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문학 2012년 겨울호 권남희 에세이 신작 발표 (에세이문학 회장 강철수)
에세이 문학 2012 겨울호
흰 새가 끄는 수레를 타다
권남희 수필가
‘한국의 아줌마는 다 없어져야 해.’
자리에 앉자마자 내 머리 위에서 낮게 뇌까리는 말이 들린다. 내 앞에 서 있는 남자고등학생 둘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나누는 대화다. 번개라도 맞은 듯 충격받은 나는 빛의 속도로 하늘까지 솟아버리고 싶었지만 얼굴만 붉힌 채 미소짓고 그들을 바라본다. 인생을 축제처럼 만끽해야하는 젊은 그들 앞에 나는 지팡이 짚은 겨울 나그네다. 나와 눈조차 마주치려하지 않는 그들은 속삭인다.
지난 번에 자리가 나서 앉을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줌마 한명이 나를 탁 치면서 밀더니 자리에
앉는 거야. 헐. 미안하다는 말도 없도 없어. 졸라 뻔뻔하고 재수없어. 질려. 아무리 학생이라고 너무 말못하는 애 취급에 무시하는 것 같아. 찌질 아줌마들은 없어져야 돼.
나는 좀 전의 내 행동을 슬로우비디오로 돌려본다. 퇴근 전철에서 나는 학생들 뒤에 서있는 채 매의 눈빛으로 호시탐탐 빈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얼마나 서있었을까 슬슬 피곤해지는 데 학생들 앞으로 두 자리가 났다. 몇 초는 기다렸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나는 분명 그들이 먼저 앉기를 기다려주었다고 생각했다. 앉을 기미가 보이지 앉자 학생을 밀치지도 않고, 탁 치지도 않고 가방부터 놓으면서 조금 우아하게 몸을 들이민 것같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자리가 나도 꼿꼿이 서있기를 즐기며 초연하던 내가 언제부턴가 10대들이 혐오하는 아줌마가 되어있다. 노년기의 나는 왜 앙투완 카론의 <겨울의 승리>그림에 나오는 ‘겨울’처럼 흰새들이 끄는 수레에 앉아 개선장군처럼 가지를 못할까.
빈자리를 향해 돌진하고 아주 태연하게 펑퍼짐한 차림으로 가족들 외식에 따라나서고. 식당에서는 주문한 음식이 오기 전 밑반찬부터 다 먹고 더 달라고 하는데 쾌활함이 지나쳐 거칠고 무례하다. 청각이 약해지니 큰 소리로 웃고 떠든다. 신들도 사랑한, 머리에 화관을 두른 봄 처녀의 자태는 흔적도 없다.
그래! 대한민국 정부도 인정한 아줌마다. 프랑스인도 발견한 제 4의 성, 한국에만 있는 아줌마다. 어쩔래. 너는 생전 아저씨 안 될 것같지? 네 엄마는 성처녀냐? 에밀 졸라야. 젊은이로 부활만 못한다 뿐이지 못하는 일 없는 게 아줌마다. 무식한 아줌마 소리 들어가면서 자식 키우고 돈 모으면서 집장만하고 국민소득 100불도 안 되는 나라에서 2만불 선진국 기틀에 아줌마가 반석처럼 깔려있다 모르겠냐.
그러나 생각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끝나고 만다. 갑자기 나는 책을 꺼내어 책읽는 아줌마로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징그럽기만 한 뱀이 된 채, 없어져 마땅한 벌레가 된 것을 알고도 끄떡없이 앉아있다.
혐오대상이 되어도 마땅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던졌던 부메랑을 그들에게서 돌려받고 있을 뿐이다. 승전한 장군처럼 그 붉은 당당함만으로도 지존이었던 이십대의 나는 아줌마들을 죽이고싶도록 혐오했기 때문이다. 교생실습을 나간 학교에서 너무 뻔뻔한 40대들의 인생에 실망하고 차마 그들을 죽일 수 없어 내가 죽기로 한 것이다. 언제까지 살고 언제 죽어야 아름다울 것인가. 40살이 되면 더 이상 구차하게 살지않고 인생을 마치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들의 양보를 모르는 욕심과 돈에 대한 집착과 에로스의 노골적인 몸짓에 환멸을 느끼며 차라리 내가 죽음으로써 그런 상황과 맞닥뜨리고 싶지않았기 때문이다. 40을 넘으면 판도라의 상자는 열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이를 먹는 일은 이상과 우아함은 그대로인 채 숫자만 더해지는 줄 알았다. 강물처럼 나이도 그렇게 변함없이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케를 던지고 화관을 벗은 순간부터 아줌마들은 세상물정에 밝은 촉수를 키워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사냥꾼이 되어야 하고 몇 개의 얼굴은 갖고 있어야 견딘다는 것을.
경멸하는 그런 모든 탐욕들이 내게 찾아들기 전에 죽기로 결심했던 나이도 지나고 나 역시 사냥꾼이 되어 도시를 헤맨다.
잘 익은 포도송이로, 숙성한 포도주로 남아야 하는 시간과 마주한 내가 있다.
도시에서의 일상은 늘 번잡하고 투쟁적이기만 하여 뜻하지 않게 내 스무살의 부메랑을 만나곤 한다.
승리자로 초연하게 나를 태우러 올 하얀 새가 이끄는 수레를 기다리면 될 일을.
권남희수필가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등단. 현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
수필집 『육감&하이테크』『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시간의 방 혼자 남다』등 5권
전화 : 011-412-4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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