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한국동서문학 2015.겨울호 권남희 수필

권남희 후정 2015. 12. 13. 10:16

 

                               한국동서문학사 2015.겨울호 원고수록 발행인 이석래 (경남정보대학교수 퇴직)  편집장 정희경   

 

릴케의 눈(目)

권남희

시력이 나빠지면서 나는 일상생활에서 자꾸 실수를 하였다. 약간 거리가 있으면 사람을 잘 몰라본다든가, 비슷한 모양에 혼돈하여 물건을 잘못 사고 글씨는 물론 숫자는 더욱 틀렸다. 결정적으로 크게 실수를 한 일은, 어느 문학공모 심사 때였다. 점수집계를 맡은 내가 6과 8.... 5, 3 등을 잘못보고 등위를 정했다가 공모담당자로부터 다시 호출 받은 것이다. 최고상과 그 훨씬 아래 작품을 바꾸어 올렸는데 결과를 작성하던 담당자가 발견해냈다. 불려가서 불미스러운 오해를 받을 염려도 하면서 바로잡고 사인 하는데 그 아찔함에 자꾸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다. 그 일은 한동안 내게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생각날 때마다 내 자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 후 나는 시력검사를 하고 안경을 맞추었다. 가물가물하던 글씨와 사물들이 선명해지니 안개가 걷힌 듯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안경을 쓰지 않기 위해 버티고 고집부린 날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던 것일까. 눈(目)이 나빠지면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안경 쓴 여자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비춰질까 걱정하느라 안경쓰기를 거부하고 보이는 척 기를 썼던 것이다.

시력좋은 사람도 모든 일을 자기 기분대로 판단하면 어떤 일이든 제대로 볼 수가 없겠다. 남편이 어느 날 쑥 빠진 방문손잡이를 들고 화를 냈다. ‘딸아이가 자기에게 반항하는 표현으로 일부러 방문 손잡이를 잡아뺐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뱉었다. 쿵쾅쿵쾅 걸어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는 이유로 딸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억지였다. 진즉부터 헐거워진 채 덜렁거리고 있었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나또한 억측 속에서 광기로 으르렁거렸다.

‘ 힘든 일 있으면 떳떳하게 털어놓을 것이지 왜 자식 가지고 트집 잡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나‘ 나는 남편 앞에서 문손잡이가 얼마나 헐거워졌는지, 바람만 불어도 손잡이가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방문마다 다니며 흔들어 빼고 비틀었다. 그 후 손잡이를 모두 바꾼 수리비는 꽤 나갔을 것으로 안다.

자신의 주관적 기분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일은 충분히 위험하다.

안경을 맞춘 후 나는 자꾸 나를 돌아보았다. 글 속에서, 일상에서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겪었을 불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장미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릴케의 《프로방스 여행》을 읽다가 퍼뜩 깨닫는다.

보헤미안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린 릴케는 프로방스를 여행하다가 마음속에서 화가 세잔을 만나고 그를 통해 ‘그냥보기’를 극복하고 ‘보는 법’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세잔의 ‘보기’는 색을 넘어서는 색, 바라보면서 확실하게 수용하는 과정 등, 본질을 찾아내느라 고군분투한 흔적이었다. 대상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주제에 탐구하느라 생트 빅투아르 산을 30년에 걸쳐 다각도로 그린 세잔이었다. 그런 세잔 역시 자신을 소설작품 속에서 왜곡하여 묘사한 한 살 아래 에밀 졸라와 결별했다. 졸라와 세잔은 어렸을 때부터 절친이었다. 졸라는 그림을 그리고 세잔은 문학을 했지만 자라는 동안 서로에게서 어떤 점을 읽어냈던 것일까? 성인이 된 후 세잔은 그림을 그리고 졸라는 글을 썼다. 20대부터 작가로 유명세를 탄 졸라가 <작품> 소설에서 주인공 클로드 랑티에를 실패한 화가로 묘사하고 결국 목을 매 자살하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초판이 나왔을 때 졸라는 세잔에게 보냈지만 세잔은 ‘실패한 화가 클로드 랑티에’ 가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절교편지를 보냈다. 졸라가 자신의 운명과 의지와 너무나 왜곡된 이미지를 나타낸 것에 화를 낸 세잔은 죽을 때까지 ‘모든 글 나부랭이‘와 거리를 두었다.

이렇듯 치열한 화가로서의 세잔이야기를 아내 클라라 릴케에게 편지로 썼던 릴케는 프로방스 여행 내내 ‘보는 법’을 연습하면서 시적 자기 성찰을 심화시킨 계기를 삼을 수 있었다.

세잔의 그림에서 세잔의 진가를 찾아낸 릴케의 안목은 대단하다.

자칫 나의 글쓰기가 달리는 말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다 왜곡의 늪으로 빠질 때 나 역시

‘릴케의 눈’을 빌려 ‘보는 법’을 훈련할 수 밖에.

* 릴케 관련 내용은 《릴케의 프로방스 여행》-문학판출판- 참고하였습니다.

권남희

1987년 <월간문학>수필 당선. 현재 (사)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한국문협평생교육원 .MBC아카데미 수필강의 . 작품집 《육감&하이테크》《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 》등 6권. 한국수필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 이메일: stepany12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