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2

월간 한국수필 4월호 -

권남희 후정 2008. 5. 3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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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수필 4월호   발행인 유혜자 . 편집주간 권남희

한국수필 4월호 월평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서 불러낼 때

                                               

  

                                               변 해 명

  시인 지망생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1883-1966)는 자신의 습작시들과 함께 자신의 시를 읽어주기를 바라는 한 통의 편지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7)에게 보낸다. 그 편지를 시작으로 릴케에게서 5년에 걸쳐  10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를 릴케의 사후 카푸스가 묶어 책으로 낸 것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다.

 릴케가 보낸 10통의 편지 중 1903년 2월 17일 파리에서 보낸 첫 번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말이 들어있다. 글을 쓰려는 자신의 진지한 고뇌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작가 정신을 묻는 대목이다. ‘당신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써 불러낼 만큼 아직 당신이 충분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라고 한 대목도 있다. 작가이기를 자부하기보다 어떻게 말로써 자신의 세계를 들어내는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수필> 4월호를 읽으면서, 수필을 쓰는 모두는,  ‘수필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최선을 다해서 쓴 작품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작가가 글을 쓸 때 어느 작품 하나 소홀하게 쓴 것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잘 쓴 글이지만 ‘당신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써 불러낼 만큼 아직 충분하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가지게 한다. 

 정성을 다해서 장인의 솜씨를 발휘하면서 돗자리를 짰지만 그 돗자리에는 작가의 목소리를 담아낼 무늬가 없다면 그저 실용적인 물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돗자리 위에 저마다의 무늬가 담겼다면 그 돗자리들은 실용의 돗자리를 넘어 작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인데 그런 무늬가 담기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무늬가 담기는 것, 그것은 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수필쓰기는 체험의 사진찍기가 아니라 체험의 그림그리기다.

 사진찍기와 그림그리기는 사뭇 다르다. 사진은 그 안에 담긴 소재 하나하나가 그 생명력을 지니나 그림에 담기는 소재는 그 작가를 들어내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한 것이다. 고호가 ‘해바라기’를 그렸다고 해서 실제 해바라기를 그린 것이 아니고, 고호 자신을 들어내기 위한 고호만의 세상 내다보기의 창窓인 것이다. 그러니 실제 해바라기는 고호의 그림 속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상위에 커피 잔과 책, 노트, 먹다 남은 과자, 연필, 돋보기, 휴대폰, 펼쳐진 수첩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음을 쓰고 있다면 독자는 정돈되지 않은 책상 위가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독자들에게 그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동원한 자료(언어)가 펜, 연필, 커피 잔, 휴대폰 등이다. ‘어수선하다’라는 이미지 구축을 위한 동원된 자료는 그 물체 본래의 언어적 의미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그것이 사진 찍기와 그림그리기의 차이인 것이다. 

‘어머니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해 마음고생 시켜드린 것이 두고두고 후회로움으로 다가온다.’ 라는 문장을  ‘어머니의 눈물은 강이 되어 내 가슴에 흘러든다’ 라고 표현한다면 ‘눈물’이나 ‘강’은 본래의 의미는 이미 상실된 것이다. 그런 표현은 일상적인 체험의 의미를 더 많은 정서를 내포한 함축적인 의미로 더 큰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고.

 죽을 힘을 다해 체험의 이야기만을 충실하게 기록한다고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재는 글을 만들기 위한 자료일 뿐인데, 작품을 쓴다고 작가가 된 사람들이 소재인 사실에 묶여 그 자료를 그대로 작품으로 착각하고 매달려 있음을 보게 될 때 무늬 없이 짠 돗자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정진철의 <눈감은 노인들>, 조홍제의 <5대 사진상봉>, 최병영시의 <멸치의 군무>는 어느 정도 자신의 무늬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으로 다시 읽기를 권하고 싶다.   

 정진철의 <눈감은 노인들>은 마음의 풍경을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엮어내고 있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지나가는데도 이제나 저제나 두 노인 중에 아무한테서라도 무슨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두 노인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건지 휴식을 취하는 건지 두 노인이 똑같이 눈을 감고 있었다. 매표소를 빠져나오면서 문득 두 노인의 독백하는 모습이 머리에 스친다.

