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2

월간 한국수필 6월호( 유한근 교수 일본 세미나 수록 )

권남희 후정 2008. 5. 31. 21:59

 

  발행인 유헤자. 편집주간 권남희 .출판 선우미디어

*심포지엄 주제발표문


문화재와 수필


유 한 근 / 문학평론가 ·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문화재는 선인들의 슬기에 의하여 창조된 문화가치적 사물(事物)로서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인류 공영을 위하여 길이 보존해야 할 인류 전체의 재산인 동시에 문화유산을 일컫는 말입니다. 특정한 민족의 유산이 세계 인류 공영의 문화재가 됨은 물론입니다.

 문화재를 유형에 따른 분류하면, 일반적으로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1)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2) 민속자료,3) 기념물4)로 나누고, 정부의 지정여부에 따른 분류하면, 지정문화재5)와 비지정문화재6)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7) 보물,8) 명승사적,9) 천연기념물,10)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등이 있으며, 비지정문화재는 일반동산문화재11)와 매장문화재12)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이 문화재는 수필의 소재만큼이나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그 종류도 많고 범위나 영역이 방대합니다. 이에 따라 문화재를 소재나 제재로 차용하여 쓰여진 기존의 한국수필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수필가의 소재 선택의 취향 또한 문화재를 선호한다는 점도 구체적인 수필을 들어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해질 것입니다.

 문화재를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소재나 제재로 해서 쓰여 지는 글은 문화유적 기행 및 탐방 수필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널려 있는 유물 혹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민속적 가치나 보관 가치가 있는 물건 즉 유품들에 관한 수필도 많을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우리는 본격적인 수필이 아닌 문화재와 관련된 글들을 쉽게 정기간행물이나 웹진, 그리고 간행본을 통해서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여러 발굴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우리와 매우 대조적인 현상을 몇 가지 발견하였    다. 우선 우리와 같이 거창한 지도위원회의를 하지 않는다. 주민을 상대로 하는 현장설명회를 여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한 가지는 현장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일반인을 위한 현장 공개와 설명회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고 있지만   아직도 익숙한 풍경은 몇 분의 지도위원과 발굴 관계자가 현황판을 주시하거나 유구를 바라보는 한   적한 풍경이다.

  일본에서는 발굴현장에 일반인들, 특히 노년층이 많이 찾아온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귀국하기 직전인 2007년 2월의 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발굴   현장을 보겠다고 늘어선 줄이 말 그대로 장사진이었다. 현장 책임자는 한번에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인원을 나누어 하루 종일 목이 쉬어라 같은 내용을 반복하였을 것이다. (...)

  아마카시노오카는 아스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구릉으로 현재는 국영아스카역사공원 아마카시   노오카지구로 정비되어 있다. 아스카에 갈 때 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도시락을 먹던 곳이다. 이 구   릉의 동쪽 자락에 위치하는 약 6000㎡의 골짜기에서 7세기 중엽의 소토층과 탄화된 목재, 불탄 흙벽   등의 건물, 7세기대의 건물지와 대규모의 정지면(整地面)이 확인되었다.13)


위의 글은 김낙중의 ‘문화유산이야기’ <일본의 한 7세기 유적에 몰린 노인들>로 나라의 발굴 현장설명회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5000명이나 넘게 노인이 몰린 이유를 쓴 글입니다. 일본인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문화재 발굴 현장을 기록한 이 글은 본격 문학작품인 수필을 쓰려한 글이 아닙니다. 자신의 외적·내적 체험을 주관정신으로 감동을 전달하기 위한 수필, 즉 기행 수필이나 문화재 수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축제가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강릉사람들은 ‘단오’를 독특한 문화로 승화시켜 경건하   게 치러내고 있다. 강릉의 단오 행사는 단순 놀이와 연희뿐 아니라 축제의 전형인 제의성을 보여준   다는 측면에서 단오제端午祭라고 불린다. 타 지역의 단오 행사와 비교해 독특한 개성과 전통계승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이 강릉단오제(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가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에 선정된 이유이기도 하   다.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이란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소멸위기에 처해있는 문화   유산의 보존과 재생을 위한 시급한 대책으로 유네스코위원회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다. 강릉   단오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 축제로 인정받아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다시 말해서 강릉단오제는 이제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축제의 원형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강릉단오제는 이야기가 있는 축제로 구성되어 있다. 제례를 올리는 대상이 대관령산신, 대관령국사   성황신, 대관령국사여성황신으로 강릉지역의 신화로 연결되고, 대관령과 연계된 고을의 안녕과 풍농   ㆍ풍어ㆍ풍림을 중심으로 주민의 건강과 질병, 안정 등 사회경제적 번영을 기원한다.14)


 위의 글은 사단법인 강릉단오제위원회 사무차장인 이경화의 <천년의 어울림 천년의 축제, 강릉단오제> 서두부분입니다.


