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권남희 수필가 최근작품

권남희 후정 2013. 1. 13. 09:47

국제펜클럽한국본부   PEN  1.2월호 수록 수필 작품

 

나는 누구의 의자가 되어주었던가

권남희 수필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아래 벤치에는 책을 읽는 청년조각상이 있다. 그 벤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사진을 찍으며 잠시 쉬었다 간다. 나도 젊은이와 같이 사진을 찍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언제 누군가에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의자가 되어주었던가.

 

도심거리에서 잠시 쉬더라도 앉을 곳을 찾아 헤맬 때가 있다. 모처럼 새 신발을 신은 날은 더욱 간절하게 앉을 곳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나타나지 않는 그것, 건물 사이사이, 골목길 어딘가, 빵집 앞, 버스 정류장을 봐도 마땅치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건물외벽이나 나무둥치에 기대어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서양인은 체질상 더러 휴식을 취할 때 서있다지만 앉아야 편안해지는 나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할 때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떠돈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제대로 된 의자하나 없는 거리가 인간이 살아가는 도시라니.......

사람 중심보다 세련된 이미지 생성을 위한 도시 중심이다보니 광장에서 간신히 찾아낸 의자는 노숙인을 쫓기라도 하듯 형태만 의자일 뿐, 그것들은 등받이가 없는 둥글고 기다란 쇠막대일 때도 있다. 차겁고 자꾸만 미끄러져 오래 버틸 수 없는 의자는 이미 본질을 벗어난 채 빨리 떠나라는 메시지만 전하고 있다. 찻집이나 식당 등 곳곳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며 쫓기듯 집에 돌아오면 지쳐버려 방바닥에 널브러진다. 앉아서 쉬기를 갈망하는 우리에게는 온돌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의 유전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우리들은 편안하게 휴식을 얻으려할 때 퍼질러 앉기를 원한다.

어느 날 종로 3가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처음 맞닥뜨린 풍경에 충격 받은 적이 있다. 백 수십명은 넘어보이는 노년기 남자들, 탑골공원에서 밀려난 그들이 지하 계단에 몰려있었다. 자부심보다 냉소와 자탄이 배어있는 얼굴에서 어디를 가든 제대로 앉아있을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읽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50세가 넘으면 존경받았다는데 더 이상 연륜을 내세울 수 없는 장수사회, 그들에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우리들 시선이지 않을까. 존재함으로 왜 아름다운 풍경이 되도록 존중해주지 않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앉을 수 있는 장소가 인간을 배려하기보다 제곱미터당 돈이 계산되는 논리에 쫓기다보니 공간을 쪼개 써야 하는 도시인들에게 장소는 진정성을 잃은 채 불편한 진실만 남게 된다. 도시공간은 불편한 의자에 앉아 돈많은 자를 욕하며 돈을 쫓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뉴욕의 타임스퀘어 광장에는 늘 진풍경이 벌어진다. 그곳에는 계단식의자가 있고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편하게 앉아 있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들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않고 그곳에서 서로가 풍경이 되어주며 앉아있다. 저녁이면 주변건물의 커다랗게 번쩍이는 전광판 광고들과 함께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인간들은 행복의 최대공약수로 도시공원같은 쉼터를 확보하려 애쓴다. 꽃이 피고 나무들이 자라는 공원은 우리들에게 그림일기를 쓰게 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자라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겨울을 나는 그 일을 해내는 동안 사람들은 공원에 앉아 상상력을 키워나간다. 그늘이 되며 바람을 막아주고 의자로 환생하여 만남을 이어주는 휴식공간은 인간에게 정신의 의자이다.

 

무주를 가 본 사람은 보았으리라.

그곳에는 무주사람들을 사랑하여 만들어놓은,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등나무 공설 운동장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 디자인한 등나무 의자길이다. 처음 무주군수의 등나무 벤치 아이디어로 심어두었던 수 백그루의 등나무는 수천 개의 플라스틱 의자와 따로 노는, 그냥 등나무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군민을 생각하는 ‘情’이 건축으로 얹혀지니 권위적이어서 외면당했던 군민 행사는 물론 사계절이 사랑 받는 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등나무가 줄기를 뻗으며 잘 자랄 수 있도록 철구조물 집을 지어주었던 아이디어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물하는 곳이 되었다. 봄이면 엄청난 보랏빛 등꽃과 향기로 사람들을 불러 앉히고 여름은 여름대로 관중석에 초록줄기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기에 가던 길을 돌아와 앉도록 하는 것이다. 가을 풍경은 어떤가! 떨어지는 잎 그대로 가을터널이 되어 작품 속에 동화되어 사람들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등나무벤치는 연륜이 더할수록 대단한 풍광을 연출하며 무주의 타임스퀘어 광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거나 버스를 기다릴 때 무심코 등나무 지붕을 한 벤치를 상상한다. 더운 여름 그늘을 만들어 주고 오월이면 꽃향기를 날리는 등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딜가도 만나는 벛꽃 길의 그 상투성에 지쳐 있을 때, 벌들이 날아다니는 탱자나무 가시울타리의 생뚱함처럼 인간성 넘치는 그 무엇들을 간절히 원한다.

학교를 오고가는 길이 포도나무 터널에 가다가 쉬어갈 수 있는 의자도 놓여있다면 아이들이 달라지지 않을까. 앵두나무 탄천변이라든가 복숭아나무 아래 의자가 놓여있는 따뜻한 풍경을 만들어주면 좋을 것이다.

걷기만 해도, 앉아만 있어도 함께 풍경이 되는, 그런 인간성 품은 의자.......

 

 

2010년 10월 뉴욕 타임스퀘어광장  밤 9시 권남희 수필가 촬영 

 

권남희 약력

(사)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등단.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MBC롯데 잠실점. 강남점 .관악점수필강의

작품집 『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 』『육감 &하이테크』『시간의 방 혼자남다』등 5권

stepany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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