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수산과학원 수록원고 (2013년 1월)
변산바닷가 2012년 11월
그 바다에는 아버지가 달리고 있다
권남희 수필가
바다를 보면 늘 아버지가 떠오른다.
바다는 아버지를 살게 한 기회의 벌판이었고 아버지의 인생을 자유 세계로 안내한 등대였다.
바다가 없었다면 아마 아버지의 삶도 전혀 다른 길로 가버려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다의 어떤 힘이 아버지에게 용기를 주었을까. 아버지는 바다로 달려가 닫힐 뻔했던 인생의 철문을 열었다.
또한 바다는,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버지가 힘들어 할 때마다 위로했다. 바다를 건너왔으니 이 땅에서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고.... 해상표류와 모험 끝에 행복을 찾은 오딧세우스처럼 아버지도 행복을 찾아야 했다.
11월 7일 격포 횟집에서 어부들이 건져올린 싱싱한 해물들을 먹으며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 날은 아버지가 목숨걸고 바다를 건너뛰어 남쪽으로 넘어온 날이었다. 격포 밤바다는 어둠을 타고 엄청난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두려움과 추위와 알 수 없는 공포가 파도속에서 끊임없이 출렁였다. 밤바다의 또 다른 얼굴이었지만 저 바다 어디에선가는 파도소리를 노래삼아 항해 하는 배들도 있지 않은가.
아침이 되니 파도가 밀려들던 그 바다는 조용하고 물이 들면 바다로 나가기를 기다리는 어구를 실은 배들만 묶여 있다. 그 대단했던 파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바닷가를 한참 달렸다. 나의 아버지도 이렇게 달렸을까.
황해도 해주 그곳에서 아버지는 부모형제와 아내. 딸까지 대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땅도 빼앗기고 어디론가 추방당할 위기가 닥치자 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기로에 섰을 때 ‘너라도 남쪽으로 가서 살라’는 가족들의 재촉이 이어지고 아버지는 위험한 육로보다 바다로 건너가기를 결심한 것이다.
11월의 바다는 초순이지만 추운 날씨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던 아버지는 무작정 남쪽을 향해 바닷가를 뛰었다. 맨발이었으니 발은 시려웠고 가슴은 얼마나 뛰었을까. 개펄에 살아움직이는 것들도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에 힘을 실어주었으리라. 붙잡히면 죽을 게 뻔한 상황에 밤새 바다를 뛰면서 아버지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슬픔까지 버리고 바다남자로 새로 태어나야 했다. 그동안 누렸던 행복을 뒤로 한 채 가족의 생사도 훗날로 기약하며 달렸던 밤바다의 파도소리는 더욱 가슴을 때렸을 것이다.
인생은 때로 사랑하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파도치는 바다로 뛰어들어야 할 때가 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극복하면 오히려 새로운 인생의 바다에는 펄펄 솟구치는 바다생선들로 인해 싱싱한 삶을 선물로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권남희 약력 (stepany1218@hanmail.net)
1987년 월간문학 수필당선. 現 (사)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덕성여대. MBC아카데미롯데 강남. 잠실 .관악 수필강의
수필집 『육감@하이테크』『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등 5권
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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