                        <눈감은 노인들> 중에서


 그가 스스로 얻은 답은 두 노인이 서로에게 던지는 “당신도 세상 살만큼 살았구려”다.

 전철 노인석에 앉은 두 노인이 서로 자신보다 젊다고 생각하고 바라보지만 의외로 자신보다 두 살이나 위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는 눈을 감아버리는 현장에서 필자는 그들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지만 끝내 눈을 감고 서로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두 노인의 마음을 필자는 헤아려본다.

 두 노인의 마음의 풍경을 통해서 자신의 느낌(터득)을 그들의 말로 담아내어 보는 것이다.

 그곳에는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작용할 수 있고 그 상상력에 의해 작가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들어나게 된다.

 필자는 그 상상력의 위력을 글 속에 잘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조홍제의 <5대 사진 상봉>은 가족이란 개념을 확장시키고, 오늘날 핵가족만을 생각하게 하는 잘못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손자 돌 때 찍은 가족사진을 이 세상에 안 계신 부모님 사진과 조부모님 환갑 때 찍은 낡은 사진을 삼각형 형태로 세워놓고 필자는 가족의 모습 앞에 감격한다. 5대의 중간에 있는 필자는 손자와 당신의 할아버지 대를 잇는 다리라는 역할자로 자처한다. 자신을 통해 가족의 미래를 내다보고 설계하는 그의 한국 전통적인 가치관이 유감없이 들어나고 있어 독자도 자신의 미래의 가족사를 더듬어 보게 한다.


손자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쯤 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내가 살아온 발자취를 들려주려 한다. 손자가 가정을 갖는 날 사진첩에, 돌 때 찍은 이 사진이 꽂혀 있겠지. 먼 훗날 손자가 내 나이쯤 되어 직장 일선에서 은퇴한 후 찾아오는 손자들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제 할아버지인 나에 대해서도 얘기해 줄까? 그러면 얼굴도 모르고 고조할아버지인 나의 사진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볼 올망졸망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런 분위기에서 살아갈 행복한 손자의 가정을 그리면서 앞에 있는 사진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5대 사진 상 봉> 중에서


 최병영씨의 <멸치의 군무>는 서둘러 글을 맺은 성급함이 엿보이나 살아남기의 몸부림을 춤으로 형상화한 점이 돋보이고, <처절한 춤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춤>으로 표현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멸치의 군무는 먹이사슬 체계의 하위에 위치한 피식자가 추어야 하는 <지독히도 서러운 춤>이다. 그런 멸치떼를 향해 갈치가 <수많은 칼들이 하얗게 날을 세우고 >멸치를 공격하지만 갈치도 강적 앞에서는 한낮 먹이에 불과하다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어부가 멸치의 이동 길목에다 그물을 친다. 조류를 따라 이동하던 멸치 떼가 그물코마다 박힌다. 자유가 속박된 하얀 몸을 뒤척이며 바동거린다. 그물망을 떨쳐내기에 멸치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다. 


강한 자든 약한 자든 결국은 더 강한 자의 희생물에 불과하다. 바다 속 비정한 생존현장이 인간들의 삶의 현장에 못지않다.

 어느 생물체나 생명은 소중하다. 그리고 소중한 만큼 이를 온전히 지켜내기도 어렵다 그러기에 멸치는 오늘도 바다에서 무리지어 생존을 위한 춤을 춘다. 그 춤사위는 처절하고 비장하기에 더욱 아름답다.

                                          <멸치의 군무> 중에서


 이 글은 생명을 지닌 것들의 보편적인 진실인 양육강식을 멸치라는 작은 물고기를 놓고 그리고 있다. 그리고 가장 상위 체계에 있는 인간들의 생존경쟁도 넌지시 들어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미 작품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재설명하는 형식으로 드러나 글의 긴장을 늦춘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신선하고 감각적인 표현이 개성적이고 맛깔스런 문체를 이끌어내어 독자들에게 진부한 소재도 참신한 글로 살아 숨 쉬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