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2

월간 한국수필 7월호 (권대근교수의 월평도 함께)

권남희 후정 2008. 7. 27. 15:13
 

 권남희 수필가(한국수필편집주간 정리)

(2008. 7월호)

 


삶의 발견, 삶의 표현

              권대근(문학박사.문학평론가. 국제문화대학원 대학교 교수)                                           


  수필은 삶의 발견이며, 수필창작은 생의 발견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있다면, 수필은 곧 삶이다. ‘적자 생존’이란 ‘글을 쓰라, 그러면  생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수필가는 각자 자기의 개성적인 언어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뜨겁게 사는 사람은 뜨겁게, 아름답게 사는 사람은 아름답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붓 가는 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문학으로서의 수필이다. 문학이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성찰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가치 있는 인생의 체험을 문학 작품으로 표현할 때, 형상성, 참신성, 함축성, 탄력성과 같은 속성을 갖추도록 해서 손맛을 우려내야 한다. 1930년 후반 이후 대표작의 문학성을 짚어보고자 기획한 <한국수필> 7월호의 연재 김우종 교수의 한국현대수필 평설은 현대수필의 흐름을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유익한 시도였다. 뿐만 아니라 지상강좌 시리즈 장호병의 ‘붓 가는 대로 쓰다’ 역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에 대한 역설을 통해 수필의 문학성에 대해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어 수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글이다. 7월호에 실린 글 중에서도 손맛이 우러나는 작품은 김학, 방원석, 오세윤, 이규백, 박영자, 송미정 등의 수필이었다. 이번 월평에서는 아쉽지만 김학, 박영자의 두 작품에 대해 집중 조명하는 선에서 월평을 마무리하겠다.  

 

II.

 


  김학의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는 ‘테마에세이/ 여름, 스케치’에서 뽑은 작품이다. 이 수필은 미적 구조로서 수필이 갖추어야 할 형상성은 물론 인식구조로서 수필이 가져야 할 교훈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용된 말도 구체적일뿐더러 말하고자하는 바를 형상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 모습이 분명해서 좋다. 어떤 분은 문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설명의 기법을 쓰지만 이 분은 '형상화'의 의미를 시각화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표현 의도를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서두 첫 단락에서 수필에 있어서 형상화란 '염천의 개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앞 집 옥상의 빨래가 갑자기 무녀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이기 시작한다. 찌는 듯하던 여름밤의 무더위가 슬그머니 뒷문을 박차고 꽁무니를 뺀다. 혁명군인 양 치달아온 바람이 고요한 누리에 파문을 일군다. 뜨락의 나무들은 바람의 위세에 눌려 저마다 아부의 깃발을 흔든다'고 표현함으로써 눈앞에 그것의 개념이 그림으로 그려지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끝까지 읽어보지 않아도 수필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하는 발단부의 묘사적 문장이 주는 손맛이 일품이다. 수필 언어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의 네 가지 속성을 고루 갖춘 멋진 표현이다.

  발단부 둘째 문단의 문장들도 질서 정연할뿐더러 대단히 조직적이다. 백목련은 무당춤을 추고, 대나무는 승무를, 백합은 어깨춤을, 그리고 대추나무 등은 디스코를 춘다는 진술이 절묘하다. 백목련이 무당춤을 추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키가 크기 때문이고,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나긋나긋한 승무를 추는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분기에 발을 담궜기 때문이다. 백합이 사근사근 어깨춤을 추는 이유는 수줍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추나무, 은행나무, 모과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등은 왜 하필 디스코를 출까. 대추나무 등이 디스코를 치는 이유는 문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 줄 한 줄의 문장에 적확한 수식과 생략이 절묘하게 계산된 문장을 음미하면 미소가 번져온다. 생략과 압축의 묘미로 수필 문장의 맛을 잘 살린 탓에 어느덧 작가의 집에 있는 손바닥만한 뜨락은 각종 화목들의 무도장이 되고 만다. 여기서 이 정도의 묘사로 끝냈다면 결코 찬사를 받을 리 만무하다. 작가는 바람의 강약에 따라 나무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데 착안하여, 화목들이 바람에 놀아난다고 적고 있다. 그 춤은 바람이 한눈을 팔 땐, ‘몸놀림’이 되고, 바람이 눈을 부릅뜨면 ‘춤동작’이 된다는 대칭적 표현도 매우 섬세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라 그 맛이 솔솔하다. 마지막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춤은 작가에게 ‘작태’로 인식된다. 어휘 하나하나가 한 번도 허술하게 쓰인 적이 없다.   

  작가는 민초들의 슬픈 역사를 주제의식에 담기 위해 발단부에 주제에 대한 수준 높은 암시와 함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바람과 나무는 상징이다. 바람이 권력자요, 실권자라면, 나무는 권력자의 기호에 따라 몰려다니는 무소신의 기회주의자들 또는 힘없는 민초의 모습이다. 작가는 발단부에 암시된 주제의 상상화를 단 하나의 삽화를 전개부 상단에 배치함으로써, 긴장된 독자의 시선과 가슴을 녹여준다. 일반화에서 예시로 이어가는 문단의 연결성, 제재에 주제의식을 담아 풀어내는 솜씨가 단연 돋보인다. 전개부 하단은 또 다른 권력자의 상징으로 비를 조명하였다. 바람이 나무를 춤추게 하였다면, 비는 나무를 연주하게 한다. 빗방울의 강약에 따라 관현악이 되고, 생음악이 되고, 경음악이 되고, 그러다가 절정에 가서야 빗소리는 ‘총탄이 작렬하는 전쟁터의 소음’으로 작가에게 인식된다. 결국 바람과 비는 권력자요, 실권자의 상징으로서 작태와 소음의 주인이 된다. ‘바람과 빗방울이 철수하면서 뜨락에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오르고 있다’는 표현과 그럼으로써 ‘나무들은 원래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결말부에 제시된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다. 바람과 비로 연상되는 번개, 천둥, 두려움, 총탄, 전쟁터, 실권자는 그들의 철수로 평화, 자유의 개념에 도달하는 언어들의 연상 작용으로, 독자들은 힘 있는 자들에게 우롱당해 온 민초들의 슬픈 역사를 작가와 함께 읽을 수 있게 되는 영광을 얻는다.

  구성면에서, 표현력 면에서, 인식의 측면에서도 이 작품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같은 내용이면 한 단락으로 묶어야 하며, 모든 문장은 완결성을 확보하야 하는 게 글의 원리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발단부 셋째 단락을 두 번째 단락에 이어 쓰지 않고 별도 단락으로 처리하여 문단의 완결성을 놓친 것과, 강조를 위해 전개부를 처음 여는 단락을 한 문장으로 해서 독립문단으로 처리한 것이라 하겠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개부는 전환의 의미가 아니고서는 특수단락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문장론의 기본이다. 문장비평의 관점에서 두 가지 ‘옥의 티’가 발견되었지만, 이 작품의 허점은 작품의 성공도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불어버리면 깨끗해질 정도로 미약한 것이란 말이다. 이런 수필을 자주 접할 수 있다면 월평을 쓰는 재미가 한 맛 더 있을 것 같다. “좋은 수필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을 바르게 읽어야 한다. 세상과 교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교감은 평소 작가의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생활의 성찰에서 온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장호병의 말은 수필가가 가져야 할 자세로서, 적절한 것이다. 연륜이 더 할수록 김학의 글에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은 삶의 깊은 사유와 성찰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문학인이 생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이제 수필가들이 생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 평자는 ‘생태’ 문제가 절실한 이 시기에 월간 <한국수필>이 생태수필을 기획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지역적인 환경파괴 및 오염에서부터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파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 뒤늦게나마 생태학과 경제학 간의 대화 분위기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다행하다 하겠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수필계가 관심을 보태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박영자의 <직선과 곡선>은 에코수필에 소개된 작품이다. 생태가 강조되는 개발시대에 박영자가 ‘직선과 곡선’이란 서로 대비되는 제재로 생태 환경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벌써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비교와 대조의 기법은 언제나 수필에서 강한 설득의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직선으로 상징되는 도시화와 개발 그리고 곡선으로 상징되는 생태 환경과 보존을 대칭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문명 비판적인 시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데서 이 작품은 흥미를 더해주고, 나아가 생태 환경의 중요한 의미를 새롭게 해준다. 또한 위 수필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말하는 수필로서 작가는 자연을 고향의식으로 수용하는 성숙한 의식을 들어 내보인다. 한 가지 사물을 사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보여 주는 정취 속에서 자연의 외경을 느끼며, 자연이 신의 섭리를 따르고 있음을 파악하고 자연 순응적 삶을 추구 하려는 사상이 녹아 있어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고, 또 인간이 돌아가야 할 최후의 안식처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자연관을 보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연륜과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인간이 고향을 망가뜨리는 일이 있을 수 없듯이 인간의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환경보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글이라 하겠다.

  이 작가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 자연의 관점으로 ‘삶의 터전’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수필은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그 위상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태 테마 설정을 계기로 해서 생태문학의 카테고리 속에서 박영자 수필가의 관심이 곡선을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의 수필을 읽으면, 원시적 생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골 농촌이 주는 청신한 맛이 그대로 느껴져서 좋다. 이 수필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생태’를 지향하면서 ‘비문명적인 모습’에 관심을 놓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산업화 이후 환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생태의식이 현실 참여에 소극적인 수필가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 우선 고무적이다.

  환경문제를 다룬 시들은 대부분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서, 대부분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자연 속으로 침잠하여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전통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면, 박영자의 에코수필은 자연을 노래하되 파괴된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상이점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물론 자연의 변화에 기인한다. 어디에고 순수한 자연은 남아 있지 않고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가 파괴된 자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수필은 자연히 현실을 비판하는 문명 비판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영자는 비문명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재료들을 열거하는데, 이를테면 “네모, 세모, 사다리꼴, 반원 모양의 논밭들이 불규칙한 속에서 어떤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는 진술이다. 이는 제재를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멋을 우려낸 부분이다. 수필에서의 함축이란 그 언어를 통해 연상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작가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만난 어느 할아버지의 말, ”이 동네 사람들 보상금이 많이 나와서 몇 억은 돈으로도 안 알아요“는 개발 이익으로 멍들어가는 인간의 마음을 아주 적확하게 파악해서 감동의 울림을 느끼게 한 것으로, 매우 적절한 대화체의 인용이다.  

  자연 친화를 통해 환경보호를 주장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작가의 시야가 밖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삭막한 콘크리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의 마음 속에는 떠나고자하는 심리와 함께 자연에 대한 동경이 싹트게 마련인 것이다. 더욱이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가족의 여가 생활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많은 도시인에게 이웃과 같이 자연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자리 매김되는 것이 상례다. 자연과 멀어져 있는 생활공간은 자연스럽게 작가를 자연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소품들은 어쩌면 남편과 자식이 빠져 나간 사이의 시공의 공백을 메워주는 매개로 안성맞춤이기에 박영자는 외출의 결과로 얻은 자연과의 교감을 곡선을 소재로 해서 수필화했다고 볼 수 있다. 건설과 개발, 주거 안정과 생활의 편리라는 미명 하에 잘리고 파헤쳐지고 있는 산허리의 아우성을 듣고 자연을 보호하자며 머리띠를 메고 투쟁하는 주민들과 공사를 강행하려는 건설업자들의 실랑이를 신문이나 TV에서 자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작가는 수필 속에 작가의식을 심으려고 자연의 파괴문제를 터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정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여성수필에 대한 비판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 작품은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김학, 박영자 두 분 수필가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는 까닭으로 다른 네 분의 작품을 선해 놓고도 충분히 조명해보지 못했다. 방원석은 <짝사랑>은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에 대한 참신한 해석을 상대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애정을 주는 ’원사이드 러브‘에 견주어 쓴 좋은 작품이고, 오세윤의 <겨울나무> 역시 신체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허기 평심‘의 담담한 자세로 살아가는 친구를 빈 하늘을 향해 마른 가지를 뻗고 선 한 그루 겨울 ’느티나무‘에 비유한 수작이었다. 이규백의 <불꽃같은 삶의 여인> 또한 시대와의 타협이 불가능해서 세 가지 운명으로 괴로워했다는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비극적 삶을 연극 감상문의 형식에 담아 잘 형상화해서 감동을 준다. 문파문학회 소속의 송미정의 수필 <부끄러운 손>은 큰 울림이나 손맛은 없지만, 연륜의 무게에 눌러 청각기능이 떨어진 강아지의 모습을 보고, 그 체험을 성찰로 이끌어 자기반성으로 승화시켜낸 서정성이 빛나는 작품이다. 이 네 작품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점, 이 작품을 쓴 작가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III.


  수필에서는 시나 소설에서처럼 특별한 기교를 요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창작상 표현을 위한 무기교의 기교가 필요하다. 음식을 만드는 경우에도 요리사의 솜씨가 없이는 요리가 제대로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필창작에도 기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필문장은 설명되기보다는 표현되어야 한다. ‘꽃은 아름답다’와 ‘꽃이 아름답다’는 진술은 조사의 차이로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듯이, 문학에서 표현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자가 전달성에 목적을 둔 설명이라면, 후자는 표현에 목적을 둔 묘사다. 수필다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설명보다도 묘사에 충실해야 문학성이라든지 예술성이 산다는 말이다.

  수필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수필은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져야 할 글이다. 그것이 문학적 방식인가 아닌가는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처럼 추상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구체적 형상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표현인가 하는 점에 따라 구분된다. 옛날의 선인들은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으며, 수필적인 방식을 통해 선비 정신을 길렀다. 오늘의 우리 수필가들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감동과 반성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여 자기 발전의 초석으로 삼아야겠다. 유경환은 철학을 만나는 삶이 수필을 쓰는 사람의 삶이어야 한다고 했다. 철학은 회의로부터 출발한다.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서 어찌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의 수필을 쓰겠는가.


  약력 - 예전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