  중국의 경덕진 자기는 이미 16세기부터 유럽인들에게 고급자기로 인식되었다. 일본의 아리타 도자   기 역시 17세기부터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일본 취미 열풍(Japonism)”으로 이어지면   서 일본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우수한 도자문화를 가졌다고 자부하   지만, 그 실체는 세계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거창하게 세계까지 나가지 않아도, 도자기는 우리나   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 등과 같은 고유명사 정도가 맴돌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도자기 자체가 진정한 흥미나 감상의 대   상이 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무관심에서 오는 낯설음의 단계를 벗어나야 한국 도자   기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도자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이 도자문화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15)


 위의 글은 문화재청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최윤정의 ‘문화재 칼럼’ <도자기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이란 글입니다. 이 글의 성격을 사이트에서는 칼럼이라 명시하고 있지요. 중국이나 일본의 자기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 도자기의 우수성을 왜 세계인은 알지 못하는가를 환기하며, 우리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국도자문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편의상 칼럼이라 명시했을 것입니다. 칼럼은 분명 목적의식이 뚜렷한 대(對)사회적인 글이지, 문학의 한 장르인 수필과는 다릅니다.  수필과 칼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문학적인 감동이 있는가,  없는가 혹은 감동전언을 전제해서 쓰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문화재를 글감으로 해서 쓴 칼럼입니다.


  10월은 이사를 하느라고 너무 바쁘게 지나갔다. 오랜만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과 눈이 마주   쳤다. 가을이 코앞에 왔음을 실감하고 말았다. 오늘은 작고 소박한 시골역사와 연천역 급수탑을 찾아   가을 여행을 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어젯밤 잠이 들었었다.

  “여보 빨리 준비해”

  “날씨가 너무 좋다”

  카메라를 챙기며 남편이 서두르기 시작한다. 문화재를 찾아 떠나는 길은 항상 신이 나는 모양이다.   그런 남편을 어느 때 부턴가 나도 똑같이 닮아 가고 있었다.

  “급수탑이 뭔데?”

  “말 그대로 물을 공급하는 곳인 거 같은데 옛날에는 엄청 큰 역으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나 봐,   식수로 사용하던 곳인가?”

  아니었다. 기차에 물을 공급하는 곳으로 당시에는 물을 이용한 증기기관차가 흰 연기를 품고 커다   란 기적소리를 내며 역사를 드나들던 기억은 까맣게 잊은 채 황당한 말을 했던 얼마 전의 나를 떠올   리며 웃음이 나오기도 하였다.16)


 위의 글은 2007 근대문화유산 답사기공모전 입선 수상작인 권영숙의 <소박한 시골역과 연천역 급수탑>이라는 제목의 산문입니다. 공모전에 투고한 근대문화유산인 등록문화재 연천역의 급수탑에 대한 주부의 글이지요. 미셀러니 혹은 여행기, 또는 탐사기행문 형식을 취하고 있는 평범한 글입니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수필에는 못 미치는 글입니다. 하지만 문화재를 소재로 해서 쓴 글인 것은 분명합니다.


  고목나무들이 기나긴 세월을 버텨오기 위해서는 우선 태풍을 비롯한 자연의 재해를 이겨내야 하며,   이어서 사람들에게 베이지 않아야 했다. 당산목으로 마을의 신앙대상으로서 살아남는 나무들도 있었   지만, 많은 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을 수장들은 고목나무들을 지켜내기 위해 ‘동티난다’, ‘베다 죽었   다’, ‘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퍼트려 나무들을 지켜내고자 했다.

  동티의 대표는 전남기념물 제175호 무안 석용리 곰솔이다. 직설적으로 동티가 어떻게 나는지를 입   간판에다 적어 놓았다.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쟁기용으로 쓰기 위해 나뭇가지를 베었다가 국부에 종   기가 나서 3년간 고생하다 죽었다.’는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293호 상주 상현리 반송은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해,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갈 엄두   도 못 냈다. 벼락이라도 치는 날이면 이무기의 우렁찬 소리가 나무속에서 들려오는 듯하여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심지어 농사일을 나갈 때는 나무를 피해 멀리 둘러 다녔다 한다. 이렇게 나무속   에 영물이 산다는 고목이 여럿 있다. 천연기념물 제76호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165호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 167호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381호 이천 도립리 반룡송 등은 뱀이나 이무기의 전설이 들   어 있다.17)


 위의 글은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월간문화재사랑’에 연재하는 <나무따라 전설따라>  에서의 <만지면 동티나고, 나무 베다 죽고, 이무기가 산다는 공갈전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이 글은 고목들에 얽힌 민속, 민간 신앙, 그리고 전선을 소개하고 있는 글이지요. 문화재에 대한 글입니다. 이 글이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인가 하는 문제는 일단 유보하겠습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

  추사 김정희가 주창한 금석학과 고증학은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뿌리부터   검증하는 일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강희 . 건륭 연간에 일어난 이 신학문을 더 이상 오랑캐   학문이라고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스승 박제가의 훈도를  받고, 24세 때 아버지 따라 북경에 가   서 그 학문과 예술의 번성함을 보고는 더욱 확신을 얻어 여기에 매진하게 된다.

