며 실존한다. 공격하고 간섭하다가 이내 지쳐 스스로 침잠하고 마는 주관의 퇴적층은 나날이 그 층위를 높여간다. 때문에 문자나 말로써는 공감을 얻어 동작으로 체화되기 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디지털시대요 로그인 시대임을 지적하고 싶다. 권남희 수필가의 작품 세계는 그렇게 정신적 삶의 탐험이요, 주관과 객관의 경계에서 무한한 자극과 반응을 반복하며 의식력(意識閾)을 확장해 가는 개척이며, 실증적 영혼과의 만남이라고 정리해 두고 싶다.
'권남희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헌정회 월간 헌정 1월호 권남희 에세이 (0) | 2013.01.13 |
---|---|
권남희 수필가 최근작품 (0) | 2013.01.13 |
한뎃솥이 있는 마당이 그리운 시간 (권남희 수필가) (0) | 2012.11.27 |
닭들은 아직도 ...한국산문 11월호 수록권남희 수필 (0) | 2012.11.03 |
30대의 얼굴이 우울하다 (0) | 2012.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