  글씨에 있어서도 그동안 조선의 서체는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개성적이며 향색(鄕   色), 즉 민족적 색채가 짙은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추사는 이를 글씨의 고전, 중국 한나라 때   비문글씨체의 준경한 법도에 근거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추사는 당시의 신학문과 신예술의 기수가 되어 기고만장하게 30대와 40대를 보내고 54세에는 정치   적으로도 출세하여 형조참판(현 법무차관)이 되어 청나라에 동짓날 가는 외교사절단 부단장(冬至副    使)이 되어 30년 만에 다시 꿈에도 잊지 못할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정변이   일어나 추사는 급기야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다행이 벗인 영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절해고도인 제주도 귀양길에 오르니 그 인생의 허망은 여기서 절정에 달했다.

  제주도 귀양 가는 길에 추사는 전주,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   났다. 귀양살이 가는 처지임에도 추사는 그 기개는 살아 있어 대흥사의 현판글씨들을 비판하며 초의   에게 하는 말이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이겨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이리하여 다시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리게 되었고, 그 왼쪽에 있는    승방에는 추사가 귀양 가며 썼다는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이 하나 걸려 있으니 나는 여기서 조선의 두 명필이 보여준 예술의 정수를 다시금 새겨 보곤 한다.18)


 위의 글은 유홍준의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우리 문화유산인 서예의 대가 추사와 원교, 두 분의 현판 글씨가 걸린 대흥사 이야기를 임의로 뽑은 답사기입니다. 유홍준의 이런 경향의 글은 속간된 문화유산답사기에서도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는 성격의 글입니다. 이 글도 문화재 관련의 글이지요. 하지만 이를 우리는 수필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위에 소개한 6편의 글 모두를 우리는 수필이라 불러도 좋을지?. 글쎄요.

 문학적인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글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들은 자신의 문장으로 동어반복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자신의 저서에, 문예지에, 평론이나 월평 등에 개진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분의 이론을 들어 위의 글이 문학성 있는 수필인가를 점검해 보겠습니다.

 윤재천 선생은 <새로운 수필론>19)에서 수필의 문학적 성격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①인간과 삶에 대한 냉철한 비판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②세련된 생활 감정을 사색을 통해 여과시킨 글이어야 한다, ➂ 그리고 새로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시정신과 산문정신을 융합해 이뤄 낸 새로운 문학정신의 산문이어야 한다, ➃과감한 주제와 혁명적인 표현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야 한다고 최근에 발간된 자신의 문학전집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6편의 문화재를 글감으로 쓴 글을 이 네 가지 조건에 비쳐 볼 때, 위의 인용문들 속에서는 냉철한 비판의식, 세련된 사색, 새로운 문학정신, 그리고 혁명적인 표현도 부족하다 느껴질 것입니다. 다만 색다른 소재를 통한 과감한 주제 의식은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습니다. 문화재 관련 소재는 다양하고 특별합니다. 그 속에는 역사가 있고, 선조들의 지혜 또는 혼이 있으며, 온축된 지식, 그리고 문화재 당대의 미학이 있고 현대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과감한 주제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글감의 보고이지요.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글감에 걸 맞는 혁명적인 표현을 개발하는 일일 것입니다.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입니다. 문화재를 소재나 제재로 한 수필은 위에 인용한 산문들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문인 특히 수필가인 여러분들에게는 글감의 보고일 수밖에 없고 가장 친근하게 다룰 수 있으며. 수필의 특성인 인품의 문학으로서 빛을 발하게 해줄 문화재 관련 수필은 수필의 소재 영역의 확대는 물론이고, 기행수필, 교양수필, 답사 수필, 전문적인 지식 수필, 독서체험수필의 새 지평을 열게 해주는 영역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기행수필의 경우 단순한 여행기에서 벗어나 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그 문화재의 미학적 탐색을 통해 로고스적 충족과 파토스적인 감동을 함께 줄 수 있는 수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자료 준비와 비판적인 사색, 그리고 발칙한(?) 상상력과 혁명적인 표현력 등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이번의 해외 심포지엄과 문화 기행을 통해 얻게 되었으면 합니다.





 .................................

 *유한근

-중앙일보 신춘 동시,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방송문예학과 교수. 학생